이건 사실 직업적인 비밀인데, <씨네21> 사진팀장이 여배우들과 작업하는 걸 지켜보는 묘미란 무한 칭찬의 무한 연사에 있다. “정말 예뻐요! 아니 이렇게 예뻐서 어떡해! 대체 왜 그렇게 예뻐요?” 처음 들으면 꿈쩍 놀라게 되지만 자주 보다보면 참 요술 같은 데가 있구나 싶어서 다시 꿈쩍 놀란다. 각종 인터뷰와 화보 촬영으로 지친 여배우들의 섬세한 마음이 또다시 시작되는 두 시간여의 촬영으로 살짝 금이 가려는 순간, 무한 칭찬의 연사가 오공본드 같은 접착력으로 마음의 금을 사라락 메워버리는 것이다. 배우들의 포즈는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하고, 살짝 부끄럽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가 배시시 돌아온다. 그런데 한예슬은 특유의 하이톤 웃음소리와 함께 툭 답한다. “음… 선녀강림?”
고단수다. 하긴 생각해보면 조안나가 아니라 얼빠진 나상실마저도 고단수이긴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한예슬의 첫 영화 <용의주도 미스신>도 용의주도한 고단수 여우 이야기다. 태생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데다 광고대행사 AE라는 근사한 직업을 가진 신미주는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붙잡는 여자로, 단출하게 네명의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 하나는 재벌 3세, 하나는 사법고시 준비생, 하나는 섹시한 연하 래퍼, 또 다른 하나는 사사건건 트집잡는 직장상사 겸 이웃사촌. 그런데 신미수의 용의주도함이 과연 용의주도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느냐. 시나리오로만 유추하건대, 한 가지 힌트가 있다면 신미수는 한예슬의 캐릭터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바로 그런 여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딱 한예슬이다.
“아직은 영화배우라고 불리는 게 어색한데 어떡하지.” 그러고보면 지난 5년간 한예슬은 겨우 4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데뷔작 <논스톱4>와 김태희와 한예슬이라는 미래의 여우들을 동시에 사구로 밀어넣었던 <구미호외전>, 정다빈의 유작으로 남았으나 한예슬의 정공법에도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줬던, 그러나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여름의 태풍>, 마침내 한예슬을 한예슬이도록 만든 절정의 코미디드라마 <환상의 커플>. 그리고 첫 영화로 <용의주도 미스신>을 선택한 이유는? “심플하다. 하고 싶은 걸 한다. 내 그릇에 딱 맞는 걸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다.” 심플해서 딱 좋았다.
-(한예슬이 책상에 놓여 있는 <씨네21>을 보기에) 영화잡지 종종 보나.
=새로 개봉한 영화는 영화잡지로 체크하지 않으면 언제 뭐가 개봉하는지 잘 모르겠더라. 영화인들 소식도 마찬가지고.
-극장에 자주 가나보다.
=음, 사람들이 많은 극장은 안 간다. DVD로 보거나 미국을 자주 왔다갔다 하니까 비행기에서 주로 본다. 일단 비행기에 오르면 기내영화를 모조리 다 본다.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이륙부터 착륙까지 대여섯편을 내리 본다. 피곤하지도 않다. 너무 좋아서.
-뭐가 제일 재미있던가.
=최근에 본 영화라면, 시에나 밀러 주연의 영화들이 좋더라. <팩토리 걸>과 <인터뷰>(스티브 부세미 감독의 신작이며 한국에서는 아직 개봉하지 않았다.-편집자). 밀러는 두 영화에서 연기 패턴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데도 캐릭터가 흥미로워서 괜찮았다. 물론 그녀의 스타일에도 관심이 가고.
-<환상의 커플>로부터 거의 1년을 쉬었다. 시나리오도 꽤 많이 들어왔을 테고 욕심나는 역할도 많았을 텐데.
=너무 욕심내서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내가 뭘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영화는 처음이라 모험이나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대중의 신임을 먼저 받고 싶었다. 진짜 욕심나는 역할은 그 이후에도 가능하니까.
-<용의주도 미스신>은 확실히 조금 전형적이고 안정적인 한예슬표 역할이다.
=안정? 그건 아니다. 물론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려고, 너무 주제넘지 않는 선택을 하려고 신경도 썼지만, 중요한 건 나만의 색깔을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역시 이 역할은 한예슬이 하니까 딱 맞아. 그런 거 말이다. 전형적이라고 했는데 사실 모든 로맨틱코미디는 스토리만 본다면 다 전형적이다(기자도 한예슬도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편집자).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덧붙여짐으로써 뻔한 것도 덜 뻔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나저나 말을 정말 또렷또렷하게 구사한다. 외국에서 살았다는데 한국말도 참 잘하네, 그런 뜻은 아니고.
=나는 어휘력이나 어법이 배우에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가진 생각과 느낌을 정확하게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건 배우로서도 엔터테이너로서 득이 되는 일이고, 그러려고 연습도 많이 해왔다. 휴, 말이라도 열심히 연마해야지 연기나 대화할 때 답답함도 적어지고. (웃음)
-하긴 <논스톱4>로 데뷔했을 때 발성문제도 꽤나 지적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논스톱4>의 캐릭터는 발성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정상적인 애가 아니거든. (웃음) 물론 미국에서 건너온 터라 한국어가 낯선 부분도 있었다. 처음엔 그게 장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장기적으로는 플러스가 될 거라는 생각도 든다. 두 문화를 다 알고 두 언어를 다 말하니 앞으로 외국에서 활동하게 되면 진짜 플러스가 아닐까. (웃음)
-긍정적인 게 온스타일에서 말하는 그 ‘캘리포니아 걸 스타일’인가보다.
=태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엔돌핀이 샘솟나보다. (웃음)
-미스신은 어떤 스타일의 여자인가.
=헛똑똑이다. 용의주도한데 용의주도하지 않은 여자. 본인이야 자기가 용의주도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순박한 여자라 세상에 대한 배신감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네 남자를 만나 성숙해가는 여자다.
-시나리오 읽으니 네 남자 중에 마음에 드는 놈 하나도 없더라.
=하긴(웃음) 백마탄 왕자처럼 퍼펙트한 남자는 이 영화에 없다. 그게 현실이지 뭐. (웃음) 신미수도 자신이 완벽하지 않으니까 완벽한 남자를 찾아 헤매는 거지.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남자가 어딨나.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지. 지나치게 기대하는 순간 자기 인생이 아니게 되는 거다.
-성격이 느긋해서 영화가 더 잘 맞지 않나.
=그런 건 또 없다.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점은 없다. 직업이라고 생각하니까. 프로답게 일하고 싶으니까.
-프로답게 일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맡은 역할을 책임감있게 해내는 거다.
-외부사정으로 그런 게 안 될 때도 있지 않나.
=그건 프로가 아니다.
-항상 그렇게 프로로 보이려 하나.
=어떻게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나에게 진짜 프로란 자기가 감당 못하는 일을 괜히 욕심내서 선택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모든 문제는 자기 그릇보다 큰일을 하다가 망치면서 시작된다. 나는 내가 딱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사실 옛날부터 잘 못하는 건 하기 싫어했다. 자존심이 세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내가 부족하면 그냥 숨고만 싶다. 사실 이건 프로정신이라기보다는 진짜 자존심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사람이 좀 그냥 둥글둥글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지. (웃음) 나는 못하는 건 아예 안 하거나 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만다. 그러나 일단 선택하면 엎질러진 물이니까 피하지 않는다. 죽기살기로 어떻게든 잘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그 정도 자신감은 <환상의 커플> 하면서 조금 붙지 않았나.
=엄청 좋았다. 이대로 죽어도 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좀 생겼다. 완전히 나상실이 돼서 살았고 정말 솔직하게 했는데 대중이 그걸 받아주니까 믿음이 생기는 거다. 아, 이제 사람들과 나는 통하는구나. 이제는 말이 통해. (웃음) 그때 형성된 상호신뢰 덕에 자신감이 붙어서 <용의주도 미스신>도 재미있게 한 거다. 이게 잘되면 또 자존심도 신뢰도 같이 높아지겠지. (웃음)
-그래서 활동도 그렇게 쉬었나. 한창 나상실로 인기가 도도했는데도.
=좋았지만 거품에 올라타서 하늘을 나는 느낌은 받고 싶지가 않았다. 그럴수록 좀 진중한 사람으로 보이고도 싶었다. 거품은 무서운 거다. 단단한 평지가 아니라 금세 떨어지고 사라진다.
-거품이 꺼지는 걸 겪어본 적이 있나.
=그냥 알 것 같다. 주변의 다른 배우들을 보면서 관찰을 했으니까. 그리고 <논스톱4>로도 거품을 조금 탔다. 그때는 거품이 뭔지도 몰랐는데 돌아보면 그랬던 것 같다.
-친구는 많나. 같이 지금 같은 이야기를 할 친구들.
=친구라면 같이 놀아주는 친구를 의미하는 거겠지. 나는 친구가 없으면 외로운 상황인데도 솔직히 친구가 그리 많지 않다.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니까 그들이 다 친구가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누구는 사람들이 외모만 좋아해서 더 다양한 역할을 못한다고 아쉬워도 하던데, 본인은 예뻐서 만족하나.
=예뻐서 만족 못하면 이상한 사람이지. 이영애 언니도 예쁘지만 연기로도 인정받잖아. 그리고 빛나는 외모로 사랑받는 것도 탤런트(재능)라고 생각한다. 전지현, 송혜교, 김태희처럼 아름다움으로 찬양받는 배우들 다 훌륭하다. 대중이 즐거워하잖아.
-아름다운 건 확실히 재능이긴 하다. 아무나 타고나는 건 아니니까. 여튼 이제 개봉하면 바쁘겠다.
=잠깐만. 좀더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은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니까 아까처럼만 말하면 아주 재수없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근데 나는, 정말정말 솔직히, 너무 지나치게 예뻐서 외모부터 확 보이는 배우라고 스스로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배우들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아까처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너무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성격이 좀 그렇다. <환상의 커플>에서 사랑받은 것도 일부러 예쁜 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은 예쁜 척을 좀 해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 진짜 많이 노력한다. 예쁜 척, 해보려고. (웃음)
(같이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