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울프>가 광고 등을 통해 영화의 주된 서사 이미지로 띄운 것은 안젤리나 졸리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노출장면이다. 안젤리나 졸리는 이 영화에서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을 하기는 하지만 출연 빈도나 길이로 보면 주연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우리가 영화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도 실제 인물 안젤리나 졸리가 아니라 3D애니메이션화한 그녀다. 그것은 영웅 베오울프 역을 맡은 레이 윈스턴도 마찬가지고, 앤서니 홉킨스나 존 말코비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베오울프>의 선전에 위 주인공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 영화는 EOG라는 약어로 알려진 Electrooculogram이라는 툴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EOG는 사실 교육쪽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것인데, 눈 주변에 전극을 대고 안구 움직임을 통해 전자파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원리를 통해 안젤리나 졸리의 퍼포먼스 패턴을 캡처해 그녀의 라이브 액션과 유사한 3D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 것이다. 영화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와 3D애니메이션 효과를 담당했다는 정유진씨 등 영화 제작진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유사한 <폴라 익스프레스> 이후의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안젤리나 졸리를 아슬아슬하게 닮은 3D 안젤리나 졸리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지점은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제3의 이미지 메이킹의 출현이다. 특히 얼굴이라는 물상(physiognomy)을 중심으로 해 번져나가는 차이들을 읽어내려 할 때 미묘하게 다가오는 언캐니(uncanny)한 느낌, 어떤 낯선 친숙함, 친숙한 낯섦 같은 것이다. 프로이트적인 용어인 언캐니는 공간적, 물리적, 심리적 위상을 갖고 있다. 예컨대 애니메이션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할리우드의 배우, 우피 골드버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것도 어떤 언캐니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베오울프>처럼 작심하고 실사와 컴퓨터그래픽의 경계를 지워나갈 때, 그리고 안젤리나 졸리를 닮은 3D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퍼포먼스 캡처를 통해 그녀의 행위와 얼굴의 표정에 접근해 근사한 퍼포먼스를 구현해낼 때 우리는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또한 이러한 이중적 감흥은 이 영화에서 안젤리나 졸리가 맡고 있는 괴물 어머니이자 팜므파탈 역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괴물 어머니로 말하자면 <에이리언>을 능가하기는 어려우나, <에이리언>의 괴물은 치명적 유혹녀가 아니었고, 모델이 된 여배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베오울프>에서 괴물 안젤리나 졸리는 관객이 그녀에게 갖고 있는 판타지를 극대화한다. 몸의 선은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 때보다 더 깊숙이 곡선이며, 당시의 진줏빛 은색 의상을 금색으로 바꾸었다. 완벽한 금빛 육체, 그 어디에 긴 꼬리가 달려 있다. 뱀의 꼬리를 가진 물의 마녀다. 그러나 몸의 선은 완전하지만, ‘물상’의 핵으로서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거기에는 아직도 미흡한 것이 있다. 미묘한 복합성이 없다. “당신이 베오울프지?”라고 영국식 악센트로 말을 걸 때 그것은 분명 안젤리나 졸리의 목소리지만, 그녀의 얼굴은 아직은 원본과 매우 유사한 무엇일 뿐이다. 특히 대담하면서도 무심한 안젤리나 졸리의 표정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나는 이 약간의 어긋남이 재미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리키는 미래(지구 온난화를 뚫고 온다고 한다면)의 실제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그리하여 제3의 어떤 무엇으로 불릴 것의 위상이 궁금하다.
빛나는 배우들을 왜 캡처 화면으로 봐야 할까
한때 영화 프로듀서들은 디지털 필름 메이킹 시대가 오면 비싼 출연료를 가져가고, 종종 촬영을 펑크 내며, 갖가지 추문을 일삼는 배우들을 대체하는 디지털 배우가 등장할 것이라는 희희낙락한 자신의 관점에서의 미래 비전을 내놓곤 했다. 그래서 2002년 알 파치노는 <시몬>이라는 영화에서 그 판타지를 시험하게 된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이러한 삼류 프로듀서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대신 조금 더 약게 나아갔다. 비싼 출연료의 배우와 그/녀를 대체한다기보다는 더 완벽하게 복제해내려는 충동을 보여주는 활인화, 애니메이션된 캐릭터를 융합하는 것이다.
즉 디지털이 모핑(형태 변화)을 통해 영화의 사진적, 지시(인덱스)적 기능을 소멸시킨다는 현실성 붕괴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예언이 무성했으나 이러한 CGI는 한 배우의 인지 가능한 매력들을 최대한 지시적으로 가져와 컴퓨터그래픽으로 재생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유토피아적인 방향이라는 말은 아니다. 신테크놀로지가 기존의 미디어를 재매개화하는 유연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이 유연 기술이야말로 유연 노동으로 범주화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생산해내는 신자유주의의 CGI된 얼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투기 자본이 넘쳐나는 할리우드에서 굳이 배우 출연료를 절약한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동원할 수 있는 문화자본을 모조리 끌어들여 극대화된 효과를 내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즉 이제까지는 실사 대 CGI라는 이분법이 작동했고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 실사의 실제적 물질 기반이 와해되리라고 보았으나, 영화 <베오울프>가 보여주는 방향은 두개의 교묘한 결합, 융합 혹은 봉합이다.
<베오울프>의 공식 사이트를 보면 로버트 저메키스와 프로듀서는 세트나 의상 등 영화제작의 기본을 일단 실제로 완성한 뒤 그것을 스캔해 컴퓨터에 옮긴 다음 컴퓨터그래픽 작업을 했다고 말한다. 디지털 모핑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이 재현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 재료들을 대체할 것이라던 생각도 여기에서 어느 정도 엇나간 셈이다. 세트와 의상들이 영화를 찍는 방식으로 제작되고 거기에 덧칠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베오울프>라는 것이 원체 원작이 있다기보다는 여러 버전이 있는 것이라 차이를 논하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이 영화가 지배적인 베오울프 서사와 다른 점은 예의 그 안젤리나 졸리가 맡은 괴물 어머니에 대한 묘사다. 즉 기존의 서사에서 그녀는 괴물 그렌델의 어머니이며, 그렌델의 복수를 하고 베오울프와 전투를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묘사된 바의 팜므파탈은 아니다. 이렇게 이 인물이 부각됨으로써 상대적으로 베오울프 역을 맡은 레이 윈스턴은 CGI 작업을 거치고 나니 나온 배가 들어갔다거나 하는 정도로밖에 이야기되지 않는다. 사소한 베오울프라니….
하지만 이 영웅은 두번의 엄청난 격투를 하게 되는데 거인 괴물 그렌델, 금빛 드래곤과의 혈투가 그것이다. 특히 그렌델과의 싸움장면에서 디지털과 실제의 융합 재매체화로서의 이 영화의 장기가 두드러진다. 베오울프는 갑옷도 없고 무기도 없는 괴물과 동일한 조건에서 싸우겠다고 하면서 나체로 싸운다. 각종 와이어와 안전장치를 동원한다고 해도 이러한 3D애니메이션영화가 아니라면 보기 힘들 나체 격투 장면이다.
영웅과 신화와 전설, 그리고 악이 지배하는 이교도적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점을 암시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물의 마녀’는 카인의 후예로 그려진다. 그리고 앤서니 홉킨스의 호르트가드왕은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젊은 시절 영웅이던 그는 벌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연회장을 만드는데 그렌델이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의 향연이다. 그렌델이라는 괴물의 저주에 깊은 참회를 하면서도 그는 향연을 멈추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그래도 속깊은 대사 “나의 저주는 그렌델이지. 그녀가 아니야”는 바로 호르트가드로부터 나온다. 존 말코비치가 맡은 시니컬한 독설가의 역할도 재미있다. 그러나 앤서니 홉킨스와 존 말코비치의 그 다채로운 매력을 이 애니 캐릭터들이 구현해내지는 못한다. 대신 관객이 얻는 선물은 안젤리나 졸리, 존 말코비치 그리고 앤서니 홉킨스와 같은 세명의 비싼 스타들을 한꺼번에 모두 그들과 상당히 근접한 형태로 보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매력도 느끼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베오울프>를 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얼굴이라는 물상에서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포토제닉한 매혹. 위 세명의 배우들이 모두 잘 가지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빛나던 존 말코비치를 이 강도나 복합성이 떨어지는 3D애니메이션에서 보아야 하는지. 앞으로의 스타성이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이렇게 하여 변화는 해일처럼 닥쳐오고,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던 바의 영화, 시네마, 필름을 잃어간다. 일명 퍼포먼스 캡처의 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