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어른의 열정
2007-12-07
글 : 김현진 (칼럼니스트)
책임지지 않는 어른의 영화 <베오울프>를 보고 현실에서 진짜 어른을 만나다

(*혹시라도 영화의 줄거리를 전혀 알고 싶지 않으신 분은 읽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베오울프>에서, 호르트가드왕이 가진 모든 것은 매우 성공적으로 베오울프에게 인계된다. 그가 가진 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지위와 권력, 병사들, 황금 용의 모양을 한 술잔으로 상징되는 재산과 그 용처럼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와 고운 목소리를 가진 아내까지, 젊은 베오울프는 늙은 왕의 모든 것을 이어받는다.

하지만 그가 물려받은 것이 이렇게 근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저 깊은 굴 속에는 마녀가 하나 사는데 말이 마녀지 이 여자가 누군가, 골든 커플이라 불리던 브래드 피트와 제니퍼 애니스톤을 순식간에 갈라놓았던 마성의 여자다. 취미처럼 왕이란 왕은 족족 자빠뜨리고 괴물을 낳아 그 자식이 또 어린 백성을 괴롭히니 베오울프는 하룻밤 재미 본 것으로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죄과의 관습까지도 물려받은 셈이며, 왕비는 한번 남편을 뺏긴 것으로 모자라 두 번째 남편에게서도 처절하게 소박을 맞고 만다. 사실 그 아무리 정숙한 사내라도 물속에서 다 벗은 안젤리나 졸리가 유혹해오는데 저항할 수 있을 자 누구겠냐만 어쨌든 호르트가드왕의 공과는 그가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음으로써 계승되니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어떻게 보면 <베오울프>는 “어른이 제대로 된 본을 보이지 않았을 때 공동체에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호르트가드왕은 일단 마녀에게 정조를 주고 아내를 배신했고 그 정조에 포함된 정자를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훤히 알았음에도 그것을 방치한다. 그리고 그렌델이 나타나 온갖 포악한 짓을 하든 말든 자신이 그 문제를 수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바다 건너에서 올 영웅을 기다릴 뿐이며 끝내 자신이 한 짓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는다. 뉘우치기는커녕 모든 짐을 젊은 세대에게 맡기고 속 편하게 세상을 등질 뿐이고, 아버지를 일찍 잃은 팔팔한 영웅 베오울프와 마음 털어놓을 곳 없는 외로운 신세인 왕비 웰쏘는 그냥 그대로, 시들어간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귀감이 될 만한 멋진 어른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살아라, 어디 한번 잘살아보라고 독려해주고 인생은 살 만한 거라고 말해줄 만한 어른들이 있다면 빡빡한 20대도 살기가 훨씬 낫겠건만 현실에서 만나는 어른들은 죄다 호르트가드왕처럼 지치고 고단해 보여 성벽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게 잡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다가 나는 귀여운 아저씨 두 사람을 만나고, 감격하여 이것을 적어둔다. 적어도 성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먹고살기 힘드니 너라도 뛰어내리라는 어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거였다. 그중 한명은 단밤을 파는 아저씨였다. 모래에 볶아내는 약밤을 팔던 그는 그 옆에 서 있던 내게 몇개를 집어주었다. 맛있네요, 하고 대꾸하자 그는 정성스레 밤을 볶으며 활짝 웃었다. 맛있죠, 정말 맛있죠. 나는 이거 팔면서 정말 너무 먹고 싶다니까. 너무 맛있어서. 냄새도 너무 좋고. 그는 밤을 몇개 더 주었고, 그의 말대로 그 밤은 정말 맛있었다. 진심으로 그는 자기의 밤을 좋아하고 있었고, 나는 어느새 “이놈의 것 당장 때려치우고 만다”라는 직장인 최대의 거짓말이 입에 붙어버린 스스로에게 그의 활기를 전염시켜보고 싶어서 밤을 좀 샀다. 밤을 사고 나서는 헌책방에 들렀다. 고학생 자취방처럼 조그마한 그 헌책방에는 몸을 끼워넣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책이 가득 차 있었고, 수건으로 책을 닦던 50대 주인은 봉지에 책을 담아주며 “우리 웹사이트에 와보시오!”라고 했다. 아날로그한 책방과 책방 주인과 잘 매치가 되지 않는 단어라 갸웃했더니 그는 재차 “우리 웹사이트에 와보셔! 정말 너무 잘돼 있어!” 하고 크게 외쳤다. “사이트도 운영하세요?” 하고 묻자 그는 “그럼, 여기 있는 책이 다가 아니야! 엄청나게 많아! 사이트에 다 올려놨지! 나는 말이야, 이 책방이 정말 좋아 죽겠어! 좋은 헌책방이야! 정말 너무 여기가 좋아 미치겠어!” 하고 말했다. 좋아 미치겠다, 쿨한 인간 천지인 세상에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좋아 미치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말 미치진 않겠지만 미칠 정도의 삶과 일터에 대한 사랑이 지글지글대서 나는 그 순간 무릎이라도 꿇고 묻고 싶었다. 어르신, 비결을 알려주십시오! 계속 이런 아저씨만 본다면 살아 있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뛰어내리는 어른들 말고 이렇게 살아서 싸워내고 또 살아남는 그런 아저씨들, 그런 어른들의 원숙한 에너지를 좀 전염받을 수 있다면 베오울프처럼 팔 자르고 안 죽고도 살아질 텐데,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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