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진중권의 이매진] 우리는 디지털 가상 세계의 좀비들인가
2007-12-07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아날로그→디지털의 과도기적 거부감, ‘언캐니 밸리’ 효과를 미학적으로 활용하는 영화들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는 소년. ‘폴라 엑스프레스’를 타고 산타와 엘프의 고향 북극으로 여행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크리스마스를 믿게 된다. 차장이 그의 티켓에 펀치로 뚫어준 낱말도 ‘믿어라’(believe).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산타가 보낸 선물은 썰매에 다는 방울. 속이 빈 방울의 소리는 어른들 귀엔 들리지 않는다. 산타를 믿는 아이들의 귀에만 영롱한 소리를 낸다. 친구들은 얼마 뒤 더이상 그 소리를 못 듣게 됐지만, 이제 아이에게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방울 소리가 들린다. 당신에게도 들리는가?

“아, 슬프다, 안 들린다.” 미국의 애니메이션 감독 워드 젠킨스가 찬물을 끼얹는다. 물론 아이들은 산타의 실재를 믿듯이 그래픽의 실재성을 믿을지 모른다. 하지만 산타를 안 믿는 어른의 눈에 캐릭터들이 전혀 실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폴라 엑스프레스>는 이미 개봉하기 전부터 캐릭터들이 주는 섬뜩한 인상 때문에 관객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이 기술적 ‘걸작’의 제작에 수백만달러를 처들였는데도, 왜 아이들이 그렇게 소름 끼치게 보이는가?”

“<폴라 엑스프레스>에 섬뜩한 캐릭터 디자인들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에 굳이 좋은 머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뭘 고치고, 뭘 놔둘지 가리기 위해 미학에 대해 감이 좀 있는 사람을 고용했더라면, 이 모든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말을 실증하기 위해 그는 ‘포토샵’을 동원한다. 수정을 마치고 나니 화난 듯 사나워 보였던 아이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지금 그는 달리다가 어떤 계곡에 빠진 <폴라 엑스프레스>호를 구해내는 중이다. 어떤 계곡인가? 한번 그 ‘계곡’으로 들어가보자.

부키미노 타니(不気味の谷)

“y=f(x)라는 형식의 수학적 함수들이 있다. 여기서 y의 값은 x가 증가하면서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함수만 있는 게 아니다. 가령 “산을 오르는 것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지 않는 함수의 예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줄어든다고 고도가 항상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사이에 언덕과 계곡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로봇이 점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친밀도가 증가하다가 어떤 계곡에 도달하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이런 관계를 ‘섬뜩함의 계곡’(不気味の谷)라 부른다.”

계곡의 발견자는 일본의 로봇공학자 마사히로 모리(政弘森). 처음에는 로봇의 인간유사성(human likeness)이 친밀도를 증가시킨다. 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그것이 외려 혐오감을 준다. 그러다가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지면, 친밀도가 회복되어 정상에 도달한다. 그래프에서 가장 혐오감을 주는 계곡의 바닥은 외형의 경우엔 시체, 동작의 경우에는 좀비다. 한마디로 어설프게 인간을 닮은 로봇은 친밀도의 나락으로 떨어져 시체나 좀비처럼 느껴진다는 얘기.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 C3PO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분한 <터미네이터>는 전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스타워즈>의 안드로이드는 여러 모에서 인간과 확연히 구별되고, 터미네이터는 외형와 공작이 인간과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제작한 휴머노이드들은 섬뜩한 느낌을 준다. 두 봉우리 사이의 계곡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섬뜩함의 계곡, 즉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의 개념이 일본에서 먼저 제기된 것은, 기능성 로봇의 제작에 주력하는 미국과 달리 휴머노이드 제작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운하임리히

일본어 ‘부키미’(不気味), 영어의 ‘언캐니’(uncanny)는 독일어 ‘운하임리히’(unheinlich)의 역어다. 이 개념을 제일 먼저 사용한 심리학자 에른스트 옌취는 그것을, “어떤 생명있어 보이는 존재가 정말 살아 있는 건지, 혹은 반대로 어떤 생명없는 사물이 혹시 살아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 개념을 E. T. A. 호프만의 <잔트만>의 효과를 설명하는 데에 사용하기도 했는데, 거기서 소설에서 교수의 딸 올림피아는 나중에 자동인형으로 드러나고, 이것이 결국 주인공을 몰아가게 된다.

이 섬뜩한 느낌은 어디서 올까? 어떤 가설에 따르면, 시체의 표정과 좀비의 동작을 닮은 휴머노이드가 불쑥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사망 돌각 가설’)이라고 한다. 다른 가설에 따르면 뭔가 결함이 있어 보이는 존재가 종족의 유전자 풀에 섞여 들어오는 것에 생명체가 본능적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진화 미학적 가설’)이라고 한다. 아무튼 인간-기계의 관계는 원래 1인칭-3인칭의 관계이나, 그것을 1인칭-2인칭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는 분명히 어떤 섬뜩함이 있는 게 사실이다.

기능성 로봇의 경우에는 섬뜩한 계곡에 빠질 일이 별로 없다. 인간의 일부 기능만을 모방한 봉사로봇(service robot)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머노이드는 다르다. 인간의 외형과 동작과 생각을 통째로 시뮬레이션한 반려로봇(companion robot)이기 때문이다. 봉사로봇은 아직 사물로 여겨진다. 즉 진공청소기와 같은 도구로 분류된다. 하지만 반려로봇은 이미 인격으로 여겨진다. 즉 그것은 내게 위안을 주는 친구의 범주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친구를 꼈다 켰다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래픽의 계곡

미국에서는 언캐니 밸리의 문제가 주로 영화의 CG에서 발생한다. 애니매이션에서는 일본과 미국은 처지가 서로 뒤바뀐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저해상이라면, 미국의 애니메이션은 고해상이기 때문이다. 이미 디즈니 만화는 아날로그 시절에도 실제 인물의 동작을 필름으로 촬영하여 그대로 만화로 옮기곤 했다. <폴라 엑스프레스>와 더불어 언캐니 밸리에 빠져 좌초했다고 얘기되는 것이 바로 <파이널 판타지>. 디지털로 그린 인간들만 등장하는 이 영화는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인간을 CG로 처리하는 것은 공룡 따위를 모델링하는 것과는 애초에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인간 배우를 대체할 이른바 ‘디지털 액터’는 아직 요원한 일이다. 아무리 인간 배우의 온몸을 하얀 진주알(센서)로 뒤덮어 스캐닝을 하더라도, 진주알들 사이의 면적은 온통 빈틈으로 남아 있다. 빌렘 플루서는 입자(센서)의 밀도를 점차 높임으로써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간극을 메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영화의 CG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섬뜩함의 깊은 계곡을 지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계곡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반드시 디지털 CG의 밀도를 아날로그만큼 빽빽하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설픈 인간유사성은 언캐니 밸리의 효과의 그저 ‘한 가지’ 요인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다른 많은 요인들이 있다. 다른 요인들을 적절히 기술적으로 피해가면, 굳이 외형과 동작에서 아날로그와 똑같은 단계에 오르지 않고도, 캐릭터의 섬뜩함을 완화시키고 친밀감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인크레더블>처럼 캐릭터를 캐리커처처럼 양식화하여 아예 계곡을 우회하는 수도 있다.

효과로서 언캐니

구멍 뚫린 디지털 그래픽으로 촘촘한 아날로그 세계를 커버할 수는 없는 일. 그리하여 늘 계곡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는 게 디지털의 운명이라면, <디지털 모자이크>의 저자 스티븐 홀츠먼의 주장대로 그것을 외려 미학적 장점으로 전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E.T.A. 호프만은 언캐니를 문학적 효과로 적절히 활용했다. 여기서 언캐니는 아예 작가의 스타일이 된다. 한국에서는 조각가 천성명의 작품이 예가 될 것이다. 재를 뒤집어쓴 그의 자화상 조각은 의도적으로 섬뜩하다.

괴기영화에서는 ‘언캐니’가 외려 장점이 된다. 가령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캐릭터는 되도록 섬뜩해야 한다. <반지의 제왕>의 골룸도 비슷한 경우. 그의 섬뜩함은 CG의 언캐니인지, 캐릭터의 언캐니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아이, 로봇>에 나오는 안드로이드. 외형은 그리 인간을 닮지 않았다. 섬뜩함은 다른 로봇과 같은 외형이 아니라, 인간과 같은 내면에서 비롯된다. 섬뜩한 영혼 하나가 친밀한 외형을 가진 로봇들 틈에 숨어 있다. 영화의 긴장감은 여기서 나온다.

“현실은 유령처럼 될 것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간극이 점차 사라질 것이라 예견하는 빌렘 플루서. 그때 도래할 세계를 그는 ‘유령’에 비유한다. 가상과 실재의 경계는 날로 사라지고 있다. 디지털 가상으로 뒤덮인 이 세계 자체가 이미 언캐니한지도 모른다. 이 유령 같은 세계를 이미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우리는 벌써 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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