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기술의 이름을 하나씩 외워야 하나보다. 이번엔 ‘퍼포먼스 EOG 캡처’라고 한다. <폴라 익스프레스>의 문제로 지적됐던 이른바 ‘데드 아이 신드롬’을 극복하고, 살아 있는 인간의 눈동자를 자연스럽게 재현했다나? 그리하여 제작자는 이 영화를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실사영화도 아닌 ‘제3의 장르’로 분류해달라고 요구했단다. 하긴 그림과 사진의 차이가 사라지는 게 생성이미지 시대의 일반적 현상이긴 하다.
“새로운 기술로 영화의 미래상을 제시한 <베오울프>.” 인터넷에서 주운 어느 기사는 <베오울프>의 기술적 성취에 고무되어 거기서 미래의 영화를 찾는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의 미래상을 외려 ‘언캐니’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가령 이 잡지의 편집장은 “3D 캐릭터가 모방할 수 없는 연기의 깊이와 신기술로 대체될 수 없는 영화의 스타일”을 내세워, 아날로그영화가 “인간의 영혼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을 재확인한다.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베냐민의 말대로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들어서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도,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아우라도” 파괴된다. 영화가 등장했을 때 배우들은 이미 한번 ‘인격의 아우라’를 잃어버렸었다. 이 현상이 혹시 아날로그 배우에서 디지털 액터로 변화하는 시대에 다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아무튼 베냐민은 아우라의 파괴를 아쉬워하기보다 외려 환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디지털 분라쿠
연극배우의 연기는 전체적이나 영화배우의 연기는 파편적이다. 베냐민은 파편적 연기를 하는 영화배우들이 느끼는 공허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허감이 생겨나는 까닭은 그의 육체가 자신에게서 떠나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사라지며, 또 그의 실체, 그의 삶, 그의 목소리, 그가 불러일으키는 소음 등도 자신에서 이탈되어 스크린에서 명멸하다가 다시 정적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느낌.”
디지털은 이 ‘사라짐’을 완벽으로 끌어올린다. 위의 기사는 ‘퍼포먼스 캡처’로 인해 “특정 배역을 연기하기 위한 성별, 나이, 외모 등의 조건이 무의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170cm의 신장을 가진 레이 윈스턴이 영화에서는 2m가 넘는 거구의 베오울프로 둔갑하는가 하면, 반대로 1m가 채 안 되는 조그만 난쟁이의 신체를 입기도 한다. “육체가 자신에게서 떠나버린 것” 같은 주관적 느낌이 아예 객관적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숏의 몽타주로 이루어진 영화는 유기적 전체성을 가진 연극과 달라 파편적 연기를 요구한다. 디지털영화 역시 앞으로 아날로그와는 다른 유형의 연기를 요구할까? 가령 과거에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카메라 앞’으로 연기의 방식으로 바꾼 것처럼, 디지털 배우들 역시 새로운 연기에 익숙해져야 할까? 육체가 없는 순수 다이어그램으로서의 연기. 디지털 배우는 인형 뒤에 숨어 동작의 자연스러움만 연기하는 일본 분라쿠 장인을 닮았다.
컴퓨터 앞에서
위의 기사는 “로케이션, 소품, 의상, 세트, 조명 등 모든 제약조건을 벗어나 어떤 영화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기간 또한 혁신적으로 줄어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작기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아예 피사체 자체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디지털 대역배우의 연기는 피사체의 진공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현실의 장소든, 가상의 세트든, 일체의 물리적 공간에서 떨어져나온 추상적 연기다.
피사체가 없다면, 카메라도 필요없다. 이로써 전통적인 카메라맨의 기능도 사라진다. 배우들은 이제 카메라가 아니라 컴퓨터 앞에서 연기를 한다. 연기는 플롯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정보를 전송하는 작업이 된다. 또 촬영은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로 데이터(raw data)를 수집하는 작업이 된다. 센서를 통해 전송된 추상적 정보를 구체적 이미지로 변성하는 것은 카메라맨이 아니라, 컴퓨터로 그래픽을 만드는 엔지니어들의 과제로 돌아간다.
전통적 의미의 미장센(mise en scene)도 사라진다. 유일한 인덱스는 캡처한 모션뿐. 화면의 나머지는 현실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에서 나와야 한다. 감독은 화면의 거의 모두를 고해상의 영상으로 채워넣어야 한다. 이는 물론 현상학적 구체화의 새로운 차원이다. 전통적 의미의 미장카드르(mise en cadre)도 사라진다. 컴퓨터는 해상도를 떨어뜨리지 않고도 무한 줌인과 무한 줌아웃을 할 수 있다. 디지털은 프레임의 제약을 알지 못한다.
이야기 속으로
베냐민은 당대의 상업영화가 환상의 표현으로 치닫는 것을 가리켜 ‘반동적’이라 했다. 영화는 모름지기 렌즈의 힘으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예리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제시대의 이미지는 이렇게 ‘그림으로 된 인식’, ‘이미지로 쓰는 텍스트’였다. 하지만 생성이미지는 다르다. 그것은 피사체를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실의 상태를 증언할 의무도 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고대의 영웅담을 텍스트로 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성이미지는 환상을 실재처럼 제시한다. 그것이 또한 구전문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자문학(‘소설’)이 사실을 지향한다면, 구전문학(‘이야기’)은 환상을 지향한다. 문자문학이 과장을 억제한다면, 구술문학은 허위를 외려 생명으로 안다. 베오울프가 자신이 8마리의 바다괴물을 죽였다고 말하자, 누군가 말한다. “지난번에는 세 마리라고 했는데.” 그렌델의 어미를 죽였다는 거짓말은 곧바로 현실이 된다. 하지만 사실을 뒤집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이자, 동시에 삶의 목표였다. 전사들은 사람들의 입술 위에서 전설이 되고 싶어했다. 자신에게 감히 결투를 청하는 포로에게 베오울프가 묻는다. “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뜻인가?” 그를 풀어주며 말한다. “그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들려줄 이야기를 갖게 됐다.” 영웅들은 이렇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살았다. 기독교가 도입되기 전에 인간들은 이런 방식으로 영생에 들어갔다.
여전한 아날로그의 아우라
실사를 방불케 하는 디지털영화. 저메키스는 거기서 ‘영화의 미래’를 본다. 이 시대에 셀룰로이드 필름을 고집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 “LP가 CD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아날로그영화의 종말론이 많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베오울프>의 그래픽 수준을 보건대 당분간은 안심해도 좋을 듯하다. 전작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했다 하나, 여전히 영화는 실사와 그래픽의 경계를 지우는 과제의 버거움에 빠져 있다.
영화는 여전히 아날로그 배우들의 아우라에 의존한다. 특히 안젤리나 졸리의 벗은 몸. 이 디지털영화의 매력은 정작 아날로그적 요소에서 나오고, CG는 외려 영화의 한계로 작용하는 듯하다. 가령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런 영웅의 얼굴도 윤곽은 여전히 가위로 오려낸 듯하다. 왕비의 얼굴은 너무 매끄러워 아예 플라스틱 표면처럼 보인다. 비중이 적은 나머지 인물들은 종종 언캐니 밸리로 빠져든다. 인물들에게서 중량감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지의 미학성을 고려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베오울프는 우람한 육체를 자랑하나, 거기서도 <300> 영웅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심란하게 황홀한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저메키스의 생각대로, 그래픽 기술이 진보하면 이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 꼭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래픽이 발전할수록 사실성에 대한 대중의 요구 수준도 더불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 간극은 어쩌면 기술적 차이가 아니라 원리적 차이인지도 모른다.
제3의 장르
<베오울프>는 ‘제3의 장르’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그의 실험이 기술의 시연을 넘어 (앞에서 시사한 것처럼) 매체에 고유한 미학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진이나 영화도 처음에는 그저 기술적 진귀함에 머물러 있었다. 그 기술로 새로운 표현의 영역을 여는 데에 성공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은 예술의 장르로 등록될 수 있었다. ‘퍼포먼스 EOG 캡처’라는 복잡한 이름의 기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감독이 되는 것은 예술과 기술의 완벽한 혼합을 의미한다.” 이 말이 물론 ‘예술을 기술로 완벽히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게다. 하지만 ‘영화의 미래’를 위한 저메키스의 실험이 늘 미학적 필연성의 뒷받침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종종 ‘특수효과에 집착하는 감독’이라는 비난을 듣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게다. 실사로 더 잘,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왜 굳이 CG로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