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게 또 있을까마는 이 경우는 좀 다르다. <싸움>에서 헤어진 부부 상민(설경구)과 진아(김태희)가 벌이는 싸움은 차라리 전쟁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혼한 지 3개월가량 된 이 부부는 이미 결혼할 때부터 문제를 갖고 있었다. 곤충학자인 상민은 타고난 결벽증을 갖고 있는 남자. 더 큰 문제는 몸을 웅크리고 현미경을 주시하는 습관이 내면에 뱄는지 속내마저 좀처럼 드러내는 일이 없다는 것. 활동적인 성격을 가진 유리 공예가 진아로서는 이런 상민과 함께하기가 어려웠을 법도 하다. 하여간 무언가에 이끌렸는지 결혼까지 했던 두 사람은 끝내 이혼한 뒤 ‘친구’로 지내기로 한다. 그러나 상민이 유럽에서 사온 괘종시계의 시계추를 진아로부터 돌려받으려 하면서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된다.
<싸움>은 한지승 감독이 7년 만에 만든 영화다. 그 시차 탓인지 <싸움>은 전작인 <하루>(2000)보다는 드라마 <연애시대>(2006)와 비슷한 궤적 속에 놓여 있다. 이혼한 부부가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리는 두 작품은 각자의 가슴 어딘가에 남아 있는 상대에 대한 여정(餘情) 또는 미련과 거기서 비롯된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연애시대>가 미련 때문에 발생하는 질투에 초점을 맞춘다면 <싸움>은 여정 속에 포함돼 있는 상대에 대한 증오에 관심을 둔다는 게 차이겠지만. 나중에 서로에 대한 살의(殺意)라도 품은 듯 험악해지는 상민과 진아의 싸움도 따지고 보면 서로에 대한 남은 감정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꼬이면서 발전한 셈이다. 상민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없었다면 진아가 홈쇼핑 출연을 망쳤을 리 없는 일이고, 진아에 대한 아련한 심정이 없었다면 상민이 사고가 발생한 공방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애정이라는 안전판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해도 <싸움>을 홍보 문구처럼 그저 ‘하드보일드 로맨틱코미디’로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순간, 둘의 싸움이 ‘민사’ 수준을 넘어 ‘형사’사건, 강력 범죄로 발전하는데 마음 편하게 웃으며 ‘싸움 구경’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중화해줄 수 있는 유머러스한 요소들도 이들의 살의(殺意)에 짓눌린데다 이야기와 엇물리는 탓에 큰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싸움>은 가볍게 받아들이기엔 남녀 관계의 무거운 진실이 짓누르고, 무겁게 받아들이기에는 날아갈 듯한 허허실실 코미디가 살랑거리는 부조화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