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3일 개봉하는 <나는 전설이다>는 세계 핵 전쟁이 야기한 변종바이러스로 전 인구가 흡혈귀가 된 세상에 오직 한 남자만 살아남았다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1954년 발표된 로버트 매드슨(Richard Matheson)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SF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명”으로 언급했고 <X파일>의 시리즈 창작자 겸 제작자인 크리스 카터가 자신의 드라마에 ‘로버트 매드슨 의원’이라는 이름을 넣어 오마주를 바친 작가, 로버트 매드슨과 원작 소설 그리고 영화화 에피소드에 대해 알아보자.
원작자 리처드 매드슨은 누구?
1926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 뒤 2차대전에 참전한 그는 돌아와서 언론학을 공부하고 1950년 첫 단편소설을 썼다. <남자와 여자의 탄생>이란 제목 아래 다락방에 갇혀 부모에게 육체적 학대를 받고 사는 소년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이 단편은 미국의 판타지·SF전문잡지에 실려 단번에 주목을 끌었다. 1953년 첫 장편 출간 뒤 <플레이보이> 등에 연재소설을 써오던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계기는 다름 아닌 <나는 전설이다>.
이후 매드슨은 지금까지 20편이 넘는 장편과 100편 이상의 단편을 썼다. 주로 공격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남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1950년~60년 초 그의 소설들에 관해 로저 에버트는 <로즈마리의 아기>(1967, 아이라 레빈)나 <엑소시스트>(1971, 윌리엄 블래티)와 같은 다음 세대 장르문학을 예견한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당일, 정체불명의 대형 트럭에 우연히 쫓기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 <듀얼>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유명한 초기 단편영화의 밑바탕이 돼주었다.
매드슨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호러·SF·판타지가 뒤섞인 그의 소설들 때문만은 아니다. 매드슨은 <듀얼>의 영화화 시나리오 각색뿐 아니라 TV시리즈 <환상특급>(1983)의 에피소드도 14개나 쓰면서 스필버그의 아이디어 조력자 역할을 제대로 했다. 또 <어셔 가의 몰락>(1960)을 비롯, 로저 코먼이 영화화한 에드거 앨런 포 소설들의 각색도 여러 편 맡았다.
<나는 전설이다> 원작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국내 번역 출간된 서적 기준으로 200페이지가 좀 넘는, 그리 길지 않은 장편이다. 매드슨은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자신이 집필하던 시기에서 약 20년 뒤로 잡았다. 1976년 1월, 흡혈귀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세상에서 모조리 사라졌다. 홀로 남은 로버트 네빌은 LA 한 귀퉁이에 거주지를 잡고 외롭게 흡혈귀들과 싸운다.
네빌은, 낮엔 창문을 고치고 발전기를 살피고 기름을 구하고 먹을 것을 구해오고, 밤이 되면 집 주위로 몰려든 흡혈귀 떼와 싸우고, 지하 연구실에서 바이러스의 치료법 연구에 매달린다. 아내와 딸마저 잃고 홀로 목숨만 부지해야 하는 네빌의 삶은 우습게도 매일 바쁘다. 그러나 입을 열 일은 없다. ‘멀쩡한’ 생물체인 개를 발견해 겨우 친해졌건만 일주일 만에 잃었다. 네빌은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됐다. 흡혈귀들과, 흡혈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들에 둘러싸여.
10년 묵은 영화화 프로젝트
도저히 짐작 불가능한 충격적 전개와 결말을 포함한 매드슨의 원작 소설을 워너가 처음 영화화하기로 결정한 것은 1994년. 3년 뒤에 리들리 스콧 연출과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모양새로 첫배가 띄워졌다. 톰 크루즈와 마이클 더글러스의 이름도 오고갔던 이 프로젝트는 당시 1억800만달러까지 치솟은 예산 때문에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스콧이 직접 시나리오를 매만져 2천만달러를 줄여놓았으나 여전히 스튜디오는 예산 때문에 손대기를 꺼려했고 이듬해 스콧은 프로젝트를 떠났다.
2002년, 슈워제네거는 제작자로 물러나면서 <나쁜 녀석들>(1995)의 콤비 마이클 베이와 윌 스미스 기용을 언급했다. 예산을 좀더 줄일 수 있는 시나리오가 나왔는데 워너의 대표 알란 혼이 그것을 맘에 들어하지 않아 프로젝트는 다시 멈추었다. 2004년 아키바 골즈먼(<의뢰인> <뷰티풀 마인드> <아이, 로봇>)이 합류했다. 이듬해엔 <콘스탄틴>의 감독 프랜시스 로렌스가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모양이 완성되었다.
또 다른 ‘전설’들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지금까지 세번 영화화되었다. 이탈리아 우발도 라고나 감독이 빈센트 프라이스의 주연으로 만든 <지상 최후의 사나이>(The Last Man On Earth), 찰턴 헤스턴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오메가맨>(The Omega Man, 1971), 그리고 올해 소리소문없이 만들어져 DVD로 직행한 <나는 오메가다>(I Am Omega)가 있다. 마지막 영화는 쉽게 말해 저예산 B급 리메이크 버전이다.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모든 인간이 죽어나간 지구에 유일한 생존자가 된 한 남자. 그가 지구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돌연변이 존재들과 싸우는 외로운 존재라는 점까지는 소설과 대충 같다. 그러나 결론은, 그만의 위트와 전투기술로 돌연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끝까지 잘 살아간다는 이야기.
참고로 아키바 골즈먼은 <오메가맨>(1971)을 적극 참고해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오후 3~4시가 되면 자연히 한산해지는 LA가 아니라 “지금껏 한번도 텅 비어본 적 없는 뉴욕”으로 공간을 옮긴 <나는 전설이다>는, 골즈먼 표현에 따르면 “저예산 호러물 <28일후…>와 비교할 수 없는” 블록버스터이며, 윌 스미스 표현에 따르면 “예술영화의 주인공이 그 속에 걸어들어간 듯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