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0회를 맞이한 유럽영화상이 이번 시상식을 통해 다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지난 12월1일, 어둡고 을씨년스런 베를린 동쪽 외진 트렙토우에서 올해로 스무 번째를 맞는 2007년 유럽영화상 시상식이 열렸다. 이번 행사에는 잔 모로, 에마뉘엘 베아르, 줄리 델피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지만 예년과 마찬가지로 행사 진행은 매끄럽지 못하고 어색했으며, 장 뤽 고다르가 유럽영화상 평생공로상을 거절한 것도 올해 영화제의 커다란 흠 중 하나다. 물론 고다르는 “내 자신이 뭐 그리 큰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비판하며 공로상을 거절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유럽영화상의 위상에 대해서 석연치 않은 기운을 남기고 있는 건 사실이다.
유럽영화상은 지난 1988년 유럽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의 오스카 시상식에 대적하기 위해 합심하여 만들었다. 유럽인들이 뭉쳐서 자기 색깔을 한번 내보겠다는 것이었다. 초대 의장은 올 여름 작고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이었고 현재 의장은 빔 벤더스가 맡고 있다.
원래 유럽영화의 발전과 진흥에 기여할 취지로 만들어진 상이지만 비판가들의 문제제기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가령 유럽영화아카데미가 세워진 뒤 80, 90년대에 제작된 유럽 각국 공동투자 영화들은 ‘유럽 공동의 지침’을 따르다보니 각국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채 특색없는 작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또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있는 영화를 발굴할 것을 공공연히 표방하는 유럽영화상이 은근히 애초의 노선을 벗어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게다가 유럽영화아카데미 회원 수가 많은 나라가 상을 타기에 유리하다는 의심도 계속 터져나온다.
그런데 올해 유럽영화상은 예상을 깨고 작품성과 지역적 개성에 손을 들어줬다. 최우수 영화상, 감독상이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는 루마니아 출신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 돌아간 것이다. 임신한 여대생이 공산독재 당시 엄격하게 금지된 불법낙태를 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인간이 그저 경제적 요인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했던 시절을 비판하고 있다. 최우수 시나리오상은 터키계 독일 감독 파티 아킨의 <천국의 가장자리>가 차지했다. 그도 이미 칸영화제와 독일영화상에서 최우수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한편 가장 상업적인 후보인 톰 티크베어 감독의 <향수>는 미술상과 카메라상 수상에 그쳤다. 그래도 유럽영화상의 한계점은 남아 있다. 새로운 작품을 발굴하지 못하고 이미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을 다시 인정하고 치하하는 차원에서 상을 준다는 인상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