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진중권의 이매진] 자유의지의 할리우드적 패배
2007-12-21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첨단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고전적인 철학 논쟁의 테마, <마이너리티 리포트>

2054년 워싱턴은 고대의 그리스로 돌아간다. 거기서 시민의 안전을 책임진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세명의 예지자. 이들은 도시국가의 존속을 위해 신탁을 내려주던 델피의 무녀들을 닮았다. 미래를 예언하던 원형의 신전은 범죄를 예견하는 원형의 수조로 돌아온다. 델피의 무녀들에게 신성한 힘을 준 것이 땅속에서 솟아나는 가스. 미래의 무녀들에게 신통력을 준 것은 ‘뉴로인’이라는 마약의 후유증이다. 과거는 미래로 회귀하고, 미래는 과거로 반복된다. 과학적 합리성은 신화적 비합리성과 공존한다.

미래현실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감독이 ‘미래현실’(future reality)이라 부른 요소에서 나온다. 실제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미래는 기술적 측면에서 대단히 개연적이다. 즉 2054년의 워싱턴은 터무니없는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아니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시연이 가능한 기술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범죄자와 피해자의 이름을 새긴 구슬을 깎는 장면. CAD로 디자인한 형태를 CNC(컴퓨터수치제어) 밀링으로 출력하는 것은 오늘날 산업과 예술의 일상에 속한다.

실시간으로 업로드되는 신문은 지금 기술로도 시연이 가능하다. 이미 종이처럼 말 수 있는 디스플레이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무차별 다중이 아니라 행인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며 유혹하는 광고 역시 인상적이다. 이 역시 지금의 기술로도 어느 정도 시연이 가능할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의 귀에만 소리가 들리게 하는 시스템은 이미 개발되어 있다. 가택수색에 사용되는 스파이더 역시 조그만 곤충을 닮은 첩보로봇의 형태로 이미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안구이식수술도 현실이 된 지 오래. 2054년쯤이면 그것은 이미 거리에서 돌팔이 의사들이 시술하는 싸구려 기술이 된다. 홍채인식 역시 여러 곳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원래 이 기술은 홍채의 움직임으로 신원을 파악하게 되나, 영화에서는 그것으로 움직임이 없는 죽은 사람의 안구나 신체에서 분리된 안구까지 인식한다. 기술에 대한 몰이해나 허구에 허용되는 부정확성에서 나온 설정이겠지만, 미래에는 그 역시도 가능해지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닥터 히네만은 정원에서 유전자 조작 식물을 가꾼다.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동물의 유전자가 섞인 ‘키메라’로 보인다. 우리는 이미 동물과 식물을 디자인해 쓰고 있다. 아예 유전자 조작을 예술 삼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식물 키메라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동물 키메라 역시 1985년 염소(goat)와 양(sheep)을 합쳐놓은 지프(geep)의 탄생으로 이미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식물과 동물의 종간교배(cross breeding)로 언젠가 식물이 움직일 날도 오지 않을까?

증강현실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역시 미래주의적인 ‘인터페이스’ 디자인. 거기에는 모니터도 없고, 키보드도 없고, 마우스도 없다. 유저는 센서가 달린 검은 글러브만으로 영상을 열고, 닫고, 확대하고, 축소하고, 편집한다. 데이터의 입력과 출력은 철저하게 직관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유저가 좌석에 앉으면 바로 앞의 빈 공간에 가상의 작업대가 나타난다. 작업을 마치면 이 가상의 이미지는 곧바로 사라져버린다. 이른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을 이용한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다.

‘홀로스피어’에 투사되는 예지자들의 비전. 앤더튼이 몸짓으로 편집해 허공에 띄우는 이미지. 홀로그램을 이용한 ‘디스플레이’는 하드웨어의 물질성을 증발시켜버린다. 앤더튼과 홀로그램으로 된 그의 아내가 한 공간에 서 있는 장면은 ‘원격현전’(telepresence)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현실이 되었다. 미국의 어느 IT기업은 올해 10월 인도의 벵갈루루에서 열린 신기술 발표회에서 사회자 바로 옆에 멀리 미국 본토에 있는 다른 임원들의 홀로그램을 띄워 객석의 관객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매력이 그저 기술적 발상의 새로움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앤더튼이 예지자들의 비전을 펼쳐 보여주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영화는 이때 그를 마치 오케스트라 앞에 선 지휘자처럼 묘사한다. 그가 팔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그의 지휘(?)에 맞춰 허공에는 영상의 심포니가 펼쳐진다. 이 탁월한 연출은 스크랴빈의 ‘빛의 음악’을 연상시킨다. 이 러시아 작곡가는 이미 100년 전에 음향에 맞춰 프로젝션으로 실내에 색채의 향연을 펼치려 했었다.

앤더튼이 감옥을 방문하는 장면 역시 강렬한 미학적 인상을 남긴다. 마침 간수는 오르간으로 바흐의 칸타타(<Wohl mir, dass ich Jesum habe>)를 연주하고 있다. 아가사의 데이터를 보여달라는 요구에, 간수는 ‘그럼 자리를 옮겨야 한다’며 그에게 체포된 죄수들이 수감된 캡슐을 보여준다. 원통형의 유리 캡슐은 대성당에 있는 오르간의 기다란 은색 파이프들을 닮았다. 수인을 감시하는 작업을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영상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 얼마나 강렬한 시각적 은유인가.

운명의 결정론

영화에는 두개의 갈등이 존재한다. 플롯을 이끌어가는 것은 물론 앤더튼 반장과 버지스 국장 사이의 대립이다. 하지만 정작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갈등은 앤더튼과 법무성 수사관 위트워 사이에 일어난다. 두 사람의 대립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사이의 해묵은 철학적 논쟁의 재연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예언이 살인을 예방하면 예언은 어긋난다. 반면 예언이 적중하면 예방은 실패한다. 위트워는 이를 ‘근본적 패러독스’라 부른다. 이 역설은 당연히 사법적 모순으로 이어진다.

“이 시스템에는 법적 오류가 있소. 법을 안 어긴 사람을 체포해서는 안 되죠.” 하지만 앤더튼과 그의 부하들은 예언의 결정론을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법을 어길 사람들이잖소. 예지자들의 예언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소.” 이 결정론적 사고가 살인을 아직 저지르지 못한 이들을 구금하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위트워가 보기에 이는 사법적 난센스다. 살인을 하다가 체포당한 그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단념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범죄예방시스템은 이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는 곧 앤더튼 자신의 운명이 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 하나, 그럴수록 살인자가 될 운명에 더 가까이 다가설 뿐이다. 마침내 리오 크라우를 쏘려는 순간, 아가사가 외친다. “당신은 미래를 알잖아요.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요.” 앤더튼은 총구를 내리고 행위의 자유를 선택한다. 하지만 순간 리오 크라우가 총을 빼앗으려 달려들고, 당황한 앤더튼은 그에게 총을 발사하게 된다. 이로써 예언은 적중하고, 자유의지마저 결국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드러난다.

이는 사실 문명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모티브다. 가령 오이디푸스를 생각해보라. 예언을 피해 국외로 나간 것이 외려 아버지를 살해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이 신화적 모티브의 복귀는 아마 영상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상은 문자문화의 선형적 의식을 파괴한다. 원인과 결과는 더이상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지 않는다. 운명의 인과론에서는 오히려 미래가 과거의 원인이 된다. 이것이 바로 책의 종언과 더불어 찾아온 ‘역사이후’(post-histoire)의 분위기일 것이다.

자유의지

동일자의 영겁회귀? 상황은 반복된다. “당신은 미래를 알잖아요. 그래서 선택할 수가 있어요.” 이번엔 앤더튼이 버지스 국장에게 권한다. 버지스가 앤더튼을 쏘지 않으면, 예언은 빗나간다. 그로써 범죄예방시스템도 실패하게 된다. 반면 버지스가 앤더튼을 쏘면, 예언은 적중하고 시스템의 올바름도 다시 증명된다. 하지만 국장 자신은 범죄자가 되어 시스템을 관리할 권력을 가질 수 없다. 이 “딜레마” 앞에서 버지스 국장은 자유를 선택한다. 총탄은 앤더튼이 아니라 국장의 배를 향해 발사된다.

주인공의 선택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 운명에 합류해버린다. 운명을 거역하는 것은 외려 적대자의 선택. 예언에서 풀려날 자유를 위해 버지스는 물론 목숨을 대가로 지불한다. 그의 죽음으로 예언이 무너지면서, 영화의 철학적 긴장이 다소 맥없이 풀려버린다. 첨단영상으로 연출한 미래주의적 배경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그리 인상적인 작품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실존적 고민이 아니었다. 오락영화의 진리는 역시 정의는 회복돼야 하고 흥행은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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