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다이앤 크루거] 과다복용해도 좋은 약
2007-12-20
글 : 박혜명
<내셔널 트레져: 비밀의 책> <메리 크리스마스>의 다이앤 크루거

2004년 겨울 다이앤 크루거가 <내셔널 트레져> 1편으로 제작자, 감독, 주연배우 니콜라스 케이지 등과 함께 한국을 찾았을 때 그와 인터뷰한 기자들은 내심 당황했다. 똑떨어지는 간결함과 무뚝뚝한 태도 때문이었다. 금발에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다이앤 크루거에겐 쇼 비즈니스에서 요구되는 상냥한 제스처가 거의 없었다. 그는 질문을 듣고 바로 대답했고, 본론만 대답했다. 인터뷰에 응하는 다이앤 크루거의 답변 어조와 내용은 기자로 하여금 그 질문이 과거 수십 차례 반복되었을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받아적고 나면 차후 정리해서 쳐낼 것이 별로 없었다.

사실 그해는 신인 다이앤 크루거에게 최고의 해였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의 주연작이 개봉했다. 5월에 <트로이>, 9월에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Wicker Park), 12월에 <내셔널 트레져>. 배우 데뷔 3년차, 당시 28살이었던 크루거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심사위원장으로 있는” 여성세계상이 수여하는 세계여배우상을 받았고, 독일의 오스카에 해당하는 밤비어워드에서 커리어상을 받았다. <내셔널 트레져>의 캐스팅 오디션 장소에서 니콜라스 케이지를 보고 잔뜩 얼어 “내내 시선을 피하면서 연기했다”는 그는 <피플>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과 <맥심> 선정 ‘100명의 섹시한 인물’ 50위로 이름을 올렸다. 오디션장에서 니콜라스 케이지가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했을 다이앤 크루거는 1년 새 할리우드 핫걸이 되었다.

크루거의 처음 꿈은 발레리나였다. 독일 태생인 그는 런던로열발레단에서 발레를 배우다 부상으로 18살 때 꿈을 포기했고, 독일로 돌아와 패션모델을 하면서 연기자로 전업하던 중 뤽 베송을 만나 프랑스로 건너갔다. 미국에 가보긴커녕 에이전트도 없던 시절, 프랑스에 9년째 살면서 3편의 영화를 찍은 게 전부였는데 뤽 베송은 파리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라 빠르망>의 할리우드 리메이크판)의 프로듀서들과 점심을 먹다 크루거를 추천했다. 이어 크루거는 <트로이>에 캐스팅됐고 이 영화의 촬영차 멕시코로 날아가 우울한 헬렌으로 6개월을 보내던 중 <내셔널 트레져>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트로이>를 찍을 때, 매일 약속한 시간에 딱 맞춰 현장으로 출근한 사람은 촬영기간 내내 페터슨 감독과 크루거뿐이었다고 한다(크루거의 말대로 이건 “독일인 특유의 엄격함”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2004년 3편의 주연작 개봉을 치르던 와중에 미국 웹진 <무비웹>이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독일 배우들 중엔 할리우드에 와서 스타가 된 경우가 별로 없다. 당신은 이제 고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겠다.” 크루거는 대답했다. “그렇더라고 우리 엄마가 얘기해주더라. 나는 잘 모르겠다. 나한텐 그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내가 독일에서 슈퍼스타가 되거나 말거나 별 관심이 없다. 할리우드에서도 마찬가지다. 난 이곳에서 미친 사람처럼 일에 매달리려고 애쓰지 않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냥 연기다.” 또 다른 기자는 그에게 “새로운 잇걸(It-Girl)이 된 소감”을 물었다. 크루거는 답했다. “그런 지위나 라벨을 얻는 건 사람들이 나를 원한다는 거니까 좋은 뜻이다. 하지만 여자들에겐 동시에 매우 위험한 게 될 수 있다. 그만큼 빨리 시들어버릴 가능성이 높은 거니까.”

3년 뒤 2007년 겨울, 일본 도쿄에서 다시 만난 다이앤 크루거는 시니컬함을 밑바탕에 깐 간결한 태도가 그대로였다. 어느 한국 기자가 “1편 출연 당시에 비해 인기나 명성이 더 높아진 것 같다”고 말하자 크루거는 특유의 의구심어린 미소를 짓고 답했다. “흠,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근데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정확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에 비해 좀더 흥미로운 영화들을 찍을 기회가 안정적으로 마련되었던 건 사실이다. <메리 크리스마스>나 <카핑 베토벤> 같은 영화들이 투자를 받는 데 어려움을 덜 겪었으니까.” <메리 크리스마스>는 1차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기적 같은 이틀의 휴전을 소재로 한 영화이고,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의 생애 후반부를 그의 밑에서 일하는 여자 악보필사가의 꿈과 겹쳐놓은 영화다. 명확하고 똑 부러진 성격의 늦깎이 여배우 다이앤 크루거는, 이 두편에서 공통적으로 지혜롭고 총명하며 용기있는 여인상을 연기했다.

이번 인터뷰 때 다이앤 크루거는 2004년 이후 자신의 주요 출연작 3편이 한국에서 모두 올해 개봉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좋아했다. 통역 과정에서 작은 오해가 빚어진 탓에, 이 말은 ‘3편이 모두 올 겨울 개봉한다’는 뜻으로 전달되긴 했다. “어머 정말? 근데 <메리 크리스마스>를 이제야 개봉한단 말인가? 와아. 어쨌든 좋은데? ‘다이앤 크루거 과다복용’이 되는 건 아닐는지? (웃음) 세편 모두 개성이 강하고 내 모습도 다양할 것이다. 한꺼번에 개봉하니까 하루에 세편을 다 봐도 될 것 같은데? (웃음) 어쨌든 나는 그 세편이 모두 자랑스럽다.”

다부진 턱선과 야무진 입매를 움직여서 웃는 그를 보며 3년 전의 ‘크루거 과다복용’을 떠올렸다. 여성스러운 자태를 드러낸 영화들로 스타덤을 얻은 크루거는 결국 할리우드 언저리를 아쉽게 맴돌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존중하며 일해온 셈이다. <내셔널 트레져>의 속편을 찍은 것도 “지적이고 영리하면서 매력적인, 고퀄리티의 여성 캐릭터 때문”이었다고 그는 답한다. 다소 방어적인 무뚝뚝함만 아니면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졌을 거란 아쉬움과 함께, 다시 3년 뒤 그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살짝 일었다.

사진제공 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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