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스필버그의 분신술
2007-12-27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2007년 할리우드의 화제작 <트랜스포머>와 <베오울프>에 드리워져있는 스필버그의 그림자
<트랜스포머>

(올해의 마지막 기고임을 핑계삼아 몇 가지 묵은 단상들을 적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되돌아보니 도처에 스필버그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올해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각각 다른 의미에서 가장 충격적인 네편의 영화에 모두 스필버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1월에 도착한 위대한 전쟁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프로듀서 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올 여름을 혼란에 빠트린, 그러나 이상한 활력으로 넘쳐나는 <트랜스포머>의 제작자(executive producer)도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겨울의 문턱에 찾아온 첨단 CGI의 괴기스런 파노라마 <베오울프>의 로버트 저메키스는 스필버그 학교의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A.I.> 이후에 스필버그를 장사꾼으로 폄하하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해졌다. 그가 평생 흠모한 친구 마틴 스코시즈가 비틀거리며 자신의 걸작들을 낳았던 야수적 에너지를 잃어가고 있을 때, 스필버그는 무언가를 깨닫기라도 한 듯 말수를 줄이며 빛나는 영화적 순간들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우주전쟁>과 <뮌헨>을 만났을 때, 우리는 세계시민으로서의 그의 깊은 근심을 보았고 그것을 더 보고 싶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사색적인 전쟁영화에 프로듀서로 참여한 건 자연스럽고 찬탄할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전통적인 미학자를 화나게 할 만한, 영리한 장삿속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로봇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마이클 베이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스필버그 자신은 돈방석이 될 <인디아나 존스> 4편의 연출에 돌입했다.

<베오울프>는 스필버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영화다. 또한 자신의 뛰어난 문하생이 만든 영화라 해도 <베오울프>의 컴퓨터그래픽의 마술을 스필버그가 전적으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 그는 <인디아나 존스: 수정해골의 왕국>을 디지털로 찍기를 거부하며, “나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움직임을 필름에 담을 할리우드의 마지막 감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베오울프>는 스필버그가 깊이 몰두했으며 그것에서 자신의 성공을 이끌어냈던 첨단 영상테크놀로지에 대한 매혹으로 가득한 영화다.

스필버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를 장사꾼의 손과 세계시민의 마음과 예술가의 영혼을 겸비했으며 더구나 그들을 선택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편한 일이지만,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진 않을 것이다. 그가 직간접으로 관여된 네편의 영화를 스필버그적인 것과 연관시키는 것은 억지가 될 것이다. 다만 그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우고 이 영화들을 보기는 어렵다. 미학적인 면에 한정짓지 않는다면, 스필버그는 21세기의 영화세상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모험가이기 때문이다.

<트랜스포머>가 재배열하고 재탄생시키는 것들

<트랜스포머>의 연출을 제의받은 마이클 베이는 처음에 “그 따위 유치한 아이들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하다가 결국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설득당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서사는 말할 수 없이 유치한 게 맞다. 예컨대 좋은 외계 로봇 오토봇 일당은 싸움에 승리하고도 자신의 별로 돌아가지 않으며, 지구인들은 나쁜 외계 로봇 디셉티콘 일당을 완전 폐기하는 게 아니라 바다 깊은 곳에 묻는다. 물론 이 엉성한 결말은 속편을 겨냥한 것이다. 이 영화에 관한 내가 아는 가장 멋진 논평은 이번호에 실린 연말결산 좌담에서 김소영이 한 것으로 “산업노동자의 우직한 몸과 첨단 기계장치의 기능을 결합”했다는 것이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말을 듣고 정리를 하고 싶어졌다. <트래스포머>는 텍스트 안팎에서 무언가 맹렬한 화해가 일어나고 있다. 트랜스포머는 카세트-자동차-무기로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로봇이다. 텍스트 밖에서 트랜스포머는 인기 완구인데, 그 완구를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도 로봇은 명백히 완구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한 남자의 성장과정에서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사물들이 트랜스포머라는 한 대상에 집약적으로 인격화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의 서사는 변신을 정당화하는 구실에 가까우며, 그때 변신의 동학이 거의 이 영화의 주제가 된다. 변신과정의 스펙터클은 단순히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친숙하고 귀중한 대상을 만나기 위한 섬광 같은 여정이 된다.

이 시각적 체험에서 중요한 점은, 트랜스포머의 신체가 분절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분절된 신체가 <터미네이터2>의 T-1000처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분절된 마디들이 각각의 속성을 부분적으로 보존한 채 재배열되며 변신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매우 명랑하고 생기 넘치는 움직임으로 이뤄진다. 이 분절의 재배열/재탄생의 동학이 주는 쾌감은 라캉이 말한, 거울단계에서 체험한 뒤 평생 무의식에 머무는 ‘조각난 신체’의 공포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조각난 기억, 낯선 자아(들)의 재통합에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트랜스포머>의 또 다른 뛰어난 시각적 장점은, 변신 로봇들의 각각의 캐릭터와 연관된 동작에 있다. 샘의 부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오토봇들이 창문 밖에서 시선을 피하는 굼뜬 동작에는 김소영이 말한 산업노동자의 우직함과 근면성이 담겨 있다. 이들은 버튼 하나로 사라지게 하거나 소환할 수 있는 디지털의 신호가 아닌 육중한 신체의 소유자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능력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구분을 넘어선 첨단의 것이며, 그것의 구현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산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때 육체와 기계,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트랜스포머라는 하나의 신체 안에 통합되어 친숙한 것으로 다가온다.

<트랜스포머>에는 이처럼 한 개인의 조각난 신체/기억의 계열과 현대 세계의 조각난 사물/기술의 계열이 극적인 화해를 이룬다. 이것이 <트랜스포머>의 마술이며 환상이다. 그 마술 안에서 서사는 기계의 동작으로 대체되었다. 젊은 시절의 낙천성을 회의하며 자신의 영화세계를 비약시켰지만 끝내 <미지와의 조우>를 지우지 못한 스필버그의 체취가 이 영화 어디엔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고 나는 느낀다. 자신의 영화에서 더이상 드러낼 수 없는, 서사의 질을 포기한 대가로 지탱한 그 순진성과 명랑함이라는 체취.

<베오울프>

테크놀로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베오울프>

<베오울프>는 컴퓨터그래픽이 특정 배우들을 거의 완벽하게 대체한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의 목적이 대체의 완성을 향해 있는 건 아니다. 문제는 재현 대상과의 유사성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 차이에 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맙소사, 거의 똑같군! 99%야!”라고 감탄할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채워지지 않은 1%가 결여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작지만 확연한 차이가 쾌락의 발원지이며, 그 차이가 인지되는 동안 이 영화의 쾌락이 유지된다. 그 쾌락은 CG가 재현하는 대상인 육체적 주체/배우를 관객이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성립한다. ‘정말 똑같다’는 감탄사는 ‘그러나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음악에서의 보코더 효과(스티비 원더가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에서 혹은 셰어가 <Believe>의 후렴구에서 사용했던, 음성의 사이버틱한 변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소리가 기계의 소리처럼 변조될 때, 그 유사성의 정도가 커질수록 차이의 인지가 주는 쾌감도 커진다. 실사가 애니메이션의 톤으로 변형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씬 시티>나 인간을 로봇의 질감으로 변형한 <바이센테니얼맨>, 혹은 수많은 사이보그영화들이 보코더 효과의 영화적 번안이라면, <베오울프>는 그것을 역방향으로 시도한다. 원칙은 같다. 최대한 비슷해질 것, 그러나 다름을 인지시킬 것.

<베오울프>의 테크놀로지는 영화라는 매체가 사진과 함께 태생부터 지녀왔던 그래서 그 매체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고 믿어져왔던 재현 대상과의 존재론적 결속을 패러디한다. 그 패러디는 전복적이라기보다 유희적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권능을 극대화하면서도 그것이 실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의 차이를 의식적으로 노출하고 유희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실재에 의해 길들여지는 한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베오울프>의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된 존 말코비치의 표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존 말코비치보다 훨씬 열등한데, 그것은 컴퓨터그래픽의 한계를 자의식으로 노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반된 면도 있다. 저메키스가 시도한 이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매혹적이고 저돌적이어서, 1%의 차이가 무언가 불안정해 보이는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자기 진화의 관성을 지닌다. 예컨대 존 말코비치의 표정을 서너배 정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면?(솔직히 안젤리나 졸리는 연기라는 면에서 실사 때와 큰 차이를 모르겠다. 많은 배우들이 그러할 것이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이 정도 기술로도 완전히 대체될 만한 연기자일 것이다) 유사성이 위험할 만큼 동일성에 접근해간다.

물론 관객의 대부분은 1%의 차이가 사라져도 영화를 즐기는 데 지장을 받을 것 같지 않다. 그 1%가 사라진다 해도 텍스트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완전해진다. 우리는 그래픽 이미지와 실제 배우와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떠올리는 인지의 간섭없이 그 이야기 안으로 침잠할 것이다. 아마 존 말코비치와 안젤리나 졸리를 모르는 아이들은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옛날이야기를 더 잘 즐기기 위해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이때의 질문은 한 가지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앙드레 바쟁의 낡았지만 여전히 유효한 고전적 신념에 던져질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포착할 수 있다고 그가 생각한 ‘현실의 완전한 심미화의 순간’을 포기하고도 영화가 예술로서 성립할 수 있는가. 저메키스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같은 기술 탐닉적인 영화를 만들 때에도 고전적 서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에 대한 그의 끝없는 매혹이 영화를 위험한 지역으로 이끌고 있다. 스필버그의 아이들은 스필버그의 욕망을 함께 짊어지고 영화의 운명이 걸린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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