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맹스터님(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거꾸로 가는 시계님(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김혜리 “<아메리칸 갱스터>는 마치 미국 자본주의 역사의 환유 같아요”
이동진 “마약범죄, 인종차별, 계급 문제 등 여러 개의 가치기준이 겹쳐 있어요”
거꾸로 가는 시계님의 말(이하 거꾸로): <아메리칸 갱스터>는 제목이 배포 한번 크죠? 한국으로 치면 <조직폭력> 같은 제목인 셈이잖아요? -.- 영화 장르로 해석해도 <미국 갱영화>니 이건 뭐…. ^^
코리안 맹스터님의 말(이하 맹스터): 마틴 스코시즈의 <갱스 오브 뉴욕>을 능가하는 야심찬 제목이죠. ^^ 제목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어요.
거꾸로: ‘이보다 더 거창한 제목은 없겠지?’ 내심 자신했던 스코시즈 감독이 ‘아차, 이게 있었군’ 하고 약올랐겠어요.
맹스터: <더 갱스터>라는 제목이 아직 남아 있습죠. ^.~ 내후년쯤 브라이언 드 팔마가 그런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지도…. ^^
거꾸로: 그런데 선배의 오늘 대화명은 <아메리칸 갱스터>와 어떤 관련이?
맹스터: 뭐 연말에 워낙 맹한 짓을 많이 해서 한탄성으로 지었습니다. T-T
거꾸로: 리들리 스콧은 잊을 만하면 한방을 날리는 감독인 것 같아요. <어느 멋진 순간> 이후에 또 이런 묵직한 영화를 내놓았으니 말이에요. 90년대가 최악이었죠. <화이트 스콜> <지 아이 제인>이 줄줄이 나왔으니까요. 그러다 <글래디에이터> <블랙 호크 다운>으로 본때를 보였죠.
맹스터: 2000년대 들어서는 괜찮은 작품들이 좀 있었죠. <매치스틱 맨>도 좋았어요. <아메리칸 갱스터>를 보고 확실히 이 사람은 장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꾸로: 리들리 스콧 영화의 기복과 다양성은, 이분이 좀처럼 각본을 직접 쓰지 않는다는 점에도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맹스터: 맞아요. ^^ 사실 뉴욕을 무대로 하는 갱영화 하면 자동적으로 스코시즈가 연상되지만 적어도 <아메리칸 갱스터>는 <카지노> 이후에 나온 스코시즈의 어떤 갱스터 장르영화보다 낫다는 느낌이었어요. 근데 리들리 스콧 나이가 벌써 일흔이더군요. 따져보니, 2000년 이후 매년 한편씩 영화를 내놓았더라고요. *.*
거꾸로: 앞으로도 2년 내 개봉 일정으로 두 작품이 진행 중이랍니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제목이 가리키는 주인공은 덴젤 워싱턴이 연기하는 할렘의 마약 공급조직 보스 프랭크 루카스지만, 형식적으로는 루카스를 쫓는 청렴하고 고집 센 형사 리치 로버츠의 이야기와 루카스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조입니다.
맹스터: 이 영화를 거론할 때 많은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대부>나 <스카페이스>를 언급하는데 사실 두 영화와는 화법이나 지향점에서 차이가 많은 편이죠. 갱스터 한 사람의 드라마틱한 성공과 전락을 다루기보다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엮어가면서 특정한 시공간의 벽화를 그리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영화니까요.
거꾸로: 구태여 줄을 긋자면 프랭크 루카스의 가정생활과 범죄세계를 대비시키는 점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풍이고, 적으로 맞선 두 남자가 인간적으로 공감한다는 묘사는 마이클 만 스타일, 시대상과 범죄의 메커니즘을 현란하게 구경시키는 점은 스코시즈의 갱영화를 연상시키죠.
맹스터: 갱스터 장르의 수작들은 인물을 신화적으로 다루곤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런 일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프랭크와 리치라는 두 인물을 통해 그려낼 수 있는 60년대 말~70년대 초반 미국사회의 난맥상과 부패의 고리를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하죠. 그래서 제목도 <아메리칸 갱스터>라고 붙이고 있는 거고요.
거꾸로: 벽화라고 하셨지만, 이 영화는 마치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환유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해요.
맹스터: <아메리칸 갱스터>가 무엇보다 다른 갱스터영화와 다른 점은, 흡사 기업가 영화 같다는 점이죠. 단지 다루는 제품이 마약일 뿐, 프랭크는 성실하고 금욕적인, 거의 청교도적인 기업가처럼 보이잖아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고, 집에서는 효자이자 믿음직한 형이고, 기업가로도 브랜드의 가치를 제대로 통제할 줄 알고, 심지어 질 좋은 제품을 싸게 소비자에게 공급하잖아요. 그 제품이 하필 마약이라서 그렇지만…. ^^
거꾸로: 그런 점에서 프랭크는 그의 ‘대부’나 마찬가지인 할렘 조직의 우두머리 범피 존슨으로부터 더 자본주의적으로 진화한 인물이에요. 영화 초반 한 장면이 재미있었어요. 뉴욕 8번가를 노쇠한 범피 존슨과 프랭크가 걷는 도중 범피가 한탄해요. “대형화된 상점이 길모퉁이 가게를 대신하고 맥도널드가 작은 음식점을 몰아냈다. 중간 거래자와 전문적 소상의 자부심은 죽었다” 며 미국의 문제를 개탄하죠. 그런 다음 거대한 할인점에 들어가서 말하기를 “주인이 있어야 뜯어내든가 말든가 하지. (한숨) 여긴 종업원뿐 책임있는 자가 아무도 없어.” -_-# 우습기도 한 대사였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재편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했어요.
맹스터: 저도 그 장면이 흥미로웠어요. 범피 존슨이 갑자기 죽음을 맞는 곳도 바로 그 대형 가전제품 매장이잖아요.
거꾸로: 영화는 프랭크가 순도 높은 마약을 저가로 공급한 다음에 발생하는 경제적인 갈등도 자세히 보여주죠. 자연스런 시장 질서를 깨고 독점을 한다고 경쟁 마피아들이 반발하잖아요. 그러다가 이탈리아 마피아가 유통을 자기네에게 넘기면 구멍가게 장사를 K마트급으로 늘려주겠다고 제안하고요. -_-
맹스터: 기업가로서 프랭크의 지점은 범피 존슨의 자본주의적 단계 바로 그 다음에서 시작한다는 거죠. 프랭크의 방식은 범피 존슨이 개탄한 대형 가전매장의 방식이에요. 동남아에 가서 마약을 구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거니까요.
거꾸로: “여긴 미국이야. 남을 희생시켜 돈을 벌면 안 돼”라고 하는데, 말인즉슨 거리에서 마약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은 희생자로 안 치는 거죠. -..- 시장의 원리를 넘어서는 도덕률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 거죠.
맹스터: 프랭크와 리치의 캐릭터와 관련해 재미있는 점은, 한 인물은 다 좋은데 딱 하나 마약을 거래한다는 것이고 다른 인물은 다 나쁜데 딱 하나 직업적 청렴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이죠. ^_^ 두 인물의 대결이 빚어내는 다양한 차원의 물음들이 상당히 흥미로웠어요.
거꾸로: <넘버.3>마냥 조직폭력배가 더 세련되고 검거하려는 쪽이 더 깡패 같죠. 집에서도 프랭크는 모범적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리치는 이혼남에 바람둥이죠.
맹스터: <아메리칸 갱스터>는 장르영화로서 극을 맺는 방식도 기존 갱스터와 많이 달라요. 굳이 말하자면, 밀고와 파멸로 끝을 맺는데 <좋은 친구들>처럼 밀고했다고 해서 실존적인 고립감을 강조하지도 않고, 파멸로 끝나지만 그 파멸이 <스카페이스>처럼 극적이지 않죠. 장르 특유의 비극적 스펙터클에는 관심없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심지어 투옥 직전 덴젤 워싱턴의 마지막 숏은 클로즈업되어서 웃는 얼굴이었죠.
거꾸로: 법적으로는 파멸이라기보다 ‘구제’를 받은 것에 가깝죠. 그런데 그런 결말은 테스트 시사 결과로 추가됐다고 하네요. 관객이 좀더 긍정적인 여운의 결말을 원해서 붙였다고 하더군요. 원래는 끝나는 지점이 달랐나봐요. 하지만 이런 정보가 없더라도 <좋은 친구들>이나 <대부>와는 분명 여운이 다르죠. 그런 고전들은 갱스터들의 행동이 우리가 동일시하는 판타지와 욕구를 실현한 다음 그들이 벌받을 때 우리가 죄의식을 느끼는데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그런 회의나 자기비판은 없죠.
맹스터: 맞아요. 카메라가 인물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난 느낌을 주죠. 온도도 좀 낮은 편이고, 상대적으로 지적인 면모가 강조되는 작품이죠. <갱스 오브 뉴욕>과 같은 각본가가 시나리오를 썼던데, 이쪽이 훨씬 나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해요.
거꾸로: 범피 존슨의 장례식에 효과적인 장면이 있어요. 절반 이상이 죽은 갱의 채무자인 조문객 중 한 무례한 남자가 위스키 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아 물자국을 내자, 프랭크가 잔받침을 들고 와 깔아주죠. 단호하고 판단이 빠르고, 매사를 제대로 처리하는 것에 몰두하는 남자임을 단적으로 묘사했어요. 결국 프랭크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그 칠칠치 못한 조문객은 길거리에서 처단됐죠. 물 좀 흘렸다고 너무해. -_-# (농담입니다.)
맹스터: 보란듯이 백주대낮에 처형하죠.
거꾸로: 또 한 장면! 신중한 프랭크의 철칙은 성공에 취하더라도 결코 나대지 말라는 것인데요. 사랑하는 아내가 화려한 모피코트를 선물하자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무하마드 알리의 게임에 입고 갔다가 거기서 아니나 다를까 경찰 눈에 띄어 수사선상에 오르게 됩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프랭크는 다짜고짜 아내 눈앞에서 털코트를 벽난로에 넣어 태워버리는데… 그 행동이 “나 이런 사람이다. 내 원칙을 잃으면 당신이고 뭐고 끝장이다”라는 대사를 줄줄 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더군요.
맹스터: 부패한 악질 형사가 죽는 장면도 그랬죠. 마당에서 죽는데 그걸 실내의 유리창 너머로 잡잖아요? 때마침 청소하는 사람의 진공청소기 소리 때문에 권총 격발 소리 자체가 무시되는 식으로 처리되지요. 트루포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그렇게 냉혹하게 시청각적으로 요약하는 게 흥미로웠어요.
거꾸로: 관객이 주인공과 추적자 중 누구 편을 들지 혼동을 주는 복합적 이야기이다보니 감정을 쏟아버릴 악역이 필요하긴 했을 거예요. ^_^
맹스터: 그런 악역은 대개 이 영화에서처럼 콧수염을 하고 있죠. ^^
거꾸로: 하하. 저는 마약을 직거래로 밀수하는 데 쓰이는 장소가 베트남 전사군인과 관련됐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 일화를 처음 접하기도 했지만, 마치 일부러 짜맞춘 것처럼 문학적이잖아요? 베트남전장의 죽음이 미국 본토로 ‘죽음’을 운반하는 셈이니까요. *.*
맹스터: 애국적 상징보다 중요한 것은 철저한 직업윤리라는 걸 말하는 장면이기도 했고요. ‘장인’의 영화다운 코멘트라고 할까. ^^
거꾸로: 앗, 좋은 지적! 웃을 일이 아닌데 웃음 나는 대목도 있었죠. 부패가 만연하다보니, 경찰이 욕을 먹는 이유가 비리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증거물로 압수한 마약을 희석해 갱에게 되팔기 때문이잖아요. 즉 상도덕이 없다고 욕을 먹죠. T-T 국민의 기대가 낮아서 위정자들은 좋았겠어요.
맹스터:그럴 때 삶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고요. 워낙 기대가 낮으니 마약 순도만 조금 높아져도 행복해진다는…. -.-
거꾸로: 순도가 높고 싸다는 건 구매할 때만 행복한 거지 장기적으로 보면 몸을 더 망가뜨린다는 뜻 아닐까요..잘 모르지만서도.
맹스터: 그야 물론이죠.
거꾸로: 어머 잘 아시네요.
맹스터: 헉. 뭐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해야만 아나요? -.- 전 덴젤 워싱턴을 참 좋아하는데, 이 배우의 존재감과 지적 풍모가 캐릭터에 잘 어울렸다는 생각을 했어요.
거꾸로: 갱이지만 달리 보면 프랭크가 성실하고 허영기없는 사업가로 그려진 덕분에, 덴젤 워싱턴은 <트레이닝 데이>에서 분한 부패경찰 알론소가 가졌던 하이에나의 풍모 같은 건 없는 건전한 인물로 보였어요. 오히려 <말콤 X>쪽에 가까운 체취를 내죠.
맹스터: 그렇지만 캐릭터에 더 잘 어울린 쪽은 러셀 크로인 것 같아요. 거의 타입 캐스팅이죠.
거꾸로: 타입 캐스팅이라기보다 단골 캐스팅? ^.~ 리들리 스콧 다음 영화에도 나온답니다. 거의 장진 감독-정재영 배우에 버금가는….
맹스터: 몸으로 상황을 돌파한 뒤 나중에 생각하는 다혈질 인물 역엔 딱 러셀 크로죠.
거꾸로: 늘 느끼지만 어깻죽지 부위가 참 두터운 배우예요. ^0^
맹스터: 이번에 보니 배도 참 두텁더군요. 뭐, 이 기사 영문 서비스는 하지 않으니. ^^
거꾸로: 그런데 리치가 가장으로서 겪는 실패의 일화는 다른 영화에서 흔히 보던 장면과 다르지 않아 밀도가 처졌어요. 그렇게 바람둥이인 사람이 법대 수업에서 발표공포증을 앓는다는 것도 다소 안 어울리는 것 같고요. 다른 가치에는 둔감한 반면 정의에 왜 깊이 집착하는지도 좀더 설명했으면 싶었습니다.
맹스터: 프랭크쪽은 실존 인물인 반면 리치는 만든 인물이라서 그런 면도 있을 거예요. 두 인물을 두개의 축으로 내세우는 방식이지만, 그 두 사람이 제대로 만나는 것은 거의 영화가 끝나서라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거꾸로:그러게요. 갱스터계의 <접속> 아닙니까. -_-
맹스터: 그래도 <접속>보다는 말을 많이 섞더라는.
거꾸로: 어떤 시퀀스에서는 의좋은 동료 같더군요.
맹스터: 바로 그런 느낌이죠. 그래서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긴박감 같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죠.이 영화가 칼끝을 겨누고 있는 곳도 그 두 사람이 함께 겨누는 쪽에 있죠.
거꾸로: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관객에게 사고를 요구하는 여러 개의 가치 기준이 겹쳐서 꼬여 있어요. 일단 마약범죄에 대한 판단이 있겠고, 그 위에 “백인 마피아가 100년간 못한 걸 검둥이가 해?” 하는 대사가 보여주는 인종차별 문제, 계급문제 그리고 영화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인간의 품위는 어디서 나오나?”라는 문제도 있죠. 러닝타임이 길 법도 하죠.
맹스터: 길어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솜씨 좋고 언변 좋은 대중영화란 생각을 했어요.
거꾸로: 그런데 이런 의문은 들더라고요. 왜 프랭크 같은 영웅이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프랭크는 시장 원칙을 벗어난 도덕률은 개의치 않죠. 어쨌거나 그의 범죄 때문에 할렘의 가난한 흑인이 마약에 고통받고 죽어갔는데, 왜 이 사람에게 끌리는 걸까요? 더 높은 차원의 도덕은 고사하고 시장 안에서의 규칙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게 현실이라서 그런 건지….
맹스터: 범죄보다 나쁜 게 부패라는 인식이 이 영화에 있죠.
거꾸로: 일관성과 책임을 더 강조하고 있어요. 지난번의 <조디악>이나 <마이클 클레이튼>도 그랬지만 암튼 부시 대통령 두 번째 임기 동안 미국 대중영화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국사회를 부지런히 해부하고 있어요. 사실 베트남전-이라크전의 유비관계를 보지 않긴 좀 힘들잖아요.
맹스터: 반면 <300>처럼 과거를 빌려 뻔뻔하게 무의식을 드러내는 영화도 나온다는 거. -.-
거꾸로: 그렇죠. 영화적으로는 오히려 창의력을 북돋는 효과가 있는 건가요?-..-
맹스터: 기본적으로 예술은 안티테제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