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약삭빠른 트렌디 영화의 우둔함
2008-01-03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새로운 척하나 새롭지 않은 진부한 유행상품, <용의주도 미스신>

트렌디 영화들은 변덕스러운 순간순간에 대처하는 유연성을 통해 현실에 약게 대응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기민하지 못한 영화들은 영화제로 가거나 아트영화전용관에서 그들의 더딘 언어를 이해해주는 관용 깊은 관객을 만나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아마도 기민한 상업영화들에 대한 평단의 일률적 무관심 혹은 냉대는 어쩌면 둔감 혹은 오만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약삭빠른’ 영화들이 보이는 우둔함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기민한 척 호들갑을 떨면서 소비사회의 트렌드를 견인하고 있다는 오인에 빠져 있는 손쉬운 영화들의 등장이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무관심으로 전이되고, 이것이 영화시장 위축으로 이어지면서 더 손쉬운 영화를 양산케 하는 나쁜 순환의 조짐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재능이 부족하고 산만한 자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손쉬운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방식이란 바로 성공적 상업영화의 패턴을 개성없이 따라하는 것이다. 시류성 강한 사랑이나 유행의 경박하고 무상한 변화에 대해 사유하고 표상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그 방식은 소피아 코폴라의 논쟁적인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처럼 파스텔 빛의 쿠키와 샤이닝민트 빛 드레스 그리고 시대착오적 연보라 컨버스 운동화의 비균질적 배치가 주는 불일치의 불쾌감 같은 방식으로 표상될 수도 있다. 반면 익숙하고 다소 촌스러운 시각적 배치를 통해 관습화된 코드를 재현하고 복제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지루하지 않은 (따라서 논쟁적이지도 않은) 주제화 방식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용의주도 미스신>은 후자의 권태로운 반복이다.

현대 여성의 변호사를 자처하지만…

전 사회가 문화적 클리셰들에 도취되어버린 듯한 현재 한국의 문화 지형 안에서 어느 것이 더 손쉬운 방식일지는 분명하다. 베스트셀러들이 예찬하는 유행어들을 시각화하면서 그를 재현할 캐릭터를 살릴 것. 이는 <미녀는 괴로워>에서 이미 성공한 전례가 있다. 성공적이 되고자 하는 21세기의 트렌디 여성영화들은 여성 관객의 자존심을 짓밟지 않는 노련한 전략을 택한다. 싸가지없고 이기적이어도 돌변하여 착한 여자가 될 여지는 있어야 한다. 혹은 예뻐도 치명적 결함이 있으며 그것을 고백하고 관객 (특히 여성 관객)에게 승인받아야 한다.

<용의주도 미스신>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한예슬은 배우라기보다 일종의 캐릭터다. ‘한예슬표 영화’라는 수사는, 눈 씻고 봐도 그녀 말고는 다른 볼거리가 없다는 말을 애써 에두르는 것이다. 앙큼함, 싸가지없는 언변, 그럼에도 모진 마음을 탁 놓아버리게 되는 미워할 수 없는 비음 섞인 예쁜 짓. 이 모두는 배우 한예슬이 겹겹이 양파껍질처럼 숨겨놓았다가 숨겨진 무기인 양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모자이크된 표면이다. 깊이가 없다. 그녀가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고 웃기는데, 눈물이 마르면 곧 다시 싸가지없는 말이 예쁜 얼굴에서 줄줄 흘러나올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고, 눈물은 글리세린처럼 그녀의 얼굴에 인위적으로 얹혀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드라마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에서 더 나아가지도 않았다.

영화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모티브를 차용하면서도, 내레이션상으로는 그런 동화 따위는 우습게 여기는 듯 읊어댄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재현하는 것은 신데렐라 동화의 전복이 아니라 신데렐라의 현대적 버전이다. 가만히 앉아서 왕자가 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팔 걷어붙이고 왕자를 찾아나서는 요령 좋은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제목 <용의주도 미스신>에서 중요한 것은 ‘미스’다. 영화는 여주인공 신미수가 ‘미스’임을 십분 활용한다. 중요한 것은 그녀를 ‘미스 신’이라고 호명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호명은 남성이 다수인 사회집단에서 일컬어진다. 인간 신미수도 아니고 신 팀장이나 신 대리가 아닌 ‘미스 신’이라는 호명에 내재된 정체성은 분명 자신이 부여한 것일 수 없다.

영화는 화려한 여자 뒤에는 반드시 능력있는 남자가 있음을 긍정하면서 시작한다. 그녀는 키워서 먹는 맛이 어떤지 두고 보자고 고시생 남자친구를 생각하며 독백한다. 연하의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을 몸 좋은 강아지 하나 키운다고 비유한다. 남자 등장인물들은 상품처럼 간단한 레테르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게 형상화되었다. 변태 재벌 2세, 몸짱 연하 래퍼(표정이 하나인 손호영의 연기는 눈물날 정도로 안쓰럽다), 예비검사인 고시생, 깐깐한 이웃이자 사업파트너. 미수에게 연애란 이러한 남자들을 골라먹는 쇼핑이다. 그녀는 쇼윈도에 놓인 물건들을 유유히 감상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들이 자신이 원하는 특등품이 되도록 안간힘을 쓴다.

미수가 집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화장을 지우며 거울 앞에 있는 모습이다. 그녀는 거울이라는 환상장치로 자신의 미래를 시뮬레이셔닝한다. 환상은 그녀가 남자의 성공을 발판으로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그녀의 욕망을 반영한다. 한편 이 장면은 늘 그녀가 자신의 위에 덧씌우는 것이 성공적이고 아름다운 결혼적령기의 좋은 상품의 포장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 남자에 맞게 가면은 바뀐다. 그녀는 결국 연애술이 아니라 포장술의 전문가다. 그렇게도 용의주도하다 자부하던 미스신이 공들인 남자들과의 사랑에 성공하지 못하자 술 취해 말한다. “너 같은 새끼 때문에 여자들이 내숭떠는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 된 거 너 같은 새끼 때문이야.” 영화는 애써 올바른 윤리의 편에 서 있다고 강변한다. 따라서 영화? ?윤리가 모호하다고 비난하는 관객에 대해 영화는 그 탓을 추상적인 남성사회에 돌리면서 손쉽게 면죄부를 얻는다.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라고 정이현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 은수는 말한다. 드림카인 미니쿠퍼를 살지 말지 고민하는 그녀는 세명의 남자를 사이에 두고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네명의 남자를 두고 저울질하는 신미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용의주도 미스신>은 결혼에 목매던 그녀가 새로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식으로 결말의 방향을 전환한다. 시종일관 오빠들에게 애교떨다 갑자기 언니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경우다. 내내 조건 좋은 남자와의 결혼에 목을 매던 여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말엔 모호함으로 후추를 뿌려 그 맛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면서 관객을 미혹시킨다.

노골적인 영화가 갑자기 선량한 화해를 시도할 때의 배반감은 더 크다. 차라리 전적으로 신데렐라 신화에 올인하면서 철저하게 속물적인 여성을 보여준다면 실컷 웃으며 크게 욕할 수 있는 자유라도 있을 것이다. 잔머리 쓰는 사람은 우습게 손해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신미수의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약으면서도 손해보려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민해 보이는’ 이러한 영화들은 모범적이게도 ‘바람직해 보이는’ 정답을 선택한다. 이러한 손쉬운 주제화는 반전영화만큼이나 식상한 것이고, 관객이 그러한 헐거운 화해에 감동할 리도 만무다. 앙큼하고 나쁜 여자, 약간의 코미디, 에피소드식 구성, 대중의 보편감각에서 볼 때 그다지 보수적이지 않은 결말 등등 성공적인 상업영화 요소들의 ABC를 조합해서는 한뭣습繭遮?옷에 입혀둔!????? 영화 <용의주도 미스신>은 그런 점에서 근래 한국영화에 흔한 인스턴트 같은 영화다. 서사는 없고 소재들의 선택과 배치만 있을 뿐이다. 성공적인 영화의 몇 부분만 공사해서 뜯어 고치면 뽑아져 나오는 성형한 미스코리아의 얼굴 같다.

한국영화, 서사는 부재하고 소재주의에 함몰되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손쉬움의 유통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만들 때는 포장 그럴싸하게 해서 손이 잘 닿는 곳에 두어 쉽게 계산대로 직행되게 하지만, 맛을 보면 그럼 그렇지 하면서 다시는 찾지 않으면서 식욕부진에 시달리게 된다. 지난 10년간 한국영화는 단단한 가치들에 대한 부정과 사소한 일상의 발견에서 새로움의 인상을 분명히 각인시켜왔다. 그러나 근래의 영화들은 새로운 소재 발굴에 골몰하다 못해 결국은 소재주의에 함몰됨으로써 영화가 기본적으로 견지해야 하는 윤리와 서사 부재의 막힌 골목에 다다르고 있다.

칙릿(Chick-lik: 20, 30대 도시여성 취향의 문학)이나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자립적이고 취향 분명한 여성들의 삶에 대한 선망을 재현하는 데 영화는 매우 발빠르게 움직여왔다. 그러나 모두들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안일하게 만들어서 <무릎팍도사>에 출연시켜 눈물 한번 글썽이게 하면 영화의 참을 수 없는 헐거움이 은폐되는 기이하고도 손쉬운 마케팅 전략도 문제다. 차라리 진짜 나쁘고 좀더 되바라지고 더더욱 쾌락적인 여성을 기대할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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