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산딸기> -민병훈 감독
2008-01-11
아련한 첫 키스의 추억

저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아쉬운 것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첫 키스에 관한 그림이 도대체 떠오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가끔 첫 키스의 추억을 떠올리려고 심란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보기좋게 미끄러집니다. 올 듯 말 듯 왔다 갔다 하는 추억이지만 높은 경사도의 슬로프로 미끄러지듯 어떤 작은 실마리마저 매번 놓쳐버리고 맙니다. 자꾸만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모든 것들이 긴 꼬리를 가진 연이 바람에 날려 꼬여가듯이 훌쩍훌쩍 제 기억 속에서 훌훌 날아가버립니다. 누구랑 했으며 언제였으며 어떻게 된 것이며 그녀가 내가 지금도 만나고 있는 것인지 그녀를 사랑해서 그랬는지 강제로 내가 그랬는지 아님 그녀가 먼저 돌진했는지, 맛있었는지, 예상을 하고 그녀를 만났는지, 입술의 느낌은 어땠는지, 처음부터 하도 많이 해서 입술이 부르텄는지 열정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녀의 콧대가 부딪치는 느낌을 받았는지 전 정말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첫 키스의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가장 소중하게 기억의 창고에 저장돼 있어야 할 기억을 끄집어낼 수 없으니 제 생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구 듭니다.

러시아어 선생이 아닌 연인 사이로 만나서 그런지 어색했지만, 그 겨울 우리는 모스크바 외곽의 한 허름한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손을 잡았습니다. 젊은 동양인과 예쁜 러시아 여인이 극장 구석에 나란히 앉아 있으려니 영화 보는 내내 러시아 청년들의 날카로운 가시와 같은 눈초리가 내 뒤통수에 아주 따갑고 총총히 박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색하게 손을 잡고 있는데 살며시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습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떨림이란… 그때, 영사실 칸막이 뒤쪽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 영화가 다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나를 노려보고 나가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겨울이 성큼 우리 곁에서 속삭임을 알겠습니다. 아침에 알싸한 공기가 피부에 직접 와닿았을 때 느낀 그 느낌은 첫 키스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다시금 온몸에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지금은 아무도 신의 존재에 대해 관심조차 갖지 않지만 한때 신이 영화의 중심 한복판에 서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세계 수많은 감독들이 존경해 마지않았으며 나로 하여금 영화를 찍도록 결심하게 만든 사람. 바로 잉마르 베리만(이름에서조차 뭔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화 <산딸기>. 전 제가 만난 감동의 영화를 뒤늦게 만났습니다. 극장에서 떨림의 키스를 나누었던 <산딸기>. 이 영화가 제 인생의 영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꿈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죽음으로 행하는 여정이며 동시에 다가오는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도망의 길입니다. 명예 학위를 받으러 길을 떠나는 의사가 자신의 삶이 실은 누구와도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 못했던 불모의 삶임을 깨닫는 영화입니다. 감독은 영화에서 거센 상징과 메타포로 가족의 단절과 고통의 심연을 상세하게 그려냅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느 누구와도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만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연주하고 자신의 내면 거울을 통해 스스로의 두려움을 조심스럽게 비추어봅니다.

이 영화는 심장에 박힌 얼음조각처럼 유학 시절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장의마차가 뒤집어지자 관이 열리는 장면, 처참했던 학교 졸업시험 꿈, 공개 장소에서 아내가 간음하는 장면 등은 대부분 감독이 실제로 꾸었던 꿈이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전 이 영화를 통해 제가 누구를 그리워했는지, 그녀와의 키스를 통해 종이 울렸는지, 폭죽이 터지며 심장이 벌렁거리고 주위가 빙글빙글 돌았는지를 떠올려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전 이미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운 겨울날 그녀의 따뜻한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던 느낌만 있을 뿐 이젠 그녀의 이름과 얼굴이 도통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전 <식스 센스>처럼 벌써 유령 같은 존재가 돼버린 것일까요?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키스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 키스의 추억이기도 하고 이별의 키스이기도 하고 기쁨의 키스이기도 합니다. 컴컴하고 좁은 공간에서 커다란 화면을 바라보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간접경험하는 우리. 쉽고 흔하게 우리가 찾는 영화관에 오래된 추억과 빛바랜 사랑과 실수로 인한 웃음이 머무릅니다. 과거의 어떤 장면, 첫사랑의 추억과 공간의 내음이 살아나곤 하는, 그 추억이 좋아 아직도 어슬렁거리며 영화관을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과잉이미지의 범람으로 정신 못 차리면서 영화 보다가 나도 모르게 갑자기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은 그 예전의 첫사랑이 생각나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민병훈/ 영화감독·<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 <포도나무를 베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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