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해숙] “소매치기 엄마 역할 자체가 쾌락이고 도전이었다”
2008-01-09
글 : 이영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무방비도시>의 김해숙

그냥 엄마가 아니다. 소매치기 엄마다. 게다가 전과 17범. <무방비도시>의 강만옥은 형사 아들 앞에서 뺨 맞는 수모를 당하고, 젊음을 감옥에서 탕진하고 나서도, 다시 남의 지갑을 탐하는 그런 못 말리는 엄마다. <우리형> <해바라기> 등에서 생활력 강하고 품 넓은 엄마 역을 소화했던 김해숙에게 강만옥은 정말 변신다운 변신이다. 그 또한 연기를 시작한 지 35년이 되어서야 맘속에 품고 있던 욕망 하나를 풀었다고 말한다. 애초 시나리오에는 없던 강만옥이라는 역할을 만들었던 욕심 덕에 그는 지난해 여름 머리채 잡혀 끌려가면서 악다구니를 쓸 수 있었고, 한쪽 다리 절면서 면도칼을 원없이 씹을 수 있었다. ‘무방비도시’에 다녀온 뒤 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아졌고, 그래서 다음번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참고로 이 인터뷰는 <무방비도시> 시사 일정이 예정보다 늦어진 탓에 영화를 보지 못하고 이뤄졌다.

-출연제의를 언제 받았나.
=<해바라기> 찍고 있을 때였다. 부산에서 촬영하다가 우연히 시나리오를 보게 됐다. 알다시피 두 영화 모두 제작사가 쌈지아이비젼이다. 다음에 준비하는 영화라고 해서 봤는데 그때는 강만옥 역할이 남자였다. 소매치기 아버지였지. 시나리오 읽고 나서 왜 이런 역할은 꼭 남자인가 싶더라. 화까지 냈다. 우리나라는 왜 다 남자가 하느냐고. (웃음) 엄마면 더 절절할 텐데. 뭐 그렇다고 출연제의를 받은 것도 아닌데 시나리오를 바꿔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잖나. 그런데 우연히 그 이야기가 쌈지아이비젼 전호진 대표 귀에 들어갔고, 이상기 감독님께도 전해졌던 모양이다. 잊고 있었는데 한달쯤 있다 시나리오 바꿨다고 연락이 왔다.

-부산에 헌팅왔다가 갑자기 시나리오 수정을 한 셈이다. 감독 입장에선 여자 캐릭터로 갑자기 바꾸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엔 나도 안 믿었다. 오죽했으면 바뀐 시나리오 보고 나서 내가 정말 복이 많구나, 그래서 이런 선물 받았구나, 기도를 다 했다니까. 감독님이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뒤늦게 보셨다더라. 내가 땅바닥에 구르는 장면을 보시고는 마음을 정하셨던 것 같다. 사실 중년배우들이 설 자리가 많지 않은데 기회를 만들어준 전 대표님도 고맙다. 영화는 몇편 안 한 나에게는 은인 같은 분이다.

-예고편을 보고 사실 좀 놀랐다. 처음엔 남자인 줄 알았다.
=하하하. 막상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살을 좀 빼달라고 해서 3kg쯤 뺐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운동이다. 남들 다 하는 집 주변 도보 운동도 해본 적 없다. 게다가 내 나이가 물만 먹어도 푹푹 찔 때 아닌가. 그래도 강만옥 해야 하니까 스포츠센터 회원증까지 끊어서 5개월 다녔다. 몸도 가벼워지고 이번 기회에 다이어트도 좀 하자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더 많이는 못 뺐다.

-아무래도 머리를 짧게 자른 효과가 크다.
=머리를 이만큼 자른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첫 장면에서 사람들이 나를 몰라봤으면 했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 강만옥이 맨 먼저 등장하는 장면이 감옥에서 출소하는 거니까 머리를 짧게 치는 수밖에 없겠더라. 자르고 나서 거울 보고 이런 모습이 나한테 있구나 깜짝 놀랐다. 현장 가니까 스탭들도 몰라봤을 정도니까.

-두딸들의 반응도 궁금하다.
=진작에 자르지 그랬냐고 하더라. 김해숙 하면 엄마 이미지부터 미리 짐작하고 떠올리는데, 그런 관객을 좀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짧은 머리를 개봉 전까지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 때문에 자른 건데 미리 보여주면 효과가 떨어지잖나. 그래서 드라마하면서도 꼬박꼬박 가발 쓰고 다녔다. 동네 슈퍼 갈 때도 모자 쓰거나 가발 뒤에 붙이고 갔고. 처음엔 티저 포스터도 안 찍겠다고 고집 피웠다.

-촬영 전에 전직 소매치기를 만났다고 들었다.
=자문해주신 남대문서 오현수 반장님이 소개해주셨다. 예진씨랑 명민씨랑 셋이서 만났는데 예상과 다르게 너무 예쁘고 멋쟁이였다. 한때 감옥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는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사실 소매치기는 티가 나면 안 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깔끔하게 외모를 치장한다고 하더라. 소매치기를 그만둔 지는 5년 정도 됐는데 우울증 때문에 많이 고생한다고 했다. 이야기 나누다 보면 문득 매서운 눈빛이 나오기도 하는데, 자식들이 있고 또 본인의 전력이 드러날까봐 사람들 만나는 두려움이 더 컸다. 과거에 사람들 손목을 끊어낼 만큼 독한 분이었지만, 딸 이야기만 나오면 굉장히 울었던 게 기억이 난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으나 자식만큼은 어쩌지 못하는 거지. 형사 아들을 둔 소매치기 엄마의 감정이 어떤 것일까 감을 좀 못 잡았는데, 그분 보면서 영화 속의 모정에 대해 확신하고 또 톤을 잡는데도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

-손의 상처는 필(면도날을 개조해서 만든 소매치기 도구)로 긋는 연습 때문에 생긴 건가.
=아. 이거? 몇 차례 긁혔다. 처음에 필을 왜 한번 쓰고 버리나 싶었다. 아껴서 안 쓰고. 그런데 직접 해보니까 한번 사용한 필은 못 쓰겠더라. 처음 쓸 때는 가방이 쫙쫙 나가는데 다음번에 또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소매치기들은 면도날을 몇장씩 숨겨서 몸 어딘가에 하루치 분량을 갖고 다닌다. 필 쓰는 건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핸드백 끝을 잡고 잘라낸 뒤 지퍼를 열어서 지갑을 꺼내는 게 있고, 핸드백 밑바닥을 찢고 빼내는 게 있다. 지퍼 잘라서 하는 건 너무 힘들다. 아무도 모르게 빼내야 하는데 자꾸 핸드백을 건드리게 된다. 촬영 때 한 10번 NG가 났는데 진땀이 다 나서 쉬었다 하자고 그랬다. 나중에 ‘연기하는 게 낫겠네’ 그랬다니까. 소매치기들은 목표를 정하면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몰입한다는데 그게 되나.

-거리와 감옥에서 젊음을 탕진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드러내려고 했나.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된다더라.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다시 소매치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번듯하게 사업체를 하고 있어도 다시 지갑에 손대는 분들도 있다고 하고. 왜 그럴까 따지기보다는 그냥 그런 인물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다만 실제 인물이 아니니 배우 입장에서 소매치기를 할 때와 엄마로서 자식을 대할 때 눈빛을 다르게 가져가려고 애썼다.

-소매치기를 실제 당해본 적 있나.
=당연히 있지. 가방이 헐렁해진 걸 깨닫는 순간 기분이 섬뜩하다. 우리 인생도 무방비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역할 자체가 독특하다 보니 다른 출연작에 비해 첫 촬영에 대한 기억 또한 남다를 것 같다.
=내가 첫 테이프를 끊었는데, 감독님한테 왜 하필 나부터 찍냐고 그랬다. 극중에서 어린 시절의 대영이가 보는 앞에서 형사들에게 잡혀가는 장면인데 얼마나 긴장했는지 지금도 그 예쁜 동네가 어디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주로 못된 자식 감싸는 역할을 하다가 이번엔 반대였다. 쾌감도 있지 않았나.
=역할 자체가 쾌락이고 도전이었다니까. 대신 몸으로는 많이 부대꼈다. 지하철 역에서 여자들한테 맞는 장면 찍을 때는 허벅지 다치고, 촬영 끝나고 나서는 아파서 울었다. 서울액션스쿨 다니면서는 이틀 구르고 나서 몸살나서 앓아누웠고. 일주일 내내 서울 명동하고 순천 명동하고 오가면서 찍었던 마지막 장면도 비 억수로 맞으면서 촬영했는데 힘들었지. 찍고 나서는 성취감이나 자부심도 들지만.

-액션연기 다시 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나.
=주위에서 일 도와주시는 분들이 그런다. 대충 해도 되는 나이 아니냐고. 그래도 안 해본 거 찾아 헤매는 스타일이다. 드라마는 제약이 많으니까 영화쪽에서 더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현실은 코믹한 버전의 엄마 역 정도지만. 가끔 백윤식 선배님 볼 때면 부러워하면서 언젠가 우리 여배우에게도 그런 날이 오겠지 하면서 목말라했다. 한국에서도 메릴 스트립이 가능해야 하는데 하면서. 사실 남자배우가 할 수 있는 거 여자배우도 할 수 있다. 여자도 화투칠 수 있고, 사기칠 수도 있다. 여자가 하면 더 독하게 한다니까.

-그냥 어머니였다면 감독들 또한 믿고 맡겼겠지만, 이번엔 주문이 많았을 것 같다.
=평소에 감독들하고 대화를 많이 한다. <해바라기>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너무 많이 울지 않으려고 했다. 소매치기 엄마가 아들을 만났을 때의 심정이 쉬운 게 아니어서 촬영 초반에 좀 헷갈렸다. 감정 표현의 수위를 어떻게 조절할지가 관건이었다.

-이를테면 나문희 선생님의 얼굴에는 기본적으로 푸근한 느낌이 깔려 있다. 반면 김해숙이 만들어낸 엄마들은 환한 낯빛을 거두면 정말 싸늘하다. 게다가 목소리도 좀 날카로운 편이고.
=어쨌든 내가 그려왔던 엄마들은 현실적인 엄마들이라는 정도밖에 말 못하겠다. 목소리는 데뷔 때는 스트레스가 더 많았다. 앵앵거린다고 해야 하나. 톤도 높고. 김수현 선생님도 내 목소리를 지적하신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담배를 피웠다. 목소리가 두꺼워진다고, 걸걸해진다고 해서. 처음에 피웠을 때는 어지러워서 화장통 변기 잡고 그랬는데 꽤 덕을 봤다. 고생하면서 배우지. 지금은 끊으려고 하는데 힘들다.

-깡을 내보이는 연기, 독을 내뿜는 연기는 마냥 상상한다고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나.
=42살 때쯤이었나. 인생을 끝내려고, 포기하려고 한 적이 있다. 다시 제2의 인생을 살아냈는데, 그럴 수 있게 해준 가족들에게 고맙고 나한테 고맙다.

-어쩌다 그랬나.
=마흔쯤 돼서 장사를 했는데 실패했다.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던데다가 방송사에 가려고 해도 차비가 없었다. <해바라기>에서 내가 감옥에 간 (김)래원이한테 희망수첩을 주는데, 그 안에 술먹지 않기, 울지 않기, 싸우지 않기 뭐 이렇게 적어놨잖아. 근데 정말 그때 나도 희망수첩을 가슴으로 썼다. 술먹지 않기, 울지 않기, 음악 듣지 않기.

-음악은 이해가 안 간다.
=음악 들으면 사람이 한없이 약해진다. 가끔 딸들에게 좋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1974년 MBC 공채탤런트 7기로 방송 일을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은 드라마 열풍이 정점에 올랐던 때다. 경쟁도 치열했을 텐데.
=21살쯤 됐나. 종로에 있는 재수학원에 다니면서 마지막으로 경희간호전문대학에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다. 원래는 신문방송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떨어지고, 집에서는 간호대학에 가라고 성화였고. 그러다 우연히 탤런트 시험을 본 거다. 서울 정동에서 시험을 봤는데, 지금 이화여고 자리. 탤런트 경쟁률이 500 대 1이 넘었으니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한번 보자, 했는데 4차까지 간 거지.

-탤런트가 되고 싶단 생각은 전혀 없었나.
=고등학교 때까지는 피아노를 했다. 방송사 합창단도 하고. 피아노는 고1 때 접었는데, 소나타 들어가서는 손이 너무 작아서 옥타브를 넘나들지 못하는 거다. 제일 좋아하는 쇼팽을 못하니까 좌절도 하고. 그때 우리 선생님이 줄리어드 음대를 나오신 분인데, 나도 저렇게 유학을 갔다가 나 같은 애 레슨하고 있으면 어쩌지 뭐 이런 생각도 들고. 마침 또 그때가 사춘기여서 어느 순간부터선가 나도 집에 피아노 치러 간다고 해놓고 떡볶이 먹으러 돌아다니고 있더라. 피아노 그만두고 방송반을 했는데, 성우를 하기도 하고 아나운서를 하기도 하면서 이런 쪽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적은 있었다. 홀어머니 무남독녀여서 내성적이었는데, 연기만 하면 딴 애가 되어 있으니까 주위에서도 권유를 하기도 했고. 신인 치고는 <제3교실> <수사반장> <113 수사본부>에 출연하면서 기회를 꽤 많이 얻었는데 운이 좋은 편이었다. 분장실에 앉지도 못하고 화장실에서 화장 고치던 때였지만.

-데뷔한 지 얼마되지 않아 결혼을 했다.
=드라마로 데뷔하고 나서 주인공 몇편 하고 시집 갔다. 그리고 다시 재데뷔를 했는데. 그러니까 주부탤런트 1호라고 해야지. <백년 손님>이라고 유인촌 오빠랑 같이 한 드라마였는데 히트를 쳤다. 하지만 애 엄마니까 한계가 있었다. 성격이 낙천적이어서 기회는 언제든 오는 것이라며 잘 견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서 내 나이보다 훨씬 많은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 <부모님전상서>에서 송재호 선생님이랑 같이 부부로 나온 게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노인처럼 말을 짱짱 늘어지게 해야 하니까 쉽지가 않더라. 아마 <장밋빛 인생> 정도가 엄마로서 자리를 잡은 드라마다. 배우로서 자각하고 역할에 덤벼든 지는 몇년 안 된다.

-<성난 능금>(1976)을 비롯해 1980년대 중반까지 1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무렵에 활동한 배우들이 다 그렇겠지만, 충무로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벗기려 드는 영화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정부>(1982) 같은 영화 찍을 때는 촬영장에서 도망다니다시피 했고, 결국 대역을 쓰긴 했는데. 누가 영화 찍자고 하면 정말 무서웠다. 그래서 한동안 멀리했다. 그렇게 한 10년 흘러보내고 나서 <가문의 영광>(2000)에서 한컷 나오는 엄마 역할로 나왔다. 그 뒤로 <오! 해피데이> <몽정기2> <파랑주의보>에 출연했지.

-과거 충무로에 대한 기억은 다 끔찍한 것뿐인가.
=돌아가신 김기영 감독님에 대한 기억은 좀 남다르다. <육체의 문>(1981) 같은 경우 김 감독님의 오랜 조감독이었던 이기환 감독님의 영화인데 사실상 김 감독님이 지휘하셨다. 오디션도 김기영 감독님이 진행하셨고. 성질이 불같으셔서 현장에서 야단을 엄청 많이 맞았는데, 또 저쪽 가서 울고 그러면 또 운다고 뭐라고 하시고. 아무것도 모를 때라 감독님이라기보다 아버지 같은 느낌이다. 나중에 <화녀>를 다시 하시겠다고 하면서 시나리오를 주시기도 했는데, 난 촬영 때 닭목을 어떻게 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 속 엄마 역할 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게 뭔가.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다 소중하다. <우리형>이나 <해바라기>나 <무방비도시>나 다 내 분신 같다. 하나는 심장, 하나는 폐, 하나는 간.

-김해숙은 예명인가. 본명인가.
=본명이다. 누구 말로는 이름이 별로라는데, 그래도 안 바꿨다. 솔직한 게 좋으니까. 내 이름이 바다 해에 맑을 숙인데. 바다가 안 그래도 맑은데 더 맑으면 고기가 살겠느냐고 해서 안 좋다고 하더라. 후배이자 이번 영화에 특별출연한 이혜숙이랑 같이 다니면 가끔 헷갈린다. 누가 부르면 둘 다 돌아보고. 그래서 같이 촬영할 때는 큰 해숙, 작은 혜숙으로 사람들이 부른다.

-얼마 있으면 생일이다. 뭘 선물로 받고 싶나.
=아직 영화를 못 봤는데, 너무 긴장된다. <무방비도시>가 잘되는 것만큼 좋은 선물이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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