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허무한 혁명, 공허한 TV
2008-01-17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혁명과 매스미디어에 대한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해석 돋보이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1963)를 보면 주인공 역을 맡은 버트 랭커스터가 이런 말을 한다. “세상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변화가 없다.” 혁명이 일어나 천지가 개벽할 듯 사람들은 흥분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자리의 주인만 약간 바뀔 뿐 그 형태는 그대로 남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에겐 자신의 서재에서 망원경을 통해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이 취미가 됐다. 아! 영원히 변화없는 아름다운 별자리여!

이 남자의 세계관은 지극히 냉소적인데, 혁명이란 신흥계급이 자기와 같은 귀족들의 자리를 일부 나눠가지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폄하한다. 그렇다면 문자 그대로의 ‘뒤집어지는’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과 부의 일부가 약삭빠른 자들에게 조금 이양되면, 혁명은 종결되고 별자리는 또다시 그대로 남는다는 뜻이다.

세상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변화가 없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동구권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는 가히 ‘혁명’에 가까웠다. 몇 십년씩 이어지던 독재정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차례대로 무너졌다. ‘로마의 땅’ 루마니아에서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고 살벌했다. 20년 이상 철권을 휘두르던 차우셰스쿠가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1989년 12월22일 권력에서 물러나고, 결국 크리스마스에 2시간 정도의 재판을 거친 뒤 곧바로 공개 처형됐기 때문이다. 차우셰스쿠는 총살되며 인터내셔널 찬가를 부르고, 그의 아내는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 모든 과정이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서방세계로 전달되었으며, 루마니아에서는 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극적이고 잔인한 정치극이었다.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2006)는 1989년의 혁명을 기억하는 영화다. 그런데 먼저 밝히고 싶은 사실은 혁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거창하게 다루는 게 아니라 코미디의 대상으로 삼은 점이다. 그런데도 혁명의 의미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때의 혁명이 사람들이 꿈꿨던 미래로 세상을 끌고 갔을까? 여기에 대한 답을 고민하다보면 저절로 헛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사람들이 흥분했는데, 17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은 혁명 이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데서 씁쓸한 웃음이 배어 나오는 이야기 구조다.

영화는 루마니아의 어느 소도시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곳은 동로마제국의 아름다운 비잔틴 문화유산이 그림처럼 보존돼 있는 관광사진의 도시와는 전혀 다른 곳이다. 여기는 수도인 부쿠레슈티에서 동쪽으로 좀 떨어져 있는 소도시인데, 첫눈에 봐도 가난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진눈깨비가 내려 길은 진창으로 변해 있고, 낡은 외투를 걸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활기란 보이지 않는다. 진창에 빠져 활기를 잃은 세상이 한눈에 제시돼 있는 것이다.

이곳 지역방송의 사주이자 시사프로그램 사회자는 혁명기념일을 맞아 특별토크쇼를 준비한다. 부쿠레슈티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곳에서도 과연 그런 혁명이 있었는지 확인하자는 게 토크쇼의 테마다. 초대손님은 고교 역사교사와 은퇴한 연금생활자다. 이들은 원래 출연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연락이 되지 않아 그들 대신 갑자기 TV에 나오게 됐다. 제목에 암시됐듯, 초대손님들은 자신들이 혁명의 시간에 시청 광장에 나가 시위를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토크쇼의 테마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곳 소도시는 정치적인 변화와는 별 관계없는 곳이다. 혁명이 있었는지를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혁명이라는 게 거의 없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원래 출연하기로 했던 사람들도 막상 방송 날짜가 다가오니 사실을 확인시켜줄 증거가 없어 갑자기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 주민들은 아마도 부쿠레슈티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혁명의 흥분을 TV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거기 있었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이 나와 이곳에도 혁명이 있었다고 우긴다.

하지만 토크쇼가 진행되면 될수록 혁명의 흥분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혁명 전의 무기력함이 여전히 감지되는 데서 이 영화의 냉소주의가 슬슬 드러나기 시작한다. 역사교사의 주장대로 혁명이 있었다한들 이곳이 과거와 비교해 얼마나 변했을까? 사람들이 꿈꿨던 미래로 전진했을까? 별로 그렇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진창으로 변해버린 도시의 풍경이 잘 암시하고 있고, 또 혁명 전의 사람들의 관계가 혁명 뒤에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암울한 현재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방송사 사주이자 진행자는 혁명 전에도 목재업을 하던 자본가였고, 역사교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술 외상값에 꼼짝도 못하는 주정뱅이 봉급생활자이고, 연금생활자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명하는 하층계급이다. 토크쇼가 진행되며 과거 비밀경찰을 하던 사람은 지금 큰 공장을 운영하는 자본가로 변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이쯤 되면 <레오파드>의 별자리가 여기서도 통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가는 자본가고, 술주정뱅이는 주정뱅이로 남았다. 부조리한 현실을 바라보다보면 저절로 헛웃음이 삐져나오게 코미디가 짜여져 있는 것이다.

TV는 과장하고 우리는 환호한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2006년 칸영화제에서 최고 신인감독에게 주는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작품이다. 혁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머있게 다룬 솜씨도 뛰어났지만, 한 가지 더 돋보이는 점은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다. 여기서도 감독의 냉소적인 입장이 날카로운 유머로 표현돼 있다.

대략 1시간 반짜리 영화에서 1시간가량이 TV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된다. 혁명의 순간 시청 앞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고 교사가 주장하자마자 곧바로 시청자 제보가 전달되는데, 그 시간 교사는 시청 앞 술집에서 밤새 술을 퍼마셨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토크쇼는 이 지역에도 혁명시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보다 ‘당신은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로 더욱 좁혀진다. 다시 말해 루마니아 정치사에 빛나던 순간인 혁명이 이곳에서도 벌어졌는지의 확인과정이, 이젠 술주정뱅이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로 변한 것이다. 어이없게도 이게 우리가 한 시간가량 보아야 할 영화 속 토크쇼의 주제다.

올리버 스톤이 <올리버 스톤의 킬러>(Natural Born Killers, 1984)를 발표했을 때, 관객이 놀란 이유는 두 주인공이 벌인 끔찍한 폭력에도 있었지만,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살인자도 스타로 둔갑시키는 TV의 속성과 또 그런 현상에 환호하는 대중의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한 데 있다. TV는 시청자의 눈길을 잡기 위해 상식을 뛰어넘은 지 이미 오래인데, 문제는 많은 시청자가 바로 그런 프로그램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TV는 시청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이를 악물고 뛰고, 시청자는 더 많은 돌발영상을 TV에 요구하고, 그러는 사이 매스미디어는 통제불능의 괴물로 변해간다. <올리버 스톤의 킬러>에서는 살인자를 대중의 스타로 만든 그 기자도 결국 범죄의 희생자가 되며, 그의 죽음까지 방송의 소재가 되는 것으로 매스미디어의 괴물 같은 속성이 적나라하게 고발돼 있다.

매스미디어 환경에 대한 비판은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에서도 주요하게 다루는 문제다. 포룸보이우 감독은 토크쇼의 형식을 빌려왔다. 우리 주위의 별 시답잖은 토크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린다면, 감독이 특별히 토크쇼를 영화 만들기의 주요 소재로 선택한 것은 현명해 보인다. 토크쇼의 주제가 ‘그날 여기에도 혁명이 있었습니까’인데, 읍 크기도 돼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그날 혁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게다가 초대손님은 술주정뱅이와 혁명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주제를 꺼내놓고, 또 그 주제에 대해 설득력을 보여줄 것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와 떠들어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청자라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 쓸데없는 소리나 해대고, 논제조차 되지 못하는 문제에 핏대를 올리는 것까지 닮았다. 우리가 매일 TV에서 보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TV는 애매모호하고

혁명이 일어날 때 광장에 있었다는 역사교사의 주장은 누가 봐도 억지 같다. 그런데 그때 교사가 술집에 있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까지 나왔지만, 토크쇼가 진행될수록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더욱 모호해진다. 토크쇼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정해진 시간만 채우다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혁명의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TV는 그런 흐릿한 기억에 거짓까지 더해 더욱 과거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다. 루마니아의 혁명은 사람들이 꿈꿨던 세상과는 한참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것 같다. 여전히 세상은 암울하고 일상은 피곤하다. 보통 사람들은 권력에서 배제돼 있고, 부(富)의 소유에서도 밀려나 보인다. 새로운 부가 있다 한들 중국인 같은 외국인들이 선점한 것 같다. 혁명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는 허상처럼 잊혀지고, 사람들은 과거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상의 무게 속에서 하루를 이어간다. 이런 쓸쓸한 이야기가 역설적이게도 예리한 웃음 속에 배어 있는 게 이 영화의 큰 매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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