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유영길 촬영감독 10주기
2008-01-18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8월의 크리스마스>

“존재의 목적은? 존재의 목적은….” 가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나오는 대사처럼 질문을 던져본다. <씨네21>의 존재 목적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영화인의 기억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을 상기시키는 것도 분명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씨네21> 기자들 가운데 이런 대목을 자주 일깨우는 인물은 문석 기자다. 매달 기획회의를 할 때마다 그의 기획안에는 아무개의 탄생 100주년, 사망 10주기 등 기념할 만한 일들이 잔뜩 들어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일을 잘 챙기는 게 쉽진 않다. 모차르트 사망 200주년 음악회 정도 되는 대형 이벤트라면 몰라도 그만큼 유명하지 않은 인물인 경우 잊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장국영이나 이은주처럼 팬클럽이 있는 배우나 영화사에 등재된 유명감독이 아니라면 더욱더. 이번달 문석 기자의 기획안을 보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10주기가 코앞에 왔음을 알았다. 1998년 1월16일, 그는 유작 <8월의 크리스마스>의 개봉을 보지 못한 채 영면했다.

내가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은 영안실이었다. 갑작스런 죽음에 어떤 기사를 써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도착한 빈소에는 고인과 함께 작업했던 수많은 감독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배창호(<기쁜 우리 젊은 날> <안녕하세요 하나님>), 정지영(<하얀 전쟁> <남부군>), 박광수(<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장선우(<우묵배미의 사랑> <화엄경>), 이명세(<개그맨>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창동(<초록물고기>), 허진호(<8월의 크리스마스>), 여균동(<세상 밖으로>) 등 80년대와 9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빈소를 지켰다. 고인에 대해 알지 못했던 나는 취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댔지만 막상 취재는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었다. 만나는 감독마다 고인에 관해 묻지 않아도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들은 한국영화의 허리를 잃었다며 안타까워했고 척박한 시대 작가가 원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한계에 도전했던 열정을 그리워했으며 창작자의 혼이 담긴 촬영을 위해 늘 연구하던 치열한 장인정신을 칭찬했다. 대체로 고인보다 적은 나이였던 감독들에게 고인은 아버지이자 형이었고 무엇보다 스승이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어느 날 갑자기 고아가 된 것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날은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유영길, 이라는 이름 석자가 한국영화에서 결코 잊혀져선 안 된다고, 그날 영안실에 모인 영화인들은 절절히 호소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일반적 예우 차원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와 거의 울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어떤 영화인이 죽어 그 같은 안타까움의 대상이 될까? 가끔씩 그가 찍은 영화를 보다 그날이 떠오른다.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눈을 가진 분”이었다는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유영길의 진실된 화면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날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분은 갔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의 영화계는 유영길의 제자들로 가득하다. 아마 천국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시지 않을까 싶다. 이번주에는 영화인 누구나 고인의 10주기를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P.S. 이번호 독자면에는 <우아한 세계>의 한재림 감독이 보내온 원고가 실렸다. 최근 <헨젤과 그레텔>이 주목받지 못한 채 극장에서도 일찍 간판을 내리는 상황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담은 글이다. 한편 필자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영객잔’이 이번주도 문을 열지 못했다. 양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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