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를 입은 장소나 사물에 붕대를 감아주는 것으로 정말 치유가 되는 것일까? 붕대클럽의 아이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부탁을 받아 붕대를 감아주고, 그 사진을 찍어 게시판에 올린다. 그들 역시 그런 의문을 갖는다. 그걸로 정말 사람들의 상처가 나을까? 그걸 한다고 이 세상이 좋아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신발도 없이 학교에 다니는 제3세계 아이들처럼 맨발로 통학을 하거나, 한밤중에 미군기에 폭격당하는 이라크 아이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한지 느끼기 위해 좁은 텐트 안에 폭죽을 터트리는 등 디노(야기라 유야)가 날마다 행하는 기행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일종의 사회봉사라고 생각하며 붕대클럽을 운영한다. 그러다가 장벽에 부딪힌다. 우선은 우리의 행동이 정말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라는 회의. 그리고 이 선의의 행동도 어쩌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 마트에서 일하는 와라(이시하라 사토미)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음을 알게 된다. 손님들은 어리고 예쁜 와라가 선전하는 물건을 산다. 옆에 있는 늙고 추레한 아줌마 직원은 외면당한다. 결국 손님들이 선호하는 것을 알게 된 마트 사장은 아줌마를 해고하고, 젊고 예쁘고 애교 많은 아르바이트생을 채용한다. 직접적으로 와라가 험한 말을 하거나 악한 행동을 한 것은 없지만, 단지 존재만으로 아줌마는 상처를 입는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우리는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고, 또 상처를 받는다. 선의의 행동도, 누군가에게 해악이 될 수 있다. 그걸 깨달은 붕대클럽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붕대클럽>의 원작자는 <영원의 아이> <넘치는 사랑> <가족 사냥> <고독의 노랫소리> 등의 소설을 발표한 덴도 아라타다.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영원의 아이>는 세 아이가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간직한 채 어른이 된 뒤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덴도 아라타는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작가인데, 그 방식은 아주 현실적이고 끔찍하다. 가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랑과 희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혹은 명분으로 더욱 잔혹하고 사악한 짓을 벌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덴도 아라타는 그 어둠을 악착같이 파고들어 까발긴다. 그 모든 것을 헤집어놓고, 때로 잔인할 정도로 모든 악행을 폭로한 뒤에야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 현실을 외면한 채 그저 개념에 불과한 사랑이나 희망 그리고 가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얼토당토않다. 아마도 그것이 덴도 아라타의 메시지일 것이다.
하지만 “대형 무대에 올릴 만한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소극장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작은 규모의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붕대클럽>은 전작에 비해 경쾌하고, 따뜻한 성장소설이다. 그런 훈훈한 느낌을, 쓰쓰미 유키히코는 욕심없이 성실하게 각색했다. <케이조쿠>와 <트릭>으로 일본 최고의 드라마 감독이 된 쓰쓰미 유키히코는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영상으로 유명하지만 <붕대클럽>은 오히려 얌전하고 상식적인 영상과 전개를 보여준다. <붕대클럽>에 필요한 것은 엽기나 재치가 아니라 우직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을 불신하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회의하며 모든 것에 무심하거나 분노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세상을 믿는 과정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 과정이다. 중요한 건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세상을 욕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붕대를 감으면서 그들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서 <붕대클럽>은 차분하게, 세상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구축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평이하지만 설득력있게.
사실 붕대를 감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건 그저 마음의 위안일 뿐이다. 하지만 덴도 아라타가 말하는 것은, 그래도 무언가를 하자는 것이다.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건 알아. 아무 효과도 없다는 증거를 위해서라도 감자.”(소설 <붕대클럽> 중에서) 아무런 결과가 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붕대를 감는 사람들의 마음만은 바뀌게 되어 있다. 덴도 아라타는 “남의 상처에 무관심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에 대해,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창작 동기를 밝혔다. 여전히 세상에는 수많은 아픔이 있다. 그것을 나와는 상관없어,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라며 지나쳐버리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아니 그전에 나 역시 아무런 악의도 없는 누군가에게, 시스템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된다. ‘88만원 세대’가 누군가의 악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88만원 세대에 속한 나는, 상처를 입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내가 외면하면 나 역시 외면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