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난날이 모두 꿈같이 느껴져.” 프랑수아 오종의 첫 번째 영어영화 <엔젤>은 자신의 여주인공과 같은 대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여류소설가 엔젤 데브렐의 일생을 그린다. 자신의 소설과 정확히 같은 운명을 겪었던 엔젤과 영화 <엔젤> 역시 상당한 공통점을 지닌다. 죽는 날까지 ‘파라다이스’를 떠나지 않았던 ‘엔젤’의 이야기에 감춰진 시대, 그리고 오종의 인장을 살펴본다.
1. ‘천사’의 모델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했던 엔젤의 인생처럼, 동명소설(<엔젤 데브렐의 일생>)을 원작으로 삼는 <엔젤> 역시 현실과 허구가 겹겹으로 서로를 감싼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의 작가가 1957년에 완성한 <엔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대중소설로 이름을 알린 영국의 여류소설가 몇명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이 브론테 자매를 비롯하여 제인 오스틴을 거쳐 애거사 크리스티까지, 대중에게 사랑받은 위대한 여류소설가의 전통이 유난히 강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그중에서도 오직 대중의 사랑으로 명성을 쌓았고 세월 속에 잊혀진 이들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제작진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모델은 1855년 런던의 유명 시인과 그의 하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멜로드라마 작가 마리 코렐리. <두 세계의 사랑> <악마의 슬픔> 등 초기소설의 거창한 작명이며, 베니스에서 직접 공수한 곤돌리에까지 곁에 두고 17세기풍으로 꾸민 뒤 말년을 보냈다는 저택의 이야기가 엔젤과도 겹친다. 그녀와 평생 함께 살았고 동성애 관계로 의심받기도 했던 친구는 <엔젤> 속 노라의 모델이 됐을 것이다. 인도를 비롯하여 전세계에 퍼져 있는 영국의 식민지를 배경으로 지극히 여성스러운 여주인공과 모든 면에서 뛰어난 남자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주로 쓴 1881년생 에델 M. 델의 작품도 엔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듯하다. 정열, 전율, 갈망, 떨림과 같은 단어를 즐겨 사용한 델의 작품 속 부담스러운 정열에 대해 평론가들은 증오를 표했지만, 그녀 자신은 스스로를 훌륭한 이야기꾼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녀는 다작을 거듭한 끝에 많은 부를 축적했다. 오종에 따르면 테일러는 이러한 시대의 여류소설가와 그 작품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견지했지만, 그 자신은 “그녀의 악취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이고 동정할 만한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고.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원작의 태도를 좀더 견지하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을 것이라는 미련을 버리기는 힘들다.
2. 오종의 여인들
“작가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요.” 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엔젤의 대중적인 가능성을 알아본 출판사 사장의 부인 헤르미온느의 말이다. 엔젤의 천박한 취향에 무시로 일관하다가 점차 흥미를 느끼고 공감하다가 동정하는 그녀의 변화는 감독이 관객에게 강요하는 감정 상태와 정확히 일치한다. 램플링 자신이 오종과 호흡을 맞췄던 전작 <스위밍 풀>에서 얄팍한 대중소설인 추리소설작가를 연기했음을 떠올리면 묘한 기시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감독 자신의 말을 그녀의 입을 통해 들려줄 정도로 헤르미온느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이를 연기한 샬롯 램플링은 자타가 공인하는 ‘오종의 여인’이다.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에마뉘엘 베아르 등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여배우를 모조리 끌어들여 기기묘묘한 뮤지컬코미디 <8명의 여인들>을 만든 전력이 있는 이 잘생긴 감독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는 여자 혹은 여배우. <스위밍 풀>에서 뤼디빈 사디에르가 램플링과 대등한 연기를 펼치며 화려하게 주목받았다면, <엔젤>에는 로몰라 가레이가 있다. <스쿠프>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친구로 등장하는 등 작은 조연에 그쳤던 그녀는 <엔젤>과 비슷한 시기, <어톤먼트>의 내레이터를 맡은 중요한 조연으로 출연하는 등 점차 스포트라이트에 다가서고 있다. <엔젤>에서는 지극히 여성스러운 금발을 고집스런 흑발로 바꾸어 동일인임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헝가리계 유대인 집안에서 은행가의 딸로 홍콩에서 태어난 가레이는 7살까지 싱가포르에서 살았다.
3. <엔젤> 속 오종의 목소리
<엔젤>의 첫 부분은 귀족의 피를 타고났다고 거짓말을 해대는 엔젤의 철없는 내면을 설명하는 데 할애된다. ‘네 주제에 무슨 소설이냐’는 엄마의 한숨에 분노한 엔젤은 방에 틀어박혀 처녀작 <이라니아 공녀>를 집필한다. 온갖 유치찬란한 형용사를 동원하여 불같은 운명의 여주인공을 묘사하는 엔젤은 끝내 “천박한 취향으로 모든 걸 쟁취”한다. 신인 주제에 ‘쉼표 하나도 수정할 수 없다’던 당당함이 무기였다. 첫 장편 <크리미널 러버> 이후 1년에 한편씩 꾸준히 영화를 완성해온 프랑수아 오종 역시 한때 ‘취향의 악독함’으로 이름을 날린 바 있다. 숱한 평론가들이 그의 경박함에 질려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던 오종이 엔젤에 대해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했던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인상적인 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를 방해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모두가 인정했던 1차대전의 대의를 경멸했던 엔젤의 반전의식이다. 21세기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녀의 개인주의는 끝내 이해받지 못한다. 대중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이 괴리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던 엔젤이 “돈 버는 건 쉽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써주기만 하면 된다”며 자신감을 표하는 모습은 다소 측은하다. 인생도 예술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21세기의 비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