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뤼미에르 형제를 영화의 아버지라 부르나, 사실 영화에는 또 다른 조상이 있다. 바로 필름에 붓칠을 했던 멜리에스다. 멜리에스와 뤼미에르 형제의 동영상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멜리에스의 것이 손으로 그린 환상이라면, 뤼미에르 형제의 것은 기계로 찍은 일상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멜리에스의 동영상이 환상의 오락으로 남으려 했다면, 뤼미에르 형제의 것은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곧 현실의 객관적 기록으로서 ‘리얼리즘’의 진리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만화와 실사를 가르는 차이는 역시 지표성(indexicality)의 유무. 무에서 출발하는 애니메이션과 달리 실사영화에는 반드시 피사체가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동영상 중에서 뒤에 영화의 대명사가 된 것은 역시 움직이는 사진, 실사영화였다. 가령 앙드레 바쟁은 ‘지속성’(duree)과 더불어 ‘사진의 객관성’을 영화매체의 본질로 들지 않았던가. 그의 말에 따르면 사진은 “재현 대상의 존재를 믿도록 강요”하며, “촬영된 대상은 마치 지문처럼 모델의 존재의 일부가 된다”.
디지털과 더불어 역전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오늘날에는 손으로 그린 것이든 기계로 찍은 것이든 모두 ‘데이터’로 환원된다. 아날로그 사진도 스캔을 통해 픽셀이 되면 지표성을 잃는 법. <쥬라기 공원>(1994)에서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봉합선은 사라졌다. 그래픽은 점점 더 깊이 실사의 영역으로 침투하고 있다. 이미 레프 마노비치에게 디지털영화는 “다른 많은 요소들과 더불어 실사 필름자료도 함께 사용해서 만드는 애니메이션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양방향에서 이뤄지는 사진과 그림의 융합
사진과 그림의 융합은 서로 대립되는 두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는 실사를 방불케 하는 그래픽으로 뜨거워지는 방향. 이 길은 <파이널 환타지>(2001)에서 시작하여 <폴라 엑스프레스>(2004)를 거쳐 <베오울프>(2007)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거꾸로 사진의 뜨거움을 만화와 같은 그래픽 이미지로 차갑게 식히는 방향. 이른바 로토스코프(rotoscope)로 제작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웨이킹 라이프>(2001)와 <스캐너 다클리>(2006)가 여기에 속한다.
실사필름을 밑그림으로 사용하는 그래픽은 사실 영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기술이다. <백설공주> 이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이 이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아날로그 수작업을 디지털로 바꾸어놓았을 뿐이다. <웨이킹 라이프>에서 <스캐너 다클리>에 이르는 사이에 디지털 로토스코프 역시 엄청나게 발전했다. 하지만 정작 관객은 기술적으로 더 발전한 후자보다 기술적으로 덜 발전한 전작에 끌리는 모양이다. 왜 그럴까?
아마 기술을 위해 미학이 희생당했다는 느낌 때문일 게다. <스캐너 다클리>는 기술적으로 진보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미학적으론 외려 뒷걸음친다는 느낌을 준다. 퇴행은 이미지와 서사의 두 측면 모두에서 발견된다. 가령 <웨이킹 라이프>가 실사에서 그래픽으로 나간다면, <스캐너 다클리>는 거기서 다시 실사로 돌아가려 한다. <웨이킹 라이프>가 부조리한 연결로 서사의 선형성을 깬다면, <스캐너 다클리>의 서사는 슬며시 선형적 서사로 복귀한다.
팝아트적이고 초현실적인 <웨이킹 라이프>
<웨이킹 라이프>의 이미지는 팝아트, 즉 워홀, 톰 웨슬만, 리히텐슈타인, 때로는 호퍼를 연상시킨다. 공간의 결합과 배치는 달리나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이다. 이 회화적 효과는 물론 이미지의 유미화를 위한 게 아니다. 꿈속의 인물은 워홀의 실크 스크린처럼 불분명하고, 꿈속의 공간은 달리의 회화처럼 부조리하지 않은가. 여기서 로토스코프는 그저 기술의 과시가 아니라, 꿈에서 꿈으로 잠들고 꿈에서 꿈으로 깨어나는 세계의 미학적으로 적확한 표현이다.
기차의 차량처럼 덜컹거리는 건물들 사이로 서사는 액체처럼 흘러다닌다. 꿈속의 서사는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이 아닌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진화심리학과 뇌과학, 포스트휴먼의 이론,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자유의지와 물리적 환원론의 대립. 꿈속에서 주인공이 나누거나 엿듣는 대화는 실은 매우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다. 이렇다 할 외적 행위 없이 오직 대사만 가지고 영화 전체를 끌고 나가는 감독의 능력은 가히 놀랄 만하다.
장면의 연결은 인과적이지 않다. 꿈의 질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꿈은 그전에 꾸던 꿈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거기선 결코 깨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뇌과학에 따르면 “죽은 뒤에도 우리 뇌는 12초 동안 깨어 있다”. 죽음의 순간에는 1초 동안 인생 전체가 눈앞에 필름처럼 스친다. 그러니 12초면 영겁의 세월이 아니겠는가? 서사의 산만함 속에서 불현듯 주인공이 꾸는 꿈의 정체가 암시되고, 대사의 지루함을 파열시키며 섬뜩한 충격이 엄습한다.
자기지시의 메타영화
<웨이킹 라이프>의 매력은 자기지시성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영화론을 논하는 두 남자의 대화를 엿듣는다. “바쟁에게 영화의 존재론은 사진의 존재론과 일치해. 거기에 시간의 차원과 더 큰 리얼리즘을 더한 것뿐이지. (…) 바쟁은 기독교인이었어. 그에게는 현실과 신은 같은 것이었어. 영화가 실제로 포착하는 것은 창조하는 신의 화신이지. (…) 영화는 사실 신의 기록, 혹은 신의 얼굴의 기록, 혹은 끝없이 변하는 신의 얼굴의 기록과 같은 거야.”
“할리우드는 영화를 스토리텔링의 매체로 만들려 하지. 어리석은 짓이야. 영화는 스크립트에 기초한 게 아니거든.” 대화는 트뤼포의 이론으로 이어진다. “최고의 스크립트가 최고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야. 최고의 스크립트는 사람을 문학적 서사의 노예로 만들거든. 최고의 영화는 거기에 노예처럼 매여 있지 않아. 영화에 서사가 있는 것은 그저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야. 노래의 가사가 노래를 만드는 건 아니잖아. 영화는 순간에서 나와야 해. 성스러운 순간.”
영화에서 이 대화는 영화 속 극장의 스크린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액자구조가 영화의 안과 밖을 뒤집어놓는다. 프레임 안의 인물이 프레임 밖의 세계(=링클레이터의 영화)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바쟁은 사진을 “초현실주의 예술의 탁월한 매체”로 꼽았다. 초현실주의는 ‘웨이킹 라이프’ 속 현실의 원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웨이킹 라이프’의 서사는 트뤼포가 강조하듯이 전통적 스토리텔링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속 영화가 영화 밖 영화를 지시하는 셈이다.
객관적 리얼리티
바쟁은 영화의 존재론을 대상의 존재에서 찾았다. 하지만 디지털은 바로 그 지표성을 지워버린다. 트뤼포가 말하는 ‘성스러운 순간’은 캐릭터의 존재와 체험으로의 몰입을 가리킨다. 하지만 로토스코프는 캐릭터의 존재를 그래픽 뒤로 사라지게 만든다. 바쟁은 디프 포커스(deep focus)로 잡은 ‘객관적 리얼리티’를 선호하나 디지털은 그저 픽셀의 평면, 워홀의 실크 스크린 같은 피상성에 그 본질이 있다. 그런데도 링클레이터를 바쟁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바쟁의 리얼리즘은 사실적 모사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사진의 지표성은 퍼스보다는 들뢰즈의 것에 가깝다. 사진은 존재의 기호가 아니라, “존재의 일부”다. “사진은 자연적 피조물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는 것이다.” 그것은 재현의 인식론이 아니라, 이미 생성의 존재론에 속한다. 그런데 바쟁이 사진에 부여했던 그 특권을,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에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의 바쟁도 가능하지 않을까?
“모든 이미지는 대상으로, 모든 대상은 이미지로 지각되어야 한다.”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의 논리적 구별은 사라지고 있다.” “동시에 참이 되는 환각.” 이 모두는 바쟁이 회화와 대비 속에서 ‘사진의 존재론’으로 꼽은 특성들이다. ‘웨이킹 라이프’ 속의 현실은 바쟁이 말한 사진의 존재론으로 구성된 세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특성들을 오늘날 우리는 아날로그 사진과 대립되는 디지털 세계의 특성으로 꼽고 있다. 재미있지 않은가?
영화는 세계를 이제까지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게 해준다. 그리하여 바쟁에게 영화는 “신의 계시”다. 주인공이 이미 죽었을지 모른다는 급작스런 깨달음은 실제로 신의 출현을 보는 것만큼이나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계시는 정작 따로 있다. 관객은 ‘주인공이 이미 죽었는지’를 물을 게 아니라, ‘혹시 내가 이미 죽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웨이킹 라이프. 깨어나야 할 것은 꿈이 아니라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