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윤철] “애초에 이류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2008-01-3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오계옥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의 정윤철 감독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114분으로 완성되어 첫 공식 시사회를 열었다. 그러고 나서 듣자하니 이틀 만에 102분으로 줄었다. 자극과 고민이 없었다면 쉽게 단행할 만한 일이 아니다. 창작자 입장에서 이 마지막 작업은 그야말로 애간장을 태우는 일일 것이다. 정윤철 감독은 잠시 식사를 하는 사이에도 취재진에게 “에필로그가 좀 길던가, 어떻던가?” “환상장면은 어때 보였나?” “좀 늘어지는 것 같던가?” 등등 의견을 물었다. 오늘 밤이라도 또다시 어딘가 손을 볼 태세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다시 작업실로 달려갔다. 설날에 개봉일자를 맞추고 달려온 이번 영화가 확실히 촉박하게 진행됐다는 느낌은 있다. 하지만 충무로 슈퍼맨 계열에 이름을 올릴 만큼 에너지 넘치는 정윤철 감독이 아닌가. 그는 민감할 만한 질문에도 “이류영화” 슬로건을 걸고 넉살 좋게 눙을 치는 여유를 보였다. 아직 결전의 힘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그 힘을 쏟아붓고 있는 그를 만났다.

-다시 손을 보는 중이라고 들었다.
=슛 들어간 지 3개월8일 만에 개봉하는 거다. 두달 만에 촬영 끝낼 때까지는 나도 슈퍼맨이 되는가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후반작업은 혼자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지금은 아, 나도 인간이구나 새삼 깨닫고 있다.

-시간을 많이 줄였다고.
=아직 모른다, 다시 또 좀 늘어날지도. 하여간 촬영을 급하게 할수록 후반작업은 길게 해야 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슈퍼맨이 아닌 나 같은 인간들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어떤 부분을 손본 건가.
=에필로그. 반복되는 느낌이 좀 있어서. 슈퍼맨의 마지막 임무 수행이 워낙 강렬한데, 디저트에 해당하는 에필로그가 꼭 필요할까 하는 생각에서.

-처음에 이 프로젝트는 제안받은 건가.
=그렇다. 원래는 다른 감독이 준비했던 거다. 처음에는 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나도 거부하고 싶었다. 자신이 슈퍼맨임을 거부하고 싶었듯이. 착하고 뻔한 영화라고 생각돼서 처음에는 싫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게 내 운명임을 깨달았다. 사실 이 영화는 진짜 착한 사람 이야기 아닌가. 갈등이 있기도 힘들고,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잔소리 같은 이야기고. 과연 나 자신도 그런 걸 믿는 건지 잘 모르겠고. 착한 일을 하면 내게 돌아오고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그런 것.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착한 이야기가 아니고 용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가 없으면 남을 도울 수도 없고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건 돈까지 다 준비됐다는데!!!

-첫 공식 시사회 무대 인사 때 쑥스러운 포즈로 한쪽 손을 치켜들고 슈퍼맨처럼 ‘SAVE THE EARTH!! CHANGE THE FUTURE!’라고 외치지 않았나. 그냥 호객용 퍼포먼스는 아니었을 테고, 본인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과 연관된 것이었을 텐데.
=물론이다. 영화는 재미가 전제되어야겠지만, 이 영화는 지금 시기에 꼭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빠듯한 일정에도 만든 거고. 북극은 하루가 다르게 녹고 있고, 조스가 나타나고, 한반도가 열대지방이 되고 있고, 사람들 마음은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은 점점 더 옅어지고 있다. 그런 시기에 사는 미친놈의 이야기 아닌가. 내 자신이 어떤 영화보다 영화 속 캐릭터들에 몰입해서 찍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단순히 슈퍼맨(황정민)에게만 몰입한 건 아니고 수정(전지현)에게도 몰입됐다. 두 사람 다 결국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이기적인 면모와 이타적인 면모 아닌가. 지킬 앤드 하이드처럼 동시에 존재하는 인물이고. 이 영화의 뻔뻔하고 노골적인 메시지에 웬 공익광고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진심은 통할 수 있다고 본다.

-각본에 꽤 많은 사람의 이름이 올라 있던데. 이번 영화의 각본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초고를 쓰고 많은 분들이 달려들어서 함께 각색을 했다. 집단 시스템으로 만든 영화다. 내가 맡으면서 크립토나이트(영화의 주인공 슈퍼맨은 자기 머릿속에 크립토나이트라는 이물질이 박혀 있다고 믿고 있고 그 비밀은 후반부에 밝혀진다), 환경에 대한 관심, 슈퍼맨의 어린 시절 등이 첨가됐다. 좋게 말하면 이야기가 풍성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방만해졌다.

-어쩌면 대중영화의 화법으로 풀어내기에 그다지 쉬운 소재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영화의 전체 구조에 어떤 주안점을 뒀나.
=원작에는 아예 수정의 존재가 없다. 학교 앞에서 미친 짓을 하고 다니던 광인에 대한 기록이 원작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슈퍼맨 원작에서처럼 슈퍼맨과 루이스의 관계로 풀어내려고 했고, 한편 인간극장처럼 풀어가려고도 했다. 앞부분은 수정이 슈퍼맨을 취재하면서 두 사람이 친해지는 과정이고, 뒷부분은 슈퍼맨의 과거를 밝혀내는 과정이다.

-방송다큐인 <인간극장>식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등장시켜 끌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그 프로그램에 대한 야유인 것처럼 보였으나 곧 깊은 공감인 걸 알게 됐다.
=이 영화 자체가 <인간극장>류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이 영화의 슈퍼맨 같은 사람이 <인간극장>의 주인공이 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에서 출발했으니까. 실제로 이런 사람이 <인간극장>에 나온다면 시청률이 높았을 것도 같고, 감동적이기도 했을 거니까.

-시사하고 나서의 반응들을 많이 수렴하나.
=그런 편이다. 그게 꼭 좋은 건 아닌 것도 같지만.

-일장일단이 있나.
=충분한 시간이 없으면 내가 원하는 것과 관객이 원하는 것을 절충한다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 애초에 이 영화를 할 때 나는 이류영화를 하고 싶었다. 해외에서 호평받는 영화와 감독들도 있어야겠지. 하지만 그런 일류영화와 금방 잊혀지는 삼류영화 사이에 있는 이류영화들이 충무로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감독이 야심을 버리고 만들고 관객은 보고 재미있어하고 오래 기억하는 그런 영화.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오래 남는 그런 영화들이 있지 않나. 그런 영화들이 많이 나올 때 한국영화의 위기도 극복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뻔한 소재이지만 관객이 재미있게 보면서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하나쯤 갖고 가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가 좀 일류로 나온 것 같다. (웃음) 어려워하는 것 같다.

-어떤 점이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하나.
=광인의 판타지와 현실을 오가는데 그걸 좀 어렵게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들 때 어린이나 청소년들도 볼 수 있는 전체 관람가 영화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나의 미래는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이 영화도 좀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본다.

-그 환상과 현실의 교차가 흥미로웠다. 꼭 등급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던데.
=그렇지. 어차피 이건 돈키호테 같은 이야기다. 풍차에 뛰어드는 돈키호테처럼 슈퍼맨이 자기의 망상 속에서 세상의 적들과 싸우고 세상을 구하려는 걸 영화적으로 보여줘야 했다.

-그 망상을 보여준다는 건 고심이 따랐을 부분이다.
=그런 게 힘들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잘 받아들이지만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판타지나 상상의 세계를 풀어내면 잘 믿지 않는다. 한국인이 하늘을 난다는 상상을 잘 안 하려 하니까. 하지만 한국 최초의 우주인도 나오는 마당에 상상의 지평이 좀 넓어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영화는 환상과 현실을 엮는 데 효과적이지 않나. <말아톤>에서도 초원이가 자신이 살아왔던 공간을 달리고, 세렝게티 초원에서 얼룩말과 달리는데 나도 그 장면을 좋아했고 좋아해준 분들도 많았다.

-영화 속 슈퍼맨이 신이 나면 하는 재미난 동작 있지 않나? 꼭 이주일 춤 같은. 그건 어떻게 고안해낸 건가.
=저 사람이 신이 나면 뭘 할까 생각해본 거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뭘 할까 하고 생각해봤더니 그 나이 또래가 어린 시절엔 이주일 춤을 보았을 것 같았다. <화려한 휴가>에도 나오듯이 80년대의 기억 같은 거다. 그리고 이 사람이 슈퍼맨이었을 때는 아이로 돌아간 것이니까 아빠가 살아 있던 그 당시의 기억 속에서 뭔가 할 것 같았다.

-영화에서 슈퍼맨은 화재가 난 건물에 물 젖은 망토를 둘러쓰고 들어가 소녀를 구한다. 여기서 어쩌면 화재가 아니라 슈퍼맨이 망토를 쓴다는 특징을 먼저 고려한 설정 아니었나 싶다.
=망토도 원인 중 하나다. 하지만 불이 났을 때 가장 인간이 한계를 느끼지 않나 싶었다. 영화에서 백을 세면 슈퍼맨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나. 슈퍼맨의 아버지가 소방관이었다는 설정도 있었다. 아버지가 백까지 세면서 불 속으로 들어간다는 그런 것.

-불길 속으로 뛰어들기 전 슈퍼맨이 송수정을 설득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는 어딘가 좀 심하게 지연된다는 느낌이다.
=그렇긴 하다. 인정한다. 하지만 뭐 전쟁터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할 말은 하니까. 리얼리티 면에서는 빨리 뛰어들어야겠지만, 내게는 슈퍼맨이 용기를 얻고 다시 갈 수 있는 어떤 점화장치의 순간이 필요했다. 그게 현실적으로는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 자체가 그 순간에는 바로 뛰어들지 못할 상태였다. 머리 깎인 삼손이 용기를 다시 얻는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슈퍼맨이 자신을 되찾는 과정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사고가 크든 작든 다른 사람은 하지 못하는 것을 이 사람이 한다는 것에 포커스를 두고 싶었다.

-영화를 같이 본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무서운 깡패가 아니라 불이 난 건데 정말 사람들이 그렇게 한명도 안 도와줬을까?”라고. 그걸 내 식대로 이해하자면, 이 영화가 주인공 슈퍼맨을 칭송하기 위해 나머지 사람들을 지나치게 악인으로 만드는 면모가 있지 않느냐는 말로 들렸다.
=화재가 영화에서 더 무섭게 표현이 안 됐을 수는 있겠다. 그건 묘사의 문제다. 하지만 실제 화재 순간에서는 부모, 핏줄 외에는 누구도 뛰어들기 힘든 것 같다. 공포감이 심하니까. 사람들이 진짜 도와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폭발할 것 같으니까. 서해대교 때도 다섯명을 구한 사람에게 슈퍼맨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나.

-일부러 끝날 것 같지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후반부를 구성했다.
=아마 슈퍼맨 캐릭터가 생각보다 복잡한 과거가 있어서 그럴 거다. 이야기가 매끄럽지는 않다. 그리고 직선적이지도 않고.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많은 이야기들이 포개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많이 차려주고 골라서 드시라는 느낌을 생각했다.

-슈퍼맨의 비밀은 광주까지 올라간다.
=머릿속에 박힌 크립토나이트가 왜 박혔는가 하는 것이 필요했다. 슈퍼맨이 가장 필요했던 곳이기도 했고. <슈퍼맨>이 한국에서 79년에 개봉했으니까 그 다음해이기도 했고. 또 용기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한 때이기도 했고. 슈퍼맨의 아버지가 살아 있는 시점이기도 하고. 아버지 같은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도 용기있게 살아보려고 노력하게 되지 않나 싶었다. 선천적으로 착하게 태어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과거의 출발점이 있어서 우리에게도 용기가 생긴다고 할까. 선행과 용기는 계승된다는 그런 거.

-전반적으로 음악의 느낌이 좋다. 어떤 느낌을 요구했나.
=<슈퍼맨> 음악을 쓰고 싶었지만, 10억원 정도 부른다고 하더라. 그리고 10억원을 준다고 해도 잘 안 판다고 하더라. 뭐, (작곡가인) 존 윌리엄스에게 편지를 써보려는 생각도 해봤지만(웃음),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해서 꼭 같은 음악까지 써야 하나. 굳이 안 써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한국의 슈퍼맨이니까. 좀 뽕짝 느낌이 나는, 그리고 따뜻한 느낌이 나는 걸 생각했다. 친구 같은 동네 슈퍼맨이니까 서정적인 느낌으로.

-그런데 음악이 너무 만병통치약으로 쓰이는 것 같다.
=이류영화의 강박 때문에 연결이 안 되면 음악으로 발랐다. 노골적으로 감정을 올리기 위해 음악을 쓴 부분이 있다고 고백한다.

-아니 이렇게 쉽게 고백할 줄이야.
=이류 감독은 그런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좌중 웃음) (다시 정색하며) 대중음악을 만들겠다는 느낌으로 음악을 생각했다. <좋지 아니한가>는 재즈 같은 애드리브와 즉흥연주가 돋보이는 것이었다면 이 영화의 음악은 대중가요를 쓰듯이 하고 싶었다.

-반 농담으로 물어보는 거지만, 만약 본인이 슈퍼맨이라고 치자. 뭘 가장 하고 싶나.
=태안반도로 내려가서 유조선 구멍을 막아버리고 싶다.

-올해도 <씨네21> 한주 편집장 해볼 생각 없나.
=음… 그때는 <좋지 아니한가>가 장사가 잘 안 돼서 남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던 차에 했던 건데…. 이번에도 잘 안 되면? 아니 농담이다. 평론가들과 깊이있게 이야기하면서 친구도 됐다. 하지만 감독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지금은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인정하려고 한다. 영화에 대한 철저한 자신들의 세계가 다 있더라. 한편으론 감독 이상으로 영화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됐고. <좋지 아니한가>의 주제처럼 어차피 이해란 안 되니까 있는 모습으로 그냥 인정하자고 생각하게 된 거다.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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