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식인축제의 악마적 활력
2008-02-14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팀 버튼의 가장 불균질한 영화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팀 버튼의 주인공들은 종종 자신을 추방한 곳으로 돌아왔으며 스위니 토드 또한 그러하다. 이번에는 그의 페르소나 조니 뎁이 노래하는 연쇄살인범으로 돌아왔다. 뮤지컬과 슬래셔의 위태로운 결합. 뮤지컬의 신명이 연쇄살인의 잔혹함과 만날 수 있을까.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 신통하게도 팀 버튼은 그것을 해낸다.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이하 <스위니 토드>)는 유례없는 장르의 실험이며, 그것만으로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나는 몇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도입부부터 뜻밖이다. 이발사 스위니 토드는 15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온다. 아름다운 아내와 딸과 더불어 더없이 행복했던, 그러나 아내를 탐한 사악한 터핀 판사가 그 둘을 앗아가고 자신을 추방한 곳. 돌아와보니 아내는 죽은 것으로 알려졌고, 터핀은 스위니의 딸을 수양딸로 입양한 뒤 이제 그녀와 결혼하려 한다. 한없이 사악한 권력자를 향한 더없이 순박한 주인공의 복수와 반란. 갈 길이 처음부터 너무도 자명해 꼼짝할 수 없을 듯한 이곳에서 팀 버튼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팀 버튼의 전작들에선 볼 수 없었던 수상쩍은 대립항도 등장한다. 회상신에서 15년 전 스위니 토드의 가정은 화사한 광선과 행복한 웃음과 풍요로운 사랑으로 가득한 완전한 세상이다. 되돌아온 런던은 햇빛이 사라지고 창녀와 오물과 습기와 벌레로 가득 찬 곳이다. 이 모든 것은 터핀이라는 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완전하고 선한 과거와 불완전하고 추악한 현재, 그리고 그 전락의 명백한 외적 기원으로서의 악인. 나는 이 진부한 설정을 팀 버튼의 것이라고 믿기 힘들다.

펭귄맨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지하의 하수구에서 평생을 살았으며, 배트맨은 모성이 부재한 동굴의 어둠 속에서 홀로 성장했다. 가위손 에드워드는 과대망상증 과학자의 불행한 발명으로 태어났다. 어둠은 그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며, 그리워하거나 회복해야 할 완전한 과거는 처음부터 없었다. 죽음이 삶만큼 친근해지고, 유령이 인간과 유희를 벌이며, 공포와 유머가 어깨를 겯고, 크리스마스 파티와 할로윈 축제가 함께 벌어지는 팀 버튼의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식인축제를 즐길뿐 복수는 망각해도 좋아

그런데 팀 버튼은 <스위니 토드>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이끌고 왜 이 뻔한 곳에 온 것일까. 서사 밖에서 가진 이 의문은 보류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팀 버튼은 이 진부한 서사의 동굴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출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는 예상한 길을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길에는 이상한 표지판이 등장하고 미심쩍은 생략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다음부터는 스포일러입니다.)

왜 스위니 토드는 아내와 딸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15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녀가 미친 여자가 되어 있었다 해도, 그녀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버린 이 남자는 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아내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또한 자신을 지옥 같은 감옥에서 버티게 한 또 다른 존재의 이유인 그녀의 딸을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결말부에 등장하는 이 영화의 가장 끔찍한 장면. 그토록 그리워하던 세 인물이 한 공간에 다시 모인 단 한번의 순간, 아내와 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발사는 딸을 궤짝에 다시 가두고, 아내를 살해한다.

물론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 비극적 아이러니를 겨냥한 서사의 설계라면 그럴 수 있다.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 월터와 그의 딸(<사랑과 슬픔의 여로>), 오대수와 그의 딸(<올드보이>)은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성교한다. 그러나 <스위니 토드>의 오인과 그로 인한 아내 살해(근친상간보다 훨씬 혹독한)는 이상할 만큼 비극적 울림이 약하다. 여기엔 묘사의 부족이 아닌 다른 경위가 있다.

터핀이 우연히 제 발로 이발소에 찾아왔을 때, 스위니 토드는 잔인한 미소를 띠며 살해를 준비한다. 그러나 안소니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산통이 깨지자, 스위니 토드는 “그는 다시 오지 않을 거야”라며 자포자기의 표정을 짓는다. 그는 마치 복수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정말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아내를 강간해 죽음으로 내몰았고 딸까지 강탈했으며 자신을 15년간 감금한 악인을 이제 잊겠다는 뜻일까.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는 이제 거리로 눈을 돌리며 비루한 행인들을 독기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파이가게 주인 러빗에게 이렇게 노래한다. “모두 죽어 마땅해. 러빗 여사, 이유를 말해주지, 이유를. 인간이란 종족에는 오직 두 종류만 있지. 합당한 자리에 서 있는 인간, 그리고 남의 얼굴을 밟고 서 있는 인간. 나를 봐, 그리고 당신을 봐, 러빗 여사. 이건 아니지. 모두 죽어야 돼. 당신도, 그리고 나도.” 그는 이제 무차별 살인을 시작할 것이다.

자신이 준비하지도 않은 복수의 기회가 무산되자, 그는 마치 복수의 실패를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복수의 계획을 준비하기는커녕 아예 그것을 잊어버린 표정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무엇보다 이상한 점은 원수가 강탈한 딸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스위니 토드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일까. 나는 이 대목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위니의 복수의 포기를 거치면서 이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식인축제로 탈바꿈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왜 복수를 갑자기 중단한 것일까. 다르게 말하면 왜 복수의 이름으로 엉뚱한 행동을 시작하는가. 복수는 맥거핀일까. 그런 혐의가 있지만 사태는 좀더 복잡한 것 같다. 스위니 토드는 지금 자신을 오인하고 있다. 아내와 딸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고 말하지만, 그는 터핀에 대한 복수를 위해 헌신한 적이 없으며, 딸을 되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순박한 청년 안소니가 그에게 딸을 구출할 계획이라고 말할 때에, 그제야 그것을 빌미로 터핀을 다시 불러들이는 계획을 세울 뿐, 정신병원에 갇힌 딸을 한순간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적어도 지금은 그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거의 잊었다.

스위니 토드가 왜 아내와 딸을 알아보지 못했는가에 대한 1차적인 대답은 그의 망각이다. 그는 복수가 아니라 식인축제를 위해 이곳에 왔다. 이 영화의 가장 활달하고 매혹적인 대목은 스위니 토드가 살해하고, 러빗이 요리하며, 민중이 몰려와 인육 파이를 게걸스럽게 먹는 교차편집 장면들이다. 스위니는 면도칼을 춤추듯 휘두르며 손님의 목을 따고 명랑하게 노래한다.

이 서사 안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악인은 터핀밖에 없다. 더 찾자면 터핀이 파티장에서 스위니의 아내를 강간했을 때, 그것을 말리지 않고 구경한 상류층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위니는 지금 악인을 처단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연고가 없는 불행한 사람만 골라 생기 넘치는 동작과 노래를 곁들여 맛있는 고기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그의 연쇄살인을 동기화하는 건 세상에 대한 우격다짐의 증오뿐이다.

나는 지금 개인적 복수심에서 세상에 대한 눈먼 원한으로 비약한 과정의 상황과 심리 묘사가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 묘사가 충실했다면, 그러니까 불행한 민중의 시체로 파이를 만드는 주인공의 행위가 심리적으로 정당화되었다면 오히려 이 영화는 매우 사악해졌을 것이다. 팀 버튼은 그리움과 복수심에 불타는 주인공을 불러놓고 갑자기 그것을 인간에 대한 무차별적 증오로 바꿔치기한다. 양자는 연속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스위니가 복수를 중단하는 이유는 서사 안에서 해명되지 않는다.

그 바꿔치기의 순간, 팀 버튼은 설명을 포기하며 그것을 서사의 결함으로 남겨놓는다. 그것이 팀 버튼의 선택인지 실수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구원될 수 있다면 그건 그 포기 때문이며, 그 포기에 담긴 무기력 때문이다. 원인을 잊고 미치광이처럼 질주하는 결과 앞에서 할 말을 잊은 이야기꾼의 무기력. 실은 스위니는 런던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원인으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 있다. 그는 귀환 길에 동행한 안소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거대한 구덩이 같은 구멍이 있지. 똥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곳, 세상의 해충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

관객과의 공모를 배신한 결말

불만스러운 점은 오히려 결말에 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내가 미친 여자로 돌아와 그의 면도칼에 죽는다. 뒤늦게 아내임을 알아챈 스위니가 아내의 시체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때 떠돌이 아이가 그를 죽여버린다. 식인축제의 제사장이 축제를 반성하고, 반성하는 순간 징벌된다. 어두운 멜로드라마에서 급작스럽게 쾌활한 카니발리즘으로 전환했던 영화가 다시 비장한 멜로드라마로 돌아온다.

이 장면의 아이러니는 남편이 미친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이 미친 여자야말로 전형적인 광인/예언자로서, 이 더러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은밀한 식인축제를 감지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멜로드라마에서 절대사랑이었던 대상이, 식인축제에선 적의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그가 아내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사적으로는 망각이지만, 서사상으로는 식인축제의 활력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녀는 두 가지 이유로 죽어야 한다. 원인/사랑의 이름으로.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달려가는 결과/폭력의 쾌락 앞에 나타난 실체로서의 원인/사랑은 본질적으로 불편한 존재다. 또한 결과/폭력의 정체를 알고 있고 그것의 질주를 물리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존재다.

달리 말하면 스위니의 망각과 아내 살해는 카니발리즘 혹은 슬래셔의 어둠에 매혹된 관객과의 공모다. 그러므로 이 결말의 비극은 슬픈 만큼 난처하다. 스위니가 떠돌이 아이에 의해 죽는 것은 이 난처함을 모면하려는 도덕적 위장이다. 팀 버튼은 한편으로는 사랑과 행복의 가족이라는 상투적 기원을 설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을 자신의 영화에서 가장 악한 지점까지 밀고 가면서 은밀하게 그 기원으로부터 이탈시킨다. 그리고 결말에서, 양자를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결말로 봉합한다. 내가 동의하기 힘든 것은 그 봉합이 실패한 게 아니라 거의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봉합이 성공적일수록 스위니의 살인행각, 그것의 악마적 활력은 그 비극의 효과 아래로 숨어버리고, 윤리적 질문은 회피된다.

<스위니 토드>는 팀 버튼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불균질한 영화다. 그 불균질성 혹은 서사의 불연속성에 담긴 무기력과 불안은 동시대적 징후일 것이다. 위장의 결말에도 불구하고 <스위니 토드>는 어쩔 수 없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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