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19일 오후 4시, 307석 규모의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 1관이 관객으로 가득 찼다. <씨네21>과 영상자료원, 그리고 이동진 블로그를 통해 올해 영상자료원의 ‘다시보기REPLAY’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10년간의 개봉작 중 다시 보고 싶은 영화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그중 1위가 <지구를 지켜라!>였다. 개봉 당시 ‘저주받은 걸작’ 반열에 오르며 극장가에서 사라졌던 영화를 스크린으로 다시 만나기 위해 관객은 객석을 메웠고, 장준환 감독은 물론 배우 백윤식, 신하균, <지구를 지켜라!>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가 영화 상영 뒤 무대에 올랐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사회로 이뤄진 관객과의 대화는 1시간30분가량 이어졌고, 이들 모두는 ‘후회는 없다’는 행복감으로 5년 전을 회고했다. 배우 문소리 역시 장준환 감독의 부인이자 관객으로 객석을 지켰고, 각자가 소중하게 소장한 DVD에 사인을 받으려는 인파로 정해진 행사가 끝난 뒤에도 참석자 모두는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새해 첫 번째 ‘다시보기REPLAY’의 열기를 담아 대화의 전문을 지상중계한다.
이동진: 5년 만에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본 감회가 궁금하다.
장준환: 배우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웃음) 영화를 만들면서 너무 진을 많이 빼서 개봉 때는 그저 홀가분했다. 시사회 반응도 굉장히 좋았는데, 개봉 1주일 만에 극장에서 다 내린다는 거다. (웃음) 스크린에서 다시 못 본다는 게 너무 아까워서 혼자 표를 끊고 10명 정도의 관객과 함께 영화를 봤다. 5년이 흐르도록 이렇게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니 너무 감사하다.
이동진: 김어준 총수는 이 영화의 굉장한 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소감이 어땠나.
김어준: 이 영화는 포스터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포스터였다. (웃음) 도저히 영화를 예상할 수 없는 포스터가 영화의 충격을 강화해준 덕분에 저주받은 걸작이 된 게 아닐까. 얼마 전에 포스터를 다시 봤더니, 마치 “흥행 따위 상관없어” 같은 관조의 느낌이 드는데, 그게 영화와 잘 어울리더라. (웃음)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처럼 사회화에 실패한 감독이 주류 자본으로 영화를 찍는 한국사회는 진정한 명랑사회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권력에 대한 영화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맘대로 뭔가를 본다. 그런데 그 보는 방법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이를테면 삼성이 잘못되면 우리나라 자체가 잘못될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삼성에 유리한 게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개인들이 믿게 만드는 것, 이게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항상 권력과 싸우기 전에 대중과 먼저 싸워야 한다. 병구도 외계인 이전에 형사와 싸우고, 자신을 미친놈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싸워야 했다.
이동진: 백윤식씨가 연기한 강 사장은 한국영화에서 전무후무한 캐릭터였다. 개인적으로도 이 영화의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백윤식: 젊은 시절 3편 정도의 영화에 출연한 뒤, 영화쪽으로는 공백기였다. <불후의 명작>에 작은 역으로 출연했고, 대망의 <지구를 지켜라!>를 만났다. 시나리오를 보니까…(웃음) 내가 적은 나이도 아닌데, 꼭 이렇게 고난의 길을 갈 건 없잖나, 싶었지만 또 당시에 그렇게 특색있는 시나리오가 없었으니 덤벼보고 싶은 맘이 컸다. 최선을 다하면 관객의 사랑을 받을 줄 알았다. (웃음)
상상력의 극단을 보여주는 영화
이동진: 강 사장과 병구의 격투신에서 신하균씨가 촬영 중간에도 계속 백 선생님을 째려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웃음) 신하균씨의 연기 몰입도를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신하균: 사실이긴 하다. (웃음)
백윤식: 악마야, 악마. (웃음) 마지막 장면을 1주일가량 찍었는데 컷을 불렀는데도 계속 나를 놓질 않더라.
신하균: 그 영화는 나의 20대 마지막 작품인데, 돌이켜보면 에너지가 넘친 시기 같다. 맨 정신으로 하기엔 참 어려운 영화였다. (웃음)
이동진: 상상력의 극단까지 가는 영화다. 주인공은 죽고, 지구는 사라지고. 게다가 당시 제작사 싸이더스는 국내 굴지의 제작사로 제작비가 적은 편도 아니었는데, 기어이 저런 엔딩을 만들기까지 타협을 종용당하지 않았나.
장준환: 지구가 폭파되고 다큐멘터리 느낌의 병구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다. 당시 나는 상당히 용감했고, 내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건 관객도 그럴 거라고 확신했는데, 굉장히 공격적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는 유하다가 결말을 바꾸자는 식의 얘기만 나오면 표정이 차가워지니까 다들 말을 않더라. (웃음) 그런 면에서 제작자에게도 감사한다.
이동진: 백윤식씨는 하트무늬 팬티도 입고, 육박전도 치르고, 위험한 순간도 많았을 것 같다.
백윤식: 공백기가 길어선지 오랜만에 영화를 찍게 되니 프리단계부터 한국영화가 많이 업그레이드돼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영화를 찍을 때도 안전장치가 어느 정도 수준에는 이르렀을 줄 알았다. (좌중 웃음) 근데 점입가경이더라. “아니, 이런 게 왜 이렇게 낙후돼 있어”, 그러면 스탭들은 “이게 첫 시도라서 그렇다”고 대답하고. (좌중 웃음) 예를 들어 강 사장이 전기에 감전돼서 날아갔다가 떨어지면 마네킹이 내 위로 떨어지는 장면 같은 거. 손톱이 젖혀지는 정도의 부상이 너무 많았다.
이동진: 혹시 감독님, 그때 그 팬티는 직접 착용하던 것 아니었나요.
장준환: 일단 결혼 뒤에는 그런 적 없다. (웃음) 시나리오를 쓸 때 의상은 크게 생각 안 했었다. 그냥 용무늬 정도의 팬티가 어떨까 싶었는데, 막상 입어보니 느낌이 잘 안 나더라. 해외 판매 사이트를 뒤졌는데, 그 팬티는 밸런타인데이용이었다. 적당한 걸 고르는 게 꽤 어려웠다.
백윤식: 의상팀에서 촬영 끝나면 한벌 준다고 했는데, 끝나고 나선 없어졌다는 거다. (웃음) 그래서 한벌을 개인적으로 구입해서 생각나면 가끔 꺼내 입는다. (좌중 웃음)
이동진: 이 자리에 배우 문소리씨도 와 있다. 배우일 때 이 영화를 볼 때와 부인으로서 볼 때의 소감이 다를 것 같다.
문소리: <지구를 지켜라!>는 전주영화제 야외상영작으로 처음 봤는데, <넘버.3> 이후 가장 많이 웃으면서 본 영화였다. 결혼 뒤에는 DVD로 두번 봤는데 두 번째 볼 때는 호러영화 같았고, 세 번째 볼 때는 너무 슬퍼서 많이 울었다. 지구를 폭파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 사람이 이렇게 비관적인 사람인가, 그러고 보니 이메일 주소도 니힐이고, 이 사람을 계속 지구에서 살게 해야 할 텐데, 걱정하기도 했다. 오늘 다시 보니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 많다는 걸 느꼈다. 실제로 세상 누구도 불가능한 유머와 타이밍의 소유자다. 생각보다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웃음)
김어준: 문소리씨를 결혼하기 3달 전쯤인가 인터뷰했는데, 당시에 애인이 있다고 그랬었다. 7년이나 만난, 영화판에 있는 사람이라고. 대체 그게 누군지를 다섯번 가까이 물었는데 끝내 대답을 못 들었다. 그게 장준환 감독님이었나.
장준환: 아, 그건 제가 아닌 것 같은데. (좌중 웃음)
문소리: 정정하자면, 그때의 인터뷰는 2, 3월에 했고 결혼은 12월에 했다. 감독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웃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병구의 폭력성
관객1: 자신의 영화를 B급영화라고 생각하나.
장준환: 내가 생각하기에 B급영화란 메이저영화와 달리 저예산으로 별로 유명하지 않은 배우를 캐스팅하여 틈새를 공략하는 영화다. 그러다 보니 독특한 문법와 내러티브를 가지게 된 거고. 난 그런 영화를 많이 보진 못했고, 나름대로 메이저영화라고 생각했다. (웃음)
관객2: 영화가 모두 마음에 드나.
장준환: 영화에서 힘조절을 했으면 어떨까 싶은 잔잔한 아쉬움은 있다. 병구가 파스를 바르는 장면은 너무 느린데, 컷마다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모든 걸 너무 강조하니까 맥을 타지 못한달까. 그리고 벌에 쏘여 죽은 추 형사의 시체를 병구가 도끼질하는 장면은, 당시 병구가 너무 잔인하게 그려져서 캐릭터에 손실을 입힐까봐 결국 뺐는데, 아직도 갈등이 된다. 잔인해도 아름다운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고. 한번쯤 넣어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걸 다시 한다는 건 감당하기 어렵다. 이보다 훨씬 좋게 만들 자신은 없다.
관객3: 감독님의 전작을 봤는데, 이 작품을 이어서 보니 연상되는 게 많더라.
장준환: <2001 이매진>이 <지구를 지켜라!>의 작은 형 같은 느낌은 있다. 캐릭터나 세계관이.
관객4: 한국사회에서 미치지 않고 소외를 견디는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장준환: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나한테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냐고 물었지만, 사실 내가 한국사회의 집단적인 폭력성을 병구처럼 직접 부딪치며 상처받은 건 아녔다. 그냥 혼자서 작은 상처를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달까. 고통을 직접 당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보면서 동참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다시 고통스럽고. 어릴 때부터 “내가 왜 세상에 나왔지?”라는 생각을 계속했고, 끝까지 가져가야 할 화두 같다. 그걸 어떻게 견디느냐는… 노하우가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어찌보면 병구 역시 연쇄살인자 아닌가. 이 세상의 폭력을 나 자신도 가졌다고 느낄 때가 있다. 실제로 아주 사소한 일로 과격한 상상을 한다. 우리 안의 폭력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이런 인간, 나와 여러분이 살아갈 지구인데, 사는 동안 지구에 안 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거대한 물음표 같은 영화다.
관객5: 영감을 받은 영화가 있나.
장준환: 기본적으로 <미저리>를 보고나서 안타까웠던 부분이 반영됐다. 캐시 베이츠가 그냥 나쁜 여자로만 그려진 게 안타깝게 느껴졌고, 그녀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해서 일종의 패러디를 시도한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