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배트맨> -한준희 축구해설위원
2008-02-15
고담의 마천루에서 세상을 보다

대놓고 ‘초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초인적 활약을 펼치는 형사, 첩보원들이 인기를 누려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통상 우리는 ‘~맨’ 계열 영화에 그리 많이 열광해온 편은 아니다. 일찍이 우리가 ‘~맨’들을 접했던 방식도 이 계열 영화의 그저 그런 인기에 한몫하는 듯한데, 예를 들어 70년대 TV를 통해 비쳐진 원더우먼은 ‘희랍 신화 속 아마존 전사’가 아닌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던 ‘눈요깃감’의 이미지를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나에겐 어린 시절부터의 특별한 ‘맨’이 한명 존재한다. 80년을 전후해 평일 저녁 방영됐던 애니메이션 <배트맨>에 매료된 나는 다른 친구들이 일요일 <그레이트 마징가>에 열광하고 있을 시각, 과감하게 다른 채널의 <슈퍼특공대>(Super Friends)를 시청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그린랜턴(확신하건대 <바벨 2세>와 더불어 김청기의 <황금날개>에 영향을 끼친 캐릭터) 등 히어로들의 집결체인 슈퍼특공대 안에서 배트맨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더욱 흥미로운 캐릭터로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시절 애니메이션들에서의 배트맨은 프랭크 밀러의 극화 <Batman: The Dark Knight Returns>(1986)나 1989년 스크린에서 부활한 팀 버튼의 <배트맨>에 비해 훨씬 가벼운 페르소나로 그려졌지만, 그럼에도 버튼에 의해 가장 성공적으로 규명된 본질의 일부는 함축하고 있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vol.2>의 한 장면은 이 ‘본질’에 관한 얘기를 꺼내기에 적당한 출발점이다. 빌이 베아트릭스 키도(혹은 ‘블랙 맘바’, 혹은 플림튼씨의 ‘신부’)의 킬러 본능을 일깨우고자 연설을 늘어놓는다. “슈퍼히어로에겐 분신이 존재해. 배트맨은 사실 브루스 웨인이지. 스파이더 맨은 사실 피터 파커야. 그가 아침에 일어나면 그는 파커야. 스파이더 맨이 되려면 그는 코스튬을 착용해야 해. 하지만 슈퍼맨은 특별하다고. 그는 슈퍼맨이 된 것이 아니야. 슈퍼맨은 슈퍼맨으로 태어난 거야. 슈퍼맨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슈퍼맨이지. 그의 분신은 클라크 켄트지만 그거야말로 코스튬일 뿐이야. 약하고 자신없고 겁 많은 켄트는 슈퍼맨이 인류와 섞여 살아가기 위한 코스튬이자 인류에 대한 슈퍼맨의 평가인 거지….”

그러나 이 전형적인 타란티노류의 장광설은 ‘슈퍼맨-배트맨 스펙트럼’에 대한 완벽한 혼동의 산물이다. 타란티노의 이해 혹은 의도가 뭐였든지 간에 친절한 빌씨의 연설은 틀렸다. 두 영웅의 유일한 공통점인 고아의 이력으로부터 출발해보자. 크립톤의 폭발로 부모를 여의고 지구에 도착한 칼-엘과 고담시 크라임 앨리에서 범죄자의 총에 부모를 잃은 브루스 웨인은 바로 그 순간부터 다른 길을 걷는다. 칼은 평화로운 농촌 스몰빌에서 법없이도 살 법한 켄트 부부의 따뜻한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며 자란다. 자신의 힘과 친부모의 뜻을 알게 되면서 ‘그들이 자신을 지구로 보냈던 이유’를 실천하며 살기로 다짐하지만, 스몰빌 보이의 심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한편 브루스는 악인이 들끓는 도시의 현실과 일찌감치 맞닥뜨린다. 소년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밤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악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불행이 다른 이들에게까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어선다. 세계의 험한 곳들을 찾아다니며 싸움의 기술과 지적 능력을 배양한다.

빌은 두 영웅의 ‘진정한 자아’를 혼동했다. 슈퍼맨의 진정한 자아는 슈퍼맨이 아니라 ‘클라크 켄트’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선량한 기자 클라크다. 그의 심장은 평정의 삶을 향해 뛴다. ‘고독의 요새’에서 크립톤을 그려보기도 하지만, 그보다 클라크의 당면한 꿈은 영원한 사랑 로이스 레인과 행복한 삶을 꾸리는 것이다. 반면 배트맨의 진정한 자아는 자체로 ‘배트맨’이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두뇌 회전 빠른 배트맨이다. 억만장자 플레이보이 노릇이야말로 그의 가면이다. 그는 고독하다. ‘적과 동지를 넘나드는’ 셀리나 카일(a.k.a. ‘캣우먼’), 여기자 비키 베일 등과의 로맨스가 존재하지만, 관계는 지속적일 수 없다. 배트맨의 운명은 오로지 고담의 안녕을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과업에 놓여 있는 까닭이다.

둘은 모든 측면에서 ‘스펙트럼’의 양극단이다. 전자는 최강의 외계인이요, 후자는 인간이다. 다만 후자는 고도로 훈련된 두뇌, 운동신경, 막대한 재산으로 싸운다. 전자는 두려울 것 없기에(‘크립토나이트’를 제외하면) 정면승부에 익숙하다. 반면 후자에겐 연구와 계획이 먼저다. 지피지기하지 않으면 위험한 까닭이다. 전자는 악당들에게조차 관용적이다. 하지만 후자는 적들을 무섭게 다룬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공포’가 매우 효과적인 무기임을 아는 까닭이다. 슈퍼맨이 ‘보이스카우트’(boy scout)라면 배트맨은 ‘사이코패스’(psychopath)다. 전자는 ‘꿈과 내일’을 상징하지만 후자는 ‘어둠과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나는 어둠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정의가 존재함을 믿는다.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풋볼위클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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