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다이아몬드> <대리석 인간> <철의 인간> 등 안제이 바이다의 걸작 영화들과 신성한 애니메이션의 장인 프레데릭 백의 박스 세트 등을 출시하고 있는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또 한편의 신작을 내놓았다. 폴커 슐뢴도르프의 <아홉째 날>이다. 폴커 슐뢴도르프는 무엇보다 우리에게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1979)을 영화화한 감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만약 이후에도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라면 <사랑과 슬픔의 여로>(1991)를 기억할 것이고, 최근까지도 그의 영화를 좇아온 사람이라면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렸던 폴커 슐뢴도르프의 마스터클래스와 그의 신작 <울잔>을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 <아홉째 날>은 2004년 발표작이며 그해 부산의 독일영화 특별전에서 상영된 바 있다.
차라리 죽음을 좇고 싶을 만큼 참혹한 짐승의 시간. 수용소에서의 생활이란 그런 것이리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대뜸 머리를 한대 얻어맞고 수용소에 끌려 들어가게 되는 앙리 크레머 신부. 그는 룩셈부르크 교단 출신으로 반나치운동을 이끌다 이곳 다하우 수용소에 잡혀 들어왔다. 신부들만을 따로 모아놓은 수용소 한켠에서 나치는 이들이 신앙심을 버리고 나치에 복종하도록 끊임없이 훈육한다. 어느 날 난데없이 석방 명령을 받은 크레머 신부. 하지만 알고 보니 그에게 주어진 건 석방이 아닌 9일간의 휴가. 나치는 꼿꼿한 룩셈부르크 주교를 자기들 편으로 돌리기 위해 명석함과 깊은 신앙으로 룩셈부르크 주교의 신임을 받았던 크레머 신부를 접선자로 이용하려 한다. 크레머 신부가 만약 중간에 도망간다면 수용소에 있는 룩셈부르크 출신 동료 신부들을 모두 죽일 것이고, 나치의 이 제안을 거절하거나 실패한다면 그는 수용소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아홉째 날이란 크레머 신부에게 유다가 되라며 나치가 내준 9일간의 고통스런 시간이다.
영화는 2차대전 중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한 신부가 일기를 써 출간한 것이 계기가 됐다. 폴커 슐뢴도르프는 형식적으로 큰 욕심을 내지 않는다. 차분하게 하루하루를 셈하며 아홉째 그 마지막 날까지 번민하고 고뇌해가는 크레머 신부의 행적을 따라간다. 그에게 밀려드는 죄책감 혹은 달콤한 배반이거나 공포스런 협박으로서의 제안들이 그의 심리적 고민들을 가중시킨다. 크레머 신부는 아홉째 날이 되기 전에 믿음을 부정할 것인가. 혹은 나치에 룩셈부르크를 파는 유다가 될 것인가. 크레머 신부는 가장 힘겹지만 가장 떳떳한 선택을 한다. 그로써 그는 현현하는 예수의 실천을 행하게 된다. 영화 본편 이외에 부록이 없는 것은 말할 나위 없는 부족함이지만 화질과 영상은 보기에 크게 무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