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거짓말이어도 괜찮아, 기분 좋게 속아줄게
2008-02-22
글 : 김현진 (칼럼니스트)
현실적이지 않은 사랑을 그렸으나 로맨틱코미디의 미덕을 충분히 발휘한 <마법에 걸린 사랑>

디즈니는 슈렉 일당의 짓궂은 몽둥이에 계속 얻어맞기만 하더니 오랜만에 느긋한 태도로 아직 죽지 않아, 하는 식으로 익숙한 코드와 발랄한 노래와 친근한 캐릭터들을 잔뜩 풀어놓은 <마법에 걸린 사랑>을 내놓았다. 물론 죽을 리가 없다. 디즈니가 팔아넘기는 상품들은 유구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팔리며 금강석처럼 견고한 상품은 진정한 사랑의 키스(true love’s kiss)를 해줄 내 짝을 찾기만 한다면 그와 같이 영원히 행복하리라는 꿈이다. 주인공 지젤은 이혼남이며 또 이혼 전문 변호사인 차가운 로버트에게 당신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녀가 어떻게 아느냐, 애인에게 노래를 불러줘서 알게 해주라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남자의 노래 따위, 술 마시다 간 어두컴컴한 노래방에서 몰래 숨겨 가지고 들어온 맥주캔을 쥐고서 듣기 십상이고 게다가 거기서 ‘오빠’가 불러주는 윤도현의 <사랑2> 같은 느끼한 노래를 들으며 아, 오빠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어, That’s how I know! 하고 감격할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있을 리가, 적어도 나는 아니다. 더 나아가 콘서트나 연극 같은 공연장에서 배우의 입을 빌리거나 스스로 직접 써온 편지라도 읽으며 그가 사랑을 고백하기라도 한다면- 해주지도 않겠지만-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랑>에서 에이미 애덤스가 갑자기 고래고래 노래를 시작할 때의 패트릭 뎀시가 부럽지 않을 만큼 죽도록 창피한 표정을 하고 그 즉시 공연장을 쏜살같이 뛰쳐나가버릴 것이 틀림없다. 어쩜, 저 남자는 저렇게 뼛속까지 대중일 수가 있지? 하고 속물스럽기 짝이 없는 핀잔까지 하면서. 그건 내가 삼청동의 분위기있는 레스토랑이나 멀리 서울 전경이 보이는 큰 창이 있는 바보다는 몇 발자국 더 나가서 종로통에 있는 선술집을 편하게 여기는 아저씨 같은 취향을 한 아가씨인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우리네 살아가는 현실이 지젤이 살아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이역만리 떨어진(??) 지척에 있는 탓도 있다. 그 세계는 집안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끌어다 어젯밤 꿈에서 본 왕자님의 얼굴을 그려보며 진정이 담긴 키스 한방에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할 그 사람을 알아보고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질 거라 믿는 곳, 그리고 맨홀 너머 여기는 하룻밤 같이 자봐도 다음날 뻘쭘함에 다시는 그 사람과 마주치기 않기를 바라며 하필 그때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른 술기운 탓, 하필 그때 꽂힌 필 탓을 하기가 일쑤인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멋진 직업과 패션과 구두는 쏙 뺀 <섹스 & 시티>니까.

지젤 같은 이가 현실에 있다면 그의 연인은 꽤나 피곤할 것이다. 보통 순수는 무지에서 오는 법이고 운나쁘게 순수해서 무지하고 무지해서 순수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어쩔 수 없이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져줘야 하는 것이 현실이니까. 떼를 쓰는 자식에게 부모가 져주고 기어오르는 동생에게 언니가 져주고 새파란 후배에게 알면서도 선배가 한 걸음 져주는 것처럼, 사랑이며 연애는 더하니까. 못 받을 거 알면서 꿔주는 빚처럼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더 많이 내주게 마련이니까. 이 물신의 시대에는 어떤 이가 순수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끝내 다른 누군가가 착취당하고야 마는 것이 현실이니까. 작금과 같은 물신의 시대에서는 더하다. 부자 아빠 밑에서 곱게 자란 애들이 순한 경우가 많지 않던가. 이런 세상에서 온전히 제힘만으로 밥먹고 살면서 사람이 한없이 순수할 수 있다면 그건 엄청난 구도자이거나 지능이 좀 모자라거나 아예 전략적으로 그 길을 택한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가슴 큰 여자가 서울 한복판에 떨어져서 우왕좌왕하고 있다면, 머리에 쓰고 있던 티아러를 빼앗기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거라는 건 이렇게 여자가 많이 폭행당하고 죽어나가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조금 순진했다간 이내 잡혀먹히는 세상이니까.

그래도 뉴욕에 갓 떨어져 사람들에게 떠밀리는 지젤을 보며 저거, 곧 <나쁜 남자>의 조재현이라도 나타나서 냉큼 잡아가겠구먼, 하고 생각하는 나처럼 삐딱한 인간도 적어도 두 시간 동안 실없이라도 웃게 했으니 이것이 디즈니 역사의 저력이다. 매끈한 거짓말인 것을 다 아는데도 두 시간 동안 극장에 앉아 있는 동안은 속고 싶은 기분이 드는 이 기분. 거짓말도 역사와 전통과 기술이 있으면 경의를 표할 만한 것이 된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잘 만든 로맨틱코미디의 진정한 미덕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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