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복을 입은 한 사내가 정육면체의 방에서 깨어난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듯, 여섯면에 달린 문들을 하나씩 열어보다가, 용기를 내어 그중 하나를 통해 옆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의 풍경도 그가 방금 떠난 공간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큐브의 가운데로 몇 걸음 옮기는 순간, 사내의 몸을 치고 지나가는 짧은 금속성 굉음이 들린다. 사내의 얼굴에 빨간 줄이 생기고, 그 줄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뒤 사내의 몸은 마치 3D 입체 모델처럼 작은 조각들로 잘린 채 바닥으로 무너져내린다.
경험과 이성
영화는 그곳이 뭐하는 곳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사람들이 거기에 갇히게 되었는지 밝히지도 않는다. 모두 죄수복을 입었으나 이렇다 하게 죄를 지은 적이 없다. 어떤 이는 잠을 자다 끌려왔고, 어떤 이는 냉장고 문을 열다가 이 공간으로 빨려 들어왔다. 어떤 이는 이게 정부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다른 이는 어떤 사이코의 짓이라고 생각한다. 외벽을 디자인했다는 건축가만이 뭔가 아는 듯하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끝내 털어놓지 않는다. 상황은 이처럼 부조리하다.
그 부조리함의 감옥에서 인간이 믿을 것은 역시 자신의 정신밖에 없다. 큐브에 갇힌 이들에게 첫 희망은 가슴에 렌이라는 명찰을 단 사내였다. 이미 감옥에서 일곱번 탈옥한 경험이 있는 그는 경험을 통해 온갖 탐지기의 작동원리를 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그는 경험주의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험명제는 100% 확실한 게 아니어서 단 하나의 반례에도 무너지는 법. 홍채를 인식하는 센서는 렌의 경험 밖에 있었다. 그에 얼굴에 분사된 강한 산은 결국 그의 머리의 절반을 녹여버린다.
진리가 경험에서 나온다는 명제에 대립되는 철학적 입장이 바로 합리주의. 거기에 따르면 진리는 후천적 경험이 아니라 선천적 이성에서 나온다. 렌에 이어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는 것은 리븐이라는 소녀. 수학적 재능을 타고났다는 그녀는 이 부조리한 공간이 실은 철저하게 수학적 합리성으로 구축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제 우리는 안전해요. 소수, 소수예요.” 치명적인 덫이 숨어 있는 큐브들의 비밀은 숫자에 있었다. “소각로 방은 083 소수였어요. 분자생물학 방은 137. 산성 방은 149….”
큐브의 수학
감옥은 전체가 거대한 큐브 모양이다. 외벽을 지은 워스는 리븐에게 큐브의 규모를 말해준다. 리븐은 걸음으로 잰 방 길이를 기준으로, 전체 큐브가 모두 263=17,576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큐브와 외벽을 잇는 출구가 있다. 출구는 딱 하나라고 하므로 출구 노릇할 방을 하나 더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방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 자리를 바꾼다. 그러려면 큐브 내에 최소한 방 한칸의 빈 공간은 있어야 한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고로 방의 총 수는 x ? 263일 것이다.
리븐은 곧 각 방의 출입구에 적힌 세개의 숫자가 데카르트 좌표에서 x, y, z의 값을 표시한 암호임을 깨닫는다. 가령 영화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숫자 582, 484, 865를 예로 들어보자. 이를 디코딩하면, 5+8+2=15, 4+8+4=16, 8+6+5=19. 결국 그 방의 원래 좌표가 (15, 16, 19)라는 얘기다. 큐브는 가로·세로·높이 26개의 방으로 이루어지므로 좌표가 (15, 16, 19)인 방에서 큐브 밖으로 나가려면, x축으로 11개 혹은 y축으로 10개 아니면 z축으로 7개의 방을 통과해야 한다.
리븐은 제일 처음에 있던 방의 좌표 중에 27이라는 숫자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좌표가 방의 개수보다 클 수는 없다. 이는 그 방이 큐브의 내부가 아니라, 큐브와 외벽 사이의 공간에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리븐은 바로 그 방이야말로 큐브와 외벽을 이어주는 ‘다리’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다른 방으로 옮겨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방을 다시 찾는다 해도, 밖으로 나간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방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치환벡터
리븐은 거기서 규칙성을 읽어낸다. 비밀은 “치환”(permutation)에 있었다. 가령 영화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숫자 열을 예로 들어보자. 149, 419, 568의 각 자릿수를 합하면, 방의 원래 좌표 (14, 14, 19)가 나온다. 하지만 방은 늘 좌표가 지시하는 그 자리에 있지 않다. 움직이기 때문이다. 방의 원래 좌표를 얻는 데에 덧셈을 했다면, 이동한 방의 좌표를 디코딩하는 것은 뺄셈으로 한다. 자리마다 인접수를 차례로 빼나가는 것이다. 가령
149: 1-4=-3 | 4-9=-5 | 9-1=8
419: 4-1= 3 | 1-9=-8 | 9-4=5
568: 5-6=-1 | 6-8=-2 | 8-5=3
여기서 세로축을 따라 숫자들을 취하면, (-3, 3, 1), (-5,-8,-2), (8, 5, 3). 이것이 암호 속에 숨어 있는 치환벡터다. 이는 그 방이 원래의 좌표 (14, 14, 19)에서 xyz의 세축을 따라 각각 (-3, 3, 1)만큼, 거기서 다시 (-5,-8-2)만큼, 거기서 다시 (8, 5, 3)만큼 이동하도록 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원래 위치에서 세번 자리를 바꾼 방은 그럼 좌표상 어디에 위치하게 될까? 방의 원래 좌표에 차례로 치환벡터들을 더해 나가보자.
(14,14,19)+(-3,3,-1)=(11,17,18)
(11,17,18)+(-5,-8,-2)=(6, 9, 16)
(6, 9, 16) +(8, 5, 3) =(14,14,19)
세 번째 움직임에 좌표가 원래로 되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방에 적힌 숫자로부터 데카르트 좌표 위에 방이 차지할 수 있는 세개의 가능한 위치를 확정할 수 있다는 얘기. 그중에서 어느 게 원래 위치인지는 인접한 방들의 좌표와 비교함으로써 알아낼 수가 있다. 그 방이 원래 출발했던 제 위치에 있다면, 인접한 방들의 좌표가 그 방의 좌표와 ±1의 차이로 인접수를 이뤄야 할 것이다.
제곱수의 문제
영화에서 리븐은 처음에는 세 가지 숫자 중에서 소수가 단 하나라도 포함된 방에는 함정이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한동안 이 가설은 맞아들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분명히 소수가 없는 방인데도, 쿠엔틴은 덫에 걸렸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온다. 어떻게 된 일일까? 중간에 리븐은 가설을 수정한다. 함정이 있는 것은 소수가 아니라, 인수분해했을 때 하나의 숫자로 표현되는 수들이다. 가령 27(33), 625(54)… 같은 제곱수(prime power)들은 소수가 아님에도 단 하나의 인수로 표기된다.
함정이 있는 방을 피하려면 이제 소수 외에 멱수까지도 피해야 한다. 문제는 세 자리 숫자 속에 인수가 몇개나 들어 있는지 알아내는 것. 영화에서 리븐은 이게 “천문학적 숫자”라며, 암산으로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소리친다. 그래봤자 세 자리 숫자의 인수분해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걸 ‘천문학적 숫자’라 부르는 것은 매우 해괴한 일이다. 어떤 수가 소수인지 아닌지 척척 알아내던 “수학의 천재”가 암산으로 멱수인지 아닌지를 알아내지 못한다는 것도 매우 이상하다.
이때 도움을 주는 것이 카잔. 이 자폐증적 서번트(savant)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숫자를 듣자마자 그 안에 든 인수의 수를 즉각 말해준다. 리븐의 추리능력과 카잔의 암산능력에 힘입어 워스를 포함한 세 사람은 함정이 있는 방을 피해가며 마침내 ‘다리’에 도달하게 된다. 드디어 바깥 세계로 나가는 문이 열리고, 그로부터 눈부시도록 밝은 빛이 큐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부조리극
<큐브>에서 인간들은 카프카 소설의 인물들을 닮았다. 도저히 말도 안 되게 돌아가는 부조리한 세상. 그 속에서 도대체 뭐하러 사는 건지 알 수 없는 사람들. <큐브>에도 관료주의의 불합리성에 대한 묘사와 비슷한 것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맡은 일만 열심히 하는데, 그 결과로서 벌어지는 총체적 비합리. “그럼 우리는 왜 데리고 온 거야?” “이왕 만든 거니 쓸모없다는 것은 증명해야 하지 않겠어?” 결국 큐브의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가둬버린 자폐증 환자. 카잔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나, 그 빛은 외려 그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큐브의 안은 인간의 삶이고, 큐브의 밖은 인간의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