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이 정도 뜨거운 물쯤이야
2008-02-26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글 : 정재혁
고태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그녀들의 방> 촬영현장

촬영장 한구석 주전자에 물이 팔팔 끓고 있다. 건물 계단 복도엔 주인공 언주로 출연하는 정유미가 벌벌 떨며 대기하고 있고 사무실 안쪽엔 스탭들이 세팅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1월27일 일요일 강남의 한 학습지 사무실을 빌려 마려한 곳은 고태정 감독의 장편 데뷔영화 <그녀들의 방> 현장.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장편 제작지원작 중 한편인 <그녀들의 방>은 딸을 잃고 허무하게 살던 중년 여자 석희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학습지 방문 교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여자 언주(정유미)가 우연히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순조롭게 진행됐던 26일의 촬영과 달리 이날의 촬영은 같은 장면에서 테이크를 계속 더해가고 있었다. 고태정 감독은 “대충 예상한 일이다. 3시에 이동하기로 했지만 이 장면이 중요하니 어쩔 수 없다”며 정유미의 어깨를 계속 토닥였다. 세상에 지친 언주가 힘이 빠진 채 사무실로 돌아와 무념으로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계속 담는 신이니 감독과 스탭이 예민해질 만도 하다. 언주의 감정은 밑바닥까지 꺼져 있고, 손에 든 머그잔엔 뜨거운 물이 넘쳐 흐르며, 뻘게진 언주의 손에선 김까지 보여야 한다. 배우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는, 하지만 최대한의 김이 보이는 온도의 물을 만드느라 제작진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정유미는 “하나도 안 뜨겁다”며 용기를 보였지만 찬물과 뜨거운 물을 오간 그녀의 손은 벌써 빨개져 있었다.

두 여자가 우연히 만나 서로를 위로한다는 작품의 컨셉이 일견 여성주의 영화로 보이지만 고태정 감독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주인공이 모두 여자인 건 이성애 사이에서 나오는 불필요한 감정적 소모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들의 방>이 디테일한 감정과 관계 묘사에 치중한 건 사실이다. 고태정 감독은 “영화는 (시나리오처럼) 디테일하지 못하다”고 말했지만, 남의 집을 돌며 영업을 하는 언주와 집의 문을 열어놓은 채 정해지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석희의 이야기는 은밀하고 섬세하다. “10여년 전에 아르바이트로 학습지 방문교사와 비슷한 걸 해봤다”는 고태정 감독은 “남의 집 창으로 보이는 따뜻한 노란 색감의 빛이 기억에 남았다”며 이번 작품의 시작점을 설명했다. 언주의 또 다른 공간인 신림동의 고시원촌의 촬영을 남겨두고 있는 <그녀들의 방>은 2월 말에 크랭크업할 예정이다.

주인공 언주 역의 정유미

“상업영화? 독립영화? 다른 거 없다”

-촬영이 힘들어 보인다.
=괜찮다. 전혀 힘들지 않다. 고시원 촬영이 너무 추워서 여기 실내에 이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 (웃음)

-촬영장소 관계로 학습지 분량을 몰아서 찍는다. 감정적으로 힘들진 않나.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라 쉽지는 않다. 아직 석희 역할 배우와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분과의 관계는 아직 내 상상 속에만 있다. 내가 잘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다, 솔직히.

-시나리오는 어떻게 봤나.
=재밌었나? 나도 재밌었다. 시나리오라, 그건 지금 할 얘긴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찍고 있으니까.

-언주 캐릭터의 어떤 부분에 끌렸나.
=음…. 그건 다음에 만약 이 영화 끝내고 인터뷰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은 찍고 있으니까, 찍고 나면 더 할 말이 많아질 것 같다. 지금까지 촬영현장에서 인터뷰해본 경험이 없어서 긴장되고 부담된다. <가족의 탄생>도 <사랑니>도 촬영현장을 공개한 적이 없다. 조금 부담스럽다. 주인공이 처음이지 않나. 예전에 주·조연이었다고는 하지만 주인공은 처음이니까. 그냥 조심스럽고 잘하고 싶다.

-단편영화에도 출연했었지만 이번 영화도 충무로 영화가 아니라 독립장편이다.
=끈을 놓고 싶지는 않다. 독립장편이라….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솔직히 다른 거 없다고 생각한다. 현장 그냥 똑같지 않나? 물론 다른 위치의 사람들은 이게 상업적이다 아니다 구분할 수 있겠지만 연기하는 사람 위치에선 다 똑같은 마음으로 한다. 특별히 다른 건 못 느낀다.

-여자 감독이라 편한 점이 있나.
=세세하게 제시해주는데 예전과 다른 건 못 느낀다. 전에 작업했던 김태용 감독님이나 정지우 감독님도 감성이 다 섬세해서.

-이제 연기 경험이 5년 정도 되는데 좀 편안해졌나.
=아니다. 매번 모르겠다. 알겠다 싶다가도 또 다른 스탭들과 다른 영화를 하니까 다시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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