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는 휴머니즘의 화신이다. 하지만 착한 사람은 재미없다. 그가 늘 자신이 원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겉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를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었다. 조(라이트)는 간디나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이 있지 않냐면서 나를 설득했다.”
<어톤먼트>의 전반부, 그 나른하게 뜨겁던 오후의 로비는 늘 웃었다. 자신의 실수로 깨어진 값비싼 꽃병을 보고도 웃음이 터졌고,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할 로맨틱한 음담패설을 휘갈긴 뒤에는 부끄러움에 낄낄댔다. 세실리아에게 정중한 사과의 연서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할 때는 쑥스러움을 미소로 무마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더이상 웃을 수 없었다. 억울한 누명을 쓴 뒤 수감 대신 군입대를 선택한 로비는 이제 그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전장을 헤맨다. “사람들이 선한 인물에게 흥미를 가지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다. 그가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수다. 지구 역사상 최고의 인간을 우리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이야기다. 인간에겐 아마도 선한 사람의 고난을 즐기는 본성이 내재된 것 같다.” 예수까지 들먹이는 제임스 맥어보이의 말은 필요없다. 로비의 미소를 다시 보고 싶은 우리에게, 그의 여정은 더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중요한 건 맥어보이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의 출신은 언제나 약간씩 미천했고,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제임스 맥어보이가 전세계에 얼굴을 알렸던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속 반인반수 툼누스는 수상한 친절을 베풀며 루시를 납치할 궁리를 했다. <라스트 킹>의 엘리트 의사 니콜라스는 지루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봉사를 빙자해 우간다에 왔을 뿐 원 나이트 스탠드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는 철없는 백인의 전형이다. <스타트 포 텐>의 못 말리는 퀴즈광 브라이언은 금발미녀에게 정신이 팔려 가까운 이에게 상처를 입히고, <비커밍 제인> 속 톰 르프로이는 로맨틱코미디 속 외모는 좋지만 성격은 더러운 까칠남의 대명사다. 이들은 모두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잘못을 깨닫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힘겹게 노력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완벽한 조건을 갖추지도 못했으면서, 세상을 조금은 만만하게 대했다가, 이내 뒷걸음질치는 그 모습에, 매번 마음이 쓰인다. 조 라이트 감독은 “로비의 첫 번째 조건은 긍정적인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제임스는 그걸 가졌다. 그는 언제나 밝은 미래를 바라본다”고 말한 바 있다.
“<어톤먼트>의 로비는 그냥 스카우트된 거 아녔나요?” “장난해요? <라스트 킹>도 개봉하기 전이었어요. 아무도 날 몰랐다고요. 오디션장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를 겁니다. 나랑 정말 똑같이 생긴, 그런데 얼굴은 나보다 약간씩 잘생긴 다섯명의 남자들과 나란히 앉아 있는다고 생각해보세요. 한숨이 절로 나죠.”
지난 2년간 5편의 영화를 개봉시킨 맥어보이는 “당신은 왜 이 역할을 선택했나요?”라는 질문에 매번 이렇게 답한다. “내가 선택한 적은 없다. 선택받기 위해 매번 오디션을 봤다.”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전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성직자를 꿈꿨던 소년이 처음 작은 역할로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 수업을 결심한 것이 16살 때.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비롯하여 현재 부인인 배우 앤-마리 더프를 만난 <세임리스> 등 TV시리즈, <윔블던> 속 남자주인공의 남동생 역할, 셰익스피어 연극 몇편을 거쳐 키라 나이틀리며 안젤리나 졸리(<원티드>)와 호흡을 맞추게 된 그는 이제 29살이다. 영국 출신 올랜도 블룸이 <반지의 제왕> 한편으로 누린 눈부신 스타덤과 비슷한 장르인 판타지영화에 역시나 뾰족 귀를 달고 출연했던 맥어보이의 필모그래피는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단순히 비교적 아담한 키, 스코틀랜드인답게 창백한 피부 등 완벽하지 못한 외모의 문제인가. 그러나 장담컨대 조각 같은 외모의 블룸과 달리 신데렐라를 꿈꾸지 않는 맥어보이의 얼굴은 주름이 더해질수록 더욱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키라가 말하길, 함께 일했던 어떤 남자배우보다도 키스를 잘한다던데.” “에, 스코틀랜드식 훈련이 입증된 셈이죠. 뭐랄까. 우리는 키스에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하거든요. 하하.”
조니 뎁과 올랜도 블룸 중 누가 더 키스를 잘하냐는 질문에 질린 나이틀리의 장난스런 답변에서 비롯된 ‘맥어보이의 키스 능력 논쟁’의 진위는 절대 파악 불가능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목소리는 중요한 순간에 떨림을 감추지 않는다. 은밀한 서재에서 첫 정사를 나누다가 세실리아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로비, 절대로 돌려받을 수 없는 과거에 목이 메어 한때 어린 동생이었던 브라이오니를 향해 절절한 분노의 말을 퍼붓던 로비 혹은 자신을 떠나려는 제인의 손을 잡으며 그럴 수 없다며 울먹이는 톰(<비커밍 제인>)과 큰 잘못을 저질렀다며 괴로워하는 툼누스(<나니아 연대기…>)도 마찬가지였다. 꼭 해야 할 말을 내뱉기 위해 숨을 가다듬는 그 목소리는 매 순간 관객을 설득해낸다. 자신의 약점을 두려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흔치 않은 그 목소리가 변치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