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 말들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배우 하지원은 데뷔 뒤 지난 11년간 한결같이 확신했고 선언했다. “힘들었지만 뿌듯했다”, “열심히 해야 살고 있다는 힘을 느낀다”, “나는 언제나 새롭게 배우는 걸 즐긴다”. 물론 착하고 성실하며 의리있는 배우로 칭송받던 그녀는 언제나 아무런 고민없이 오로지 연기에 투신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시선이 어디 그렇던가. 착하고 성실하다는 말은 그저 미덕일 뿐이고, 건실한 어조의 말들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려는 겉치레로 오해받는다. 그녀는 언제나 “지금 연기하는 게 너무 좋다”고 말했지만, 언제나 너무 좋기만 한 건 없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짓궂은 짓인 줄 알면서도 그녀의 고민을 넘겨짚어봤다. 그것이 정말 그녀의 고민이든 아니든 간에.
“그런 말들이 정말 고마워요. 저는 진짜 신나서 하는 건데, 사람들은 저를 악바리라며 너무 열심히 한다고 칭찬해주세요. 다만 저는 준비 안 되는 건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일 뿐인데 말이에요. (웃음)”
하지원은 얼굴에서 땀이 흐르고, 몸에 멍이 맺히고 피가 흐를 때 가장 아름다웠다. <다모>의 채옥과 <형사 Duelist>의 남순이 분노의 칼을 휘두르며 질주할 때, <색즉시공>의 은효가 무대를 뛰고 구를 때, 그리고 <1번가의 기적>의 명란과 <발리에서 생긴 일>의 수정처럼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버티고 살때 관객은 그녀와 함께 공명했다. 그런데 2008년 현재 그녀는 영화 <바보>의 지호로 관객과 만나려 한다. <바보>의 승룡이가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바보라면 지호는 어느 동네에나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여인이다. 동네의 어느 이층집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의 주인공, 그리고 첫사랑의 이미지를 간직한 교회 누나. 과연 곱디고운 이 여자를 하지원이 연기할 때 관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전력을 돌이켜보자면 그녀가 얼굴에서 땀방울 지워낸 <키다리 아저씨>, <역전에 산다> 등의 영화는 금세 잊혀졌다. 그녀 역시 “원작과 시나리오의 감성이 좋았을 뿐 <바보>의 지호를 캐릭터에 끌려서 선택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그녀의 바람이 있다면 “언제나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여자를 연기했지만 이런 면도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언제는 안 어울렸다고. 분명 땀과 피를 걷어낸 하지원은 가녀린 외모를 지닌 여배우다. 단, 지금까지 그녀가 사랑받아온 이유가 마냥 해사한 빛을 드러내는 다른 여배우와 달랐다는 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저라도 항상 뛰고 구르는 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액션영화를 한 작품했는데, 다음 작품까지 액션을 하기에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죠. 별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요. 이건 어차피 제가 선택한 작품이잖아요.”
그렇다면 이렇게도 넘겨짚을 수 있다. 그녀가 뛰고 구르는 밑바닥인생을 연기할 때 가장 큰 호응을 받았다는 건 하지원이라는 배우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드라마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모>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형사 Duelist>는 말할 것도 없고, <1번가의 기적>의 명란에게는 <발리에서 생긴 일>의 수정이 비친다. 혹시 그녀에겐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을 능가하는 또 다른 작품을 만나고 싶은 조급함은 없을까. 그녀 말대로 언제나 건강보험증의 항목을 채워가며 연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필요하다는 걸 느끼기는 해요. 그런데 신인 때 수없이 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지다보니 이제는 그런 조급함이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조급함을 놓을 때 작품도 들어왔었죠. 뭔가를 빨리 해봐야겠다, 이런 건 없어요.” 그녀는 그런 건 자신의 진짜 고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저한테 가장 큰 고민은 제가 선택한 그 사람을 어떻게 연기해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에요. <1번가의 기적>을 끝내고 그동안 쭉 쉬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슬픔이든 기쁨이든 모든 감정을 빼내고 새로운 걸 저에게 넣고 싶었죠. 어떤 작품을 해야겠다, 혹은 이번에는 어떤 연기를 해봐야겠다 이런 건 없어요. 무사든 기생이든 복서든 저는 아무거나 다 좋아요. (웃음)”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을까. 혹시 그녀는 착하고 성실하고 의리있다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닐지. 새롭게 배우며 열심히 일하면서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얻어온 지 벌써 11년이 지났다. 영화배우로서, 한명의 연예인으로서 자신이 속한 세계의 빛과 어둠을 경험했을 테고 그 때문에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기로도 인정받았고, 흥행배우의 타이틀도 얻었던 그녀가 더이상 그렇게 부러질 듯 살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하지원은 “언제 연기를 그만둔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생활이 너무 미치도록 좋다”고 말한다. “제가 감히 지쳤다고 말할 때가 되었을까요? 저는 지금도 카메라 앞에서 서면 너무 떨려서 피부가 뒤집어지기도 해요. (웃음) 잘돼도 내 탓이고 안 돼도 내 탓인데 일단 최선을 다해야죠.” 청소년드라마에서 눈빛 하나로 학교 짱을 먹던 소녀는 어느새 30대가 됐지만, 그녀는 여전히 확신하며 선언한다.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든, 무엇을 넘겨짚든, 어떻게 오해하든 “내가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