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두툼한 장편소설 위에 박힌 두 글자를 바라본다. 그 간명한 무거움을 느낀다. 누가 소설에 저런 제목을 붙일 용기가 있었을까. 소설에 <소설>이란 제목을 거는 일만큼 <속죄>라는 말을 붙이는 일은 비장한 느낌을 준다. <속죄>는 소설가 이언 매큐언이 등장인물로 소설가 브라이오니를 내세워 ‘소설 속 소설’ 형식으로 소설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그 말은 같은 창작자이자 독자인 소설가들이 좋아할 소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실로 소설이란 장르에 태생적으로 <속죄>만큼 어울리는 제목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속죄>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도 흔치 않으리라.
이 장편의 제목은 명사형이지만 선언적이다. 아울러 선정적이기도 하다. 속죄, 더럽고 깨끗한 단어. 그래서 신이 아닌 인간의 것이 될 수 있는 말. 이언 매큐언은 창작자로서 신과 같은 입장의 소설가에게 속죄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마지막에 밝힌다. 소설은 근대 유럽, 전쟁과 사랑, 미성년과 성년이 엉키는 풍경을 보여준다. 동시에 소설가의 윤리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어톤먼트>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필름 속에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했다. 물론 영화에도 영화의 윤리가 있다는 걸 안다. 소설이나 희곡이 영화화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그중에는 영화로서 더 매력적인 작품도 많았다는 것도. 하지만 ‘닥터 지바고’도 ‘장미의 이름’도 아닌 ‘속죄’이지 않은가. 그리고 ‘속죄’란 본디 구술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고해이자, 말에 담긴 생각이고, 시선이며, 심리가 아니었던가. <속죄>는 3인칭으로 씌어졌지만, 한 인물의 장장 500페이지에 달하는 긴 독백으로 보아도 무방한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속죄>의 목소리가 영상으로 몸을 바꾸는 모습이 어떨지 보고 싶었다. 손에 잡힐 듯 가물거리는 인물들을 ‘배우’라는 물질화된 형태로 만나는 일. 섬세하게 복원된 당시대의 조형물을 보며 ‘그래 저 빛깔, 저 불빛, 저 색’ 하고 반색하는 일. 감독이 원작의 어떤 장면에 사로잡혔고 그걸 어디부터 어디까지 네모나게 잘라 표현했는지 확인하는 일은 소설이 영화화된 걸 볼 때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소설에 없는 것이 영화에 있고, 영화에 없는 것이 소설에 있다며 쉽게 투정하는 일은 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어톤먼트>를 봤다.
<속죄>와 <어톤먼트>는 달랐다. 꼭 장르가 갈려서만은 아니었다. 단지 장편의 두께가 두 시간으로 압축됐기 때문만도 아닌 듯했다. <속죄>는 소설이란 형식에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작품이지만, 영화화되기에도 손색없는 서사를 갖고 있다. ‘여자친구에게 보낸 한장의 편지가 인생을 망친다’는 설정에서 출발하는 다른 작품으로는 쿤데라의 <농담>이 있다. 그리고 <농담>이 영화화됐을 때 나타나는 원작과의 이질감에 대해 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톤먼트>는 지금보다 더 <속죄>스러워질 수 있었다. 얼마나 ‘비슷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충실한가’ 면에서 보자면 그렇다. <어톤먼트>는 소설 속 장면을 부드럽고 그윽하게 재현한다. 각각의 장면은 정성스럽게 계산된 느낌이 나고 종종 아름다웠다.
문제는 각도나 거리가 아니라 카메라가 그 장면에 머무는 시간이었다. 죄 짓기 전의 시간, 죄 지은 순간, 그 다음의 일생에 대해 말하는 한 인간의 지난한 중얼거림(혹은 하나의 기도라고 해도 좋다)이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선 카메라도 그 고통 곁에 바싹 붙어 오래 머물러야 했다. 나는 <어톤먼트>가 <속죄>의 등뼈를 잘 추려내는 일보다 골짜기의 깊이를 표현하는 공중 숏처럼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보여줬으면 했다. 속죄가 신이 아닌 인간의 것이라면, 소설이든 영화든 중요하게 여겨야 할 부분은 풍경이나 줄거리가 아닌 인물 그 자체일 거라고. <어톤먼트> 속 각 장면의 비중과 시간과 리듬은 엇비슷하다. 그래서 브라이오니를 평생 짓누른 고통과 ‘평생 길을 걸은 것 같다’는 로비의 고난은 <속죄>만큼 통렬하게 와닿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지’를 ‘성기’로 ‘정신병자’를 ‘변태’로 번역한 것도 마찬가지다. 정신병자와 변태 사이엔 큰 간극이 있다. 그것은 브라이오니가 성에 대해 얼마만큼, 어떻게 자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원작 속 미성년의 오해와 혼란, 선의는 영화에서 단순한 질투와 혐오로 바뀐다. 심리적 문맥이 생략된 전개는 그 장면의 ‘속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절경 중 하나, 퇴각한 군인들과 해변의 묵시록적 잿빛 화면이 아쉽게 다가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감독이 그 장면을 아껴서가 아니라, 아낀다는 걸 내색하고 있어서였다. 그 신은 진심으로 좋았다. 하지만 카메라가 가장 오래 머물 만큼 제일 중요한 장면은 아니었다. 내가 <속죄>를 통해 목격한 건 전쟁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안에 놓인 인간 내면의 풍경이었다. 좋은 부분 몇개가 아니라 주제에 기여하는 조화로운 전체였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그리고 치졸하게 <속죄>에는 있고 <어톤먼트>에는 없는 걸 생각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