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영화 <슈퍼맨>보다 차라리 ‘SK텔레콤 광고-영웅 편’에 가깝다. 아버지, 소방관, 의사와 간호사 등이 슈퍼맨, 배트맨, 마루치 아라치 등으로 병치되고, 마지막 전철을 미는 사람들 위로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영웅입니다”라는 자막이 깔리는 그 광고 말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몇초짜리 광고로 축약될 만큼 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정치성은 그리 간단치 않다. 극중 PD가 만들어왔다는 다큐멘터리류의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가장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내는 선동영화이자 현재 남한사회 진보진영이 추구해야 할 노선을 분명히 제시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1. ‘사소한’ 것과 ‘거창한’ 것? 비정치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성찬은 그를 슈퍼맨으로 만든 원인에 비해 그의 일들이 지나치게 사소하거나 지나치게 크다고 지적하였고(전문가 100자평), 김혜리 역시 “뭔가 거창한 원인이 필요하다는 강박”(<씨네21> 639호 메신저토크)을 지적하였다. 즉 ‘광주’와 교통사고와 어린이 보호와 환경운동 등은 ‘거창함’과 ‘사소함’으로 위계를 달리하며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전지구적 위험사회’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시각이다(이는 타이영화 <시티즌 독>이 환경운동은 고상한 정치적 행위로, 동성애 포르노는 추악하고 시시한 것으로 그렸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동성애 포르노가 환경운동 못지않은 첨예한 정치적 사안임을 알지 못한 소치이다). ‘위험사회론’의 견지로 보았을 때, 교통사고를 비롯하여 무너지고 터지고 불타는 대형사고는 물론 황사나 온난화 같은 환경재앙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위험’은 더이상 우연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위험’은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하여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필연적 산물이며, 관리를 위임받은 정부와 전문가집단이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사회적 지위에 따른 불평등 분배가 이루어지는, 대단히 ‘정치적인’ 사안이다. 따라서 대규모 위험을 양산하는 자본주의적 개발과 위험의 불평등 분배에 맞서는 저항을 개발독재에 항거했던 민주화운동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아선 안 된다.
이러한 ‘위험사회론’의 정치적 함의를 가장 잘 구현한 영화는 <괴물>이다. 미군의 오염물질과 개발독재의 상징 ‘한강(의 기적!)’에 의해 배태된 ‘괴물’이 백주에 시민들을 덮치고, 철거민이었다가 매점 가건물에 사는 가족의 딸이 잡혀간다. 정부의 방재시스템이 무능하고 부패하며 폭력적인 가운데 사회적 공포는 확산되고, 정보를 독점한 미국은 화학무기를 살포한다. 환경단체가 반대시위를 하는 가운데, 소녀의 가족과 노숙자가 힘을 합쳐 괴물을 무찌르지만, 소녀 대신 거지소년을 구하게 된다는 줄거리는 ‘위험사회론’이 설파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완벽한 영화적 판본이다. 또한 <지구를 지켜라!> 역시 ‘위험사회론’에 입각하여 보면 더욱 선명하게 정치적 의미가 도출된다. 산업재해를 일으킨 자본가를 외계인으로 묘사하고, 매몰 탄부의 아들이자 산재노동자의 아들 병구로 하여금 ‘지구를 지키기 위해’ 그와 맞서 싸우게 하는데, 결국 외계인에 의해 지구는 끝장난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 슈퍼맨에게 크립토나이트를 박아넣은 ‘대머리’ 악당은 ‘전두환’과 ‘백골단’을 지칭하는 80년대적 메타포이지만, 건설인부(의 안전모)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는 덤프트럭을 ‘괴물’이라 칭하며, “사람 목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여긴다” 말한다.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불도저 ‘괴물’에 “멀쩡한 집을 왜 부숴?”라 저항하며 건설인부를 공격하는 “사고를 친다”. 후반부 화재의 원인은 지하철 굴착공사로 도시가스가 누출되어 맨홀에 고여 있다가 폭발한 것인데, 그는 굴착공사의 소리를 듣고 ‘괴물’이 지나갔다며 맨홀을 쑤셔댔다.
왜 건설 중장비가 ‘괴물’이고, 건설인부가 ‘대머리 악당’인가? 토건업은 개발주의와 성장주의가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착취하는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업이자, 부패가 부실을 낳고 부실이 참사로 이어지는 ‘필연적 위험’의 쇼윈도이다. 영화는 이른바 ‘건설마피아’에 의해 토건업이 GDP의 19%를 차지하고,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살아 있는 ‘토건국가’ 대한민국을 ‘현재적 악’으로 명시한다. 공교롭게도 <슈퍼맨>의 악당 렉스 역시 ‘대머리’이며, 부동산 개발업자이다. 지진을 일으켜서라도 자신의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려는 그는 자본주의적 개발의 극단을 보여주지만, 이윤추구를 최우선 가치로 삼으며 생명이나 환경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성이다. 즉 ‘인재(人災)공화국’ 대한민국에 만연한 위험들이 자본주의적 생산과 개발독재의 필연적 산물이며, 따라서 독재에 맞섰던 ‘광주정신 이어받아(!)’, ‘안전, 복지, 생태’의 기치를 드는 것은 황당한 비약이 아니다. 슈퍼맨이 행하는 교통약자를 보호하고 ‘스쿨 존’을 안전하게 지키는 행위 역시 ‘사소한’ 일들이 아니며, 환경문제 역시 너무 ‘거창한’ 오지랖이 아니다. 장애인이동권문제나 미성년자대상성범죄자문제, 또는 삼성중공업기름유출사건이나 기후난민문제에서 보듯이, 과거 패러다임으로 보기엔 가장 비정치적일 것 같은 문제들이 가장 첨예한 정치적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2. 희생주의? 아니죠~ 다중정치? 맞습니다!
영화가 펼쳐놓은 문제들이 첨예한 정치적 이슈라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그 해결책이 소영웅주의나 개인적 희생으로 귀착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김혜리, 메신저토크, “극단적인 희생…”). 그러나 영화가 주장하는 해법은 소영웅주의나 개인적 희생이 아니라 ‘자율주의’와 ‘다중정치’이다.
그는 망상형 정신분열증 환자이며, 뇌손상으로 인한 간질 환자이다. 그러나 그가 “또라이” 소리를 듣는 것은 망상 때문이 아니라, 사회와의 부조화 때문이다(584호 “망상을 망상으로 내버려두라” 참고). 그가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상반된 두개의 장면이 있다. 하나는 ‘지구의 날’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병원 식당장면이다. 전자는 들떠 있고 후자는 가라앉아 있으며, 전자는 모두가 ‘미친’ 상태이고, 후자는 그가 ‘치료된’ 상태이다. ‘지구의 날’에 그는 인파에 싸여 있지만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고래와 북극곰과 펭귄으로 분장하고 삼보일배를 하며 땅에 입을 맞춘다. 슈퍼맨이 “Save the Earth!”, “Change the Future!”를 외치자 그들은 환호한다. 그들은 슈퍼맨과 같은 주장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그날만 외치고, 슈퍼맨은 평소에도 계속 외친다는 사실이다. 그 주장이 옳은 것이라면, 항시적으로 옳은 주장을 하는 슈퍼맨은 미친 것인가? 그 주장이 미친 것이라면, 그들의 집단 광기는 사회적으로 용납되는가? 구호를 외친 그가 무대에서 낙하하자 사람들이 그를 받쳐 ‘하늘을 나는’ 환상을 유지시킨다. 그들이 평소 어떤 삶을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순간 거기에 모여 일정한 믿음의 체계를 공유하며, 공통 관념을 형성한다. 정신병원 식당에서 그들은 묵묵히 자기 밥을 먹느라 옆에서 누가 발작으로 쓰러져도 개의치 않는다. 관리자가 다가와 옆 사람을 툭툭 치자 도우러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망상이 치료된 정상상태’의 풍경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자신이 사이보그라는 망상을 지닌 영군보다 일사불란하게 노동을 하던 ‘정상인’들이 더 사이보그 같아 보이던 역설이 이 영화에도 존재한다.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그에게 소화기를 건네주는 사람은 있어도 발작을 일으킨 주인공 대신 소화기를 분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스폭발 사고가 났을 때 소방서에 연락하고 기다릴 줄만 알았지 옆에 있는 물을 퍼서 조금이라도 불을 끄려는 사람은 없었다. 왜 그럴까? 그들 모두 지독히 이기적인 인간들이라서? ‘지구의 날’ 행사에 모인 이들과 사고현장의 그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이타심이 아니라, ‘능동성과 자율성’이다. 그들은 이타심이 있어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고 공무원도 아닌 내가 나서도 되는지 알지 못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정신병원 식당의 그들 역시 관리자가 도우라고 지시하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는다. ‘정상인’으로 치료된 ‘타율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도 어떤 자극으로 촉발되면 움직인다. 슈퍼맨에 의해 차가 조금 들리는 것을 보자 함께 차를 들어올린다. 불량(?)청소년들까지 슈퍼맨이 내다버린 하와이안 셔츠를 나눠 입고 동참한다. (군사독재에 의해 크립토나이트가 박혀 자신의 능력을 잊어버린) 타율적 ‘민간인’들이었지만, 자율적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용기있는 한 사람의 ‘시작’이다(“쇠문을 여는 것은 큰 힘이 아니라, 작은 열쇠입니다”).
<슈퍼맨>의 초능력을 지닌 외계인 슈퍼맨은 여자가 죽자 지구를 뱅뱅 돌아 과거를 바꾼다. 그러나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의 선의지(善意志)만을 지닌 지구인 슈퍼맨은 분명히 말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어…. 하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지. 남을 돕는 것은 누군가의 미래를 바꾸는 일이야.” 그의 이타행위는 가족을 구하지 못한 죄의식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슈퍼맨이라는 사실(잠재성)을 잊지 않기 위함이며, 기쁨의 교류로 크립토나이트를 없애기 위함이다. 마지막 소녀를 구했을 때, 그의 의식은 가족이 죽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크립토나이트가 박히기 직전으로 돌아가 총알을 잡는다. 여기서 그의 이타행위가 억압의 총상을 극복하고 자신을 구제하려는 자활(自活)의 발로였음이 분명해진다.
촛불집회와 태안봉사활동에서 보듯이, 다중은 유동적이지만 때로 폭발력을 지닌다. 국가권력과 위험사회의 피해자였지만 넘치는 활력으로 사회를 위해 분투하는 슈퍼맨처럼, 개인적 원한과 ‘정상성’의 이데올로기를 떨어버린 ‘분열증적 주체’가 되어, 다중의 ‘잠재성’을 촉발하고 능동적 에너지를 자율과 자치의 방식으로 네트워킹해나가자는 것이 바로 ‘자율주의’와 ‘다중정치’의 요체이다. 한 사람이 전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1인 매체시대에 개인과 조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열쇠”(key)가 되고자 한 그의 죽음을 아무런 파급력도 없는 개인적 희생으로 치부하는 것은 ‘잠재성’의 영역을 간과한 처사이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휴먼드라마가 아니라, 지금 진보진영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방법론을 일깨우는 날선 정치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