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2008-03-04
글 : 정재혁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안슬기 감독의 <지구에서 사는 법> 촬영현장

“아직도 지구다.” 봉천동 한 아파트의 802호가 입구부터 수선스럽다. 출연배우, 스탭들이 벗어놓은 신발은 신발장을 채우고도 넘쳐 아파트 복도까지 흘러나왔고,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 크레인은 발 디딜 틈이 없는 거실을 반으로 잘라 구역을 나누어놓았다. 촬영시 있어선 안 될 곳과 있어도 괜찮은 곳. 기온이 영하 8도까지 떨어진 지난 2월12일, 실내 촬영이라곤 하지만 아파트 한 세대를 빌려 마련된 <지구에서 사는 법>의 현장은 녹록지 않았다. 조명을 위해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으론 세찬 바람이 조금씩 불어왔고, 넘쳐나는 신발들로 어쩔 수 없이 열어놓은 현관문 사이에서도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불이 꺼져 어두운 방 한쪽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안슬기 감독은 조용하지만 끈기있는 목소리로 ‘다시’를 여덟, 아홉번 주문하고 있었다. 아직도 같은 장면이다.

<지구에서 사는 법>은 <다섯은 너무 많아> <나의 노래는> 등을 연출했던 안슬기 감독이 만드는 세 번째 장편영화다. 지구인이 아닌 남자 연우(박병은)와 정부 요원 혜린(조시내)의 부부 이야기를 바탕으로 또 다른 외계인 세아(장소연)가 등장하고 혜린과 함께 연우를 감시하는 한 실장(박선우)의 비밀이 추가된다. 한줄의 줄거리로 쉽게 요약되지 않는 다소 독특한 설정의 영화지만 안슬기 감독은 <지구에서 사는 법>이 “일상에서 느껴지는 일상적이지 않은 것, 한겹씩 벗겨낼수록 나오는 다른 모습에 대한 이야기, 일상에서 출발한 영화”라고 설명했다. 독특한 캐릭터에 배우들이 이입하기도 힘들지 않았을까. 연우를 연기한 박병은은 “참 이상한 캐릭터 같았다. 아내가 설거지하고 있는데 바지를 벗기고. (웃음)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아서…”라며 어려움을 털어놨고, 혜린 역의 조시내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감독님과 해석이 다른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긴 대사를 여덟, 아홉번 계속 반복해야 했던 한 실장 역의 박선우는 “뭔지 모르겠는데 계속 다시 하라고 한다. (웃음) 일견 악역이지만 배우로서는 욕심나는 역할이었다”며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상담의사가 연우를 찾아와 긴 대화를 주고받는 이날의 촬영분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중요한 결말. 스포일러성 장면인지라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순 없지만 혜린, 연우, 상담의사의 묘한 긴장감이 담긴 이 사진이 영화의 핵심을 포함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극장용 장편영화 제작 지원작인 <지구에서 사는 법>은 2월 말 모든 촬영을 마치고 12월 개봉할 예정이다.

세 번째 장편 만드는 안슬기 감독

“특이한 상황 속에서 건조한 일상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어떻게 구상한 이야기인가.
=시나리오를 쓴 건 꽤 오래 전이다. <다섯은 너무 많아>를 하면서 다음엔 상황극 중심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상적이지 않은 특이한 상황인데, 거기서 뭔가 건조한 일상이 느껴지는. 처음엔 중년 부부의 건조한 이야기였다. 나중에 조금씩 바뀌고, 젊은 배우들이 캐스팅되면서 30대 중반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됐지만. 사실 내가 할수 있는 이야기에 한계가 있다. 직장생활 하고 있으니까 직장 생활이야기나, 가족에 대한 거, 혹은 부부랄지. 네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썼고 그 중에 이걸로 결정한 거다.

-시나리오를 보니 연우, 세아 등의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할 때가 있더라.
=왜 SF 영화를 보면 인간과 다른 생명체는 의사소통하는 다른 수단이 있지않나. 효과음이나 CG나, 아니면 사운드만 나온달지. 일단 인물이 지구인이 아닌 설정이라 뭔가 다른 방식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심플하고 건조했으면 했다. 그래서 투숏에서 화면을 나눠 자막으로 하자고 결정했다. 기술적으로 장난치고 싶진 않았다.

-테이크를 많이 가더라.
=내가 현장에서 오케이를 잘 안부른다. 그냥 그만 찍읍시다,라고 하지. 거둬내는 스타일인 것 같다. 편집하면서 통으로 쓸지, 잘라서 쓸지 보고 결정해야 된다. 그러다보니 내 입장에선 많이 찍는 게 제일 좋고. 필름이 아니라 HD로 찍어서 다행이다.

-이번엔 촬영 전부터 배급사(인디스토리)도 정해졌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장 안정적인 토대에서 작업하는 거 아닌가.
=맞다. (웃음) 든든하다. 제일 예산도 크고, 제작사도 있고. 프로덕션에 맞추려고 많이 노력한다. 그동안 혼자 내 돈으로 찍어서 누구보다 스스로를 피디형 감독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웃음)

-이번에도 겨울방학 이용해서 촬영하는 건가. 영화 찍으면 학생들에게 보여주기도 하나. (안슬기 감독은 현재 서울산업정보학교에 재직중이다.)
=그렇다. 방학 전에 촬영 끝내는 스케줄이다. <나의 노래는>은 영화 보여주고 배우들 불러서 학생들과 대화 시간도 가졌다. 그랬더니 ‘저 인간 맨날 영화찍는다고 하더니 뻥은 아니구나’라고 하더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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