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호들갑이냐는 말을 들을지 모르겠다. ‘지금 미국영화’라는 특집을 3주 연속 진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사태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고 난 뒤, 이런 특집을 해야 할 때라는 확신이 생겼다. 두 영화가 훌륭하다는 얘기는 들었을 테고 나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두 영화가 택한 엔딩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나온 관객 사이에선 “이게 뭐냐?”는 웅성임이 있다는데 아마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봐도 마찬가지 반응이 나올 것 같다. 꼭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할리우드 엔딩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는데 두 영화는 그것을 배신한다. 아무리 비극이어도 있게 마련인 카타르시스가 없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악당은 끝까지 살아남고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선언하듯 갑자기 끝난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어톤먼트> <주노> <마이클 클레이튼>과 비교해도 차이가 있다. <주노>와 <어톤먼트>에 비해 <마이클 클레이튼>이 할리우드 엔딩에 덜 가깝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에 비하면 할리우드 엔딩에 가까워 보인다. 친절하고 깔끔하게 요점을 정리해주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두 영화가 아카데미로 대변되는 주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신선하다. ‘인디영화의 약진’이라 말하면 그만이겠지만 같은 표현을 쓰더라도 양적인 면보다 질적인 면에서 그렇다.
물론 두 영화가 전부는 아니다. ‘인디영화의 약진’이라는 표현에 담지 못할 많은 미국영화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우리에게 충격을 줬다. <본 얼티메이텀> 같은 놀라운 액션영화가 있는가 하면 <클로버필드>처럼 리얼리티의 의미를 되짚게 하는 영화가 있고, 경악할 만한 정치적 불공정성을 보여준 <300>조차 게임과 영화의 관련성에 비춰볼 때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맞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조심스런 질문을 던지면서 이번 특집기사를 준비했다. 개괄에 해당하는 첫 번째 특집은 지금 미국영화가 흥미로운 이유와 그 변모의 과정을 좇아가는 내용이다. 만약 일군의 뉴웨이브 감독이 등장한 것이라면 어떤 새로운 인물이 있나 소개하면 충분하겠지만 지금 미국영화의 변모는 세대교체로 해명될 성질은 아니다. 예를 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지금 미국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의 나이 지금 아흔에 가깝다. 혹은 스티븐 스필버그. 70년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주역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코언 형제와 폴 토머스 앤더슨 또한 21세기에 등장한 신인감독이 아니다. 지금 미국영화를 이야기하는 데 40여년 영화사를 아우르는 일종의 지형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유다.
영화사 교과서에 따르면 뉴 아메리칸 시네마는 60년대 정치적 격변을 목격하고 동시대 유럽예술영화의 세례를 받은 젊은 미국 감독들에서 비롯됐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등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할리우드의 고정관념을 뒤엎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죠스>와 <스타워즈>는 B급영화로 천대받던 장르를 통해 블록버스터의 시대를 열었고, <비열한 거리>나 <대부>는 해피엔딩을 부정하면서 미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단순화한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가 <비열한 거리>와 <대부>의 자리에, <트랜스포머>와 <클로버필드>가 <죠스>와 <스타워즈>의 위치에 돌아온 것은 아닐까? 우리는 후속 특집에서 ‘포스트 9·11’과 ‘디지털 할리우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지금 미국영화를 해부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