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빌행 자동차 안에서 박은혜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유학생 현주. 그녀의 연기를 보면서 누구나 반문했을 게다. 아니, 이 리얼하게 앙칼진 여배우가 대체 누구냐.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베를린영화제 현지에서 현주를 만났다. 파리 현지 오디션에 합격해 <밤과 낮>에 출연한 그녀의 정체는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예술경영을 공부 중인 유학생 서민정씨. 2004년 8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광주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한 경력도 있단다. 베를린 레드 카펫 행진을 하루 앞둔 그녀의 얼굴은 꽤나 상기된 상태. 당연히. 그럴 법도 하다.
-영화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
=내가 원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만나려는 집념이 있다. <광주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할 때도 내 인생에서 만나고 싶었던 세명을 모두 다 만났다. 정은임 아나운서, 정성일, 그리고 조수미. (웃음) 홍 감독님도 무척 만나고 싶었는데 영화 전공하는 학생이 ‘홍 감독 파리에서 영화 찍는데 스탭들 모집한다’더라. 기사 같은 거라도 의뢰해볼까 싶었는데 감독님이 바쁘니까 차라리 오디션에 지원을 해서 그 자리에서 직접 말을 하는 게 낫지 않냐더라. 그래서 원서내고 오디션 보러갔다.
-배우를 할 마음으로 간 건 아니라는 거네.
=내가 무슨 배우인가. (웃음) 그냥 다 구겨진 바지에 머리 질끈 묶고 진짜 극중 현주처럼 하고 갔다. 그렇게 3차 오디션까지 가게 된 거다. 오디션 때마다 지금 살고 있는 그르노블에서 파리까지 왕복 6시간. 20만원. (웃음) 오디션 때는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럼 촬영은 재미없었다는 건가.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조용하고 고요한 대사들이 너무 안 붙는 거다. 게다가 나는 촬영 이틀 전에 파리에 도착한데다 대본도 아침에 받았다. 그런데 심지어, 대사까지 있더라고. (웃음) 김영호씨랑 바로 대사 한번 맞춰보고 등 떠밀리듯이 촬영을 시작한 거다. 게다가 눈치를 보아하니 한두번 등장하는 역할도 아닌 것 같은 거다. 속옷도 안 챙기고 여행을 떠난 기분이랄까.
-야단도 좀 맞았나보다.
=방에서 박은혜씨와 김영호씨가 이야기하는 걸 듣는 장면을 찍을 때는 그냥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호통을 치셨다. 화도 나고 도망도 치고 싶고…. 혼자 걸어서 숙소로 돌아가 누워 있는데 아는 동생이 응원한다고 파리에 왔더라. 그때 처음으로 눈물이 울컥 나서 딱 20초 정도 울었다. 그렇게 울어본 거 내 인생에서 처음이다. (웃음) 거기서 울음 딱 그치고 오후 촬영에 들어가는데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확 들어가더라. 내가 왜 못해? 하는 심정이 된 거지. 그러니 감독님이 ‘너 그 눈빛으로 영호를 쳐다봐’라고 하셨고, 원래 대사도 없었는데 ‘선배님께는 예술이 뭐예요’라는 대사까지 추가됐다. 그날을 기점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나.
=주유소에서 돈 안 낸다고 소리 지르는 연기. 그거 술먹고 한 거다. 맥주 딱 한잔. 내가 감정을 잘 못잡으니까 감독님이 “자, 이거는 또라이들의 여행이야”라고 하시더라. 그때부터 흥이 나기 시작했다.
-촬영할 때 말고도 홍 감독 원래 배우들이랑 술 많이 먹잖아.
=거의 매일밤 마셨지. 사실 내가 폭탄주 열몇잔씩 마셔야 하는 사회부 기자도 한 적이 있으니까 뭐. (웃음) 감독님이 술 먹다가 나한테 꼴통이라고 하셨는데 나중에 유정이 현주를 두고 유럽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골통이라고 한다. 그 대사가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게 바로 감독님의 진심인가. (웃음) 사실 현주가 나랑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고, 나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나한테 있는 모습 중 하나인데 감독님은 그걸 극단적으로 뽑아올리시는 것 같다.
-차 안에서 박은혜에게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무섭게 리얼했다.
=처음에는 은혜 언니가 그러더라고. 감독님 얘는 화도 못 내게 생겼어요.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제가 사회부 기자로 근무할 때는 별명이 싸움닭이었거든요! (웃음) 사실 화를 낼 땐 무조건 지르는 게 아니라 강약이 있다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어서 내가 너무 지르기만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감독님이 그러더라고. 괜찮아, 얘는 지금 미쳤어.
-유학은 무슨 연유로 오게 된 건가.
=<밤과 낮> 촬영 때는 어학원에 있었고 올 9월에 드디어 대학에 들어간다. 유학을 결심했던 계기는, <광주일보>에서 문화부 기자 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만큼. 그런데 한순간에 공포스러워졌다. 누르면 꺼져버리는 공처럼 내가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부풀려 포장된 게 아닌가 싶었다. 애호가는 될 수 있어도 전문가는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전문가가 되고 싶어서 프랑스로 왔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서 공연 기획을 한번 해본 적 있다. 연주자를 잘 아는 상태에서 기획하는 것과 모르고 공식적으로 섭외하는 건 공연의 질과 개런티에서 큰 차이가 난다. 여기서 살면서 좋은 연주자들과 친해진 뒤 한국에 소개하는 그런 역할도 하고 싶다.
-배우는 생각 없나.
=아니. 된다고 생각하나? (웃음) 사실 연기를 하는 게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처럼 무조건 신나고 유쾌하지는 않더라. 현주 역을 하면서도 행복과 불행 사이를 하루에 열두번도 더 오갔다. 물론 그 기분이 아찔해서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고, 지금의 나라면 현주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있다. <밤과 낮>을 찍을 때의 서민정은 유학 4개월째라 그저 신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돈없고 우울한 현주를 그때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서민정씨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영화 찍으면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거” 다 사라졌단다. “지금 제게는 베를린 주 상영관에서의 그 기분만이 남아 있어요. 영화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또 잘 알고 있는 감독, 자기 세계를 굳건히 지키는 소신있는 감독의 배우였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을 존중할 줄 아는 철학을 가진 사람과 한달 반을 생활했다는 배움의 시간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