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올해는 민폐 좀 덜 끼치고 살자
2008-03-07
글 : 김현진 (칼럼니스트)
<점퍼>에서 철없는 데이빗이 그리핀을 곤경에 빠뜨리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를 반성하다

<점퍼>를 보다 보니 자꾸만 제다이 생각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헤이든 크리스텐슨에다 새뮤얼 L. 잭슨이라니! 새뮤얼 L. 잭슨이 헤이든 크리스텐슨의 점프 능력을 억누르기 위해 전깃줄로 휘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에서는 혹시 “빠와-! 모어 빠와!!” 하는 대사가 나와도 하나도 이상할 성싶지 않았다. 그러나 <스타워즈>의 헤이든 크리스텐슨과 <점퍼>의 헤이든 크리스텐슨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둘 다 가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외로운 소년이며 조용해 보이지만 실은 타인의 눈에 띄고 싶은 부글부글한 열망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며 자기를 절대 봐줄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소녀를 좋아한다는 면에서는 완전히 동일하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 <스타워즈>의 아나킨은 젊고 자신만만한 제다이 슈퍼히어로였다가 그만 다리 잘리고 활활 화산재에 구워져서도 안티 히어로 다스 베이더라도 되었지만 <점퍼>의 데이빗은 그냥 좀도둑이 되어버린다.

전능한 힘을 갖게 된 데 대한 그의 소감은, 철없는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나서도 오로지 사색이나 갈등이 아닌 순수한 환호뿐이다. 어디나 원하는 은행 금고에 들어가 돈을 가져올 수 있는 힘,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도시의 고급 바로 옮겨가 미녀와 즐기고 나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힘, 옛 여자친구를 퍼스트 클래스로 로마로 데려가 최고급 호텔에 묵게 하고 꿈같은 휴일을 즐기게 하는 비용을 언제든지 조달할 수 있게 하는 힘, 점프 파워는 그에게 오직 그런 것들을 뜻한다. 아마도 <스파이더 맨>의 주인공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순식간에 거미줄에 꽁꽁 묶여 기나긴 설교를 들을 것이다. 이봐 자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자고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필요하지….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책임감도, 고민도 없다. 근육질의 젊은 미남 스타를 전면에 내서운 액션히어로물의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영웅다운 면모가 요만큼도 없기도 어려울 일이다. 히어로의 성격이 이렇게 찌질스럽고 비리비리하면 균형상 담대하게 그의 엉덩이를 날려버리며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쏘아붙여줄 강하고 터프하고 심지 굳은 히로인이 존재해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여주인공 역시 자기 남자친구만큼이나 매력없는 아가씨다. 남은 속이 타죽겠는데 시종 앵앵거리며 데이빗 이건 뭐냐 어쨌냐 저쨌냐 설명해라 어쩌고저쩌고, 심지어 도망가는데 빨리 걷지도 않으니 어지간히 사랑하지 않았으면 주인공이 길에 버리고 혼자 점프해 떠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그렇다면 이 액션히어로물에 분명 액션은 있는데 도대체 히어로는 어디 있단 말인가?

영화 중반이 되어서야 의문은 풀렸다. 헤이든 크리스텐슨과 제이미 벨은 <점퍼>라는 액션히어로물에서 각각 임무를 나눠지고 있었던 거였다. 헤이든 크리스텐슨은 액션과 옷 벗는 쪽을, 제이미 벨은 히어로쪽을. 그 생각을 하고 다시 보니, <점퍼>는 혼자 복수의 칼을 갈며 철두철미한 준비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던 그리핀(제이미 벨)이 얼결에 개념도 없고 민폐만 끼치는 얼굴만 멀쩡히 잘생긴 녀석과 인연이 꼬여서 봉변을 당하는 가엾은 이야기였다. 영화에 따르면 그는 철모를 네살배기 시절에 잔혹한 팔라딘들에게 부모를 모두 잃고서,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열심히 땅을 파헤쳐 은신처를 만들어놓고 부지런히 복수의 방법을 연구하며 커다란 2층 버스까지 점프시킬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기르면서 고독한 복수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데이빗처럼 얼마든지 많은 돈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만 덥수룩한 용모로 봐서는 그런 것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복수를 위해 직접 자신의 두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몸에 큰 흉터를 남기면서도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죄다 잘될 예정이었다. 그 얼굴만 멀끔한 녀석이 계속 쫓아다니면서 치근덕거리고 도와달라고 성가시게 굴고 은신처에 여자친구까지 데려와서 대합실처럼 쓰고 심지어 팔라딘을 무더기로 끌고 오지만 않았다면. 가엾은 그리핀, 아직도 송전탑에 묶여 있을까. 그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나는 <점퍼: 수난의 역사-그리핀이 얼결에 당한 봉변의 일대기>를 보고 나오면서 괜히 눅눅해진 팝콘처럼 기가 죽어서 스스로에게 쏘아붙였다. 야, 올해는 민폐 좀 덜 끼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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