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진중권의 이매진] 해석의 틀을 벗어난 영화적 설치예술
2008-03-07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스토리도, 상징도 없지만 여전히 끔찍함을 체험케 하는 <이레이저 헤드>
<이레이저 헤드>

‘지우개 머리’라는 제목은 그의 잘린 머리를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의 재료로 사용하는 장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보고나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이렇게 막막하게 만드는 영화도 많지 않을 게다. 아무튼 <이레이저 헤드>는 오늘날 이미 컬트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또 2004년에는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 의회 도서관에 영구보존할 작품으로 선정됐다고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 기괴한 작품의 영화적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제까지 이 영화에 대해 크게 세 가지 해석이 나왔다고 한다. 첫 번째 해석은 이 작품을 준비되지 않은 부성에 관한 영화로 본다. 즉 헨리가 원치 않게 아버지가 되어 서서히 파멸되어 나가는 과정의 묘사라는 것이다. 다른 해석은 헨리를 성불구자로 본다. 이 경우 영화는 좌절당한 성욕의 상징적 표현이 될 것이다. 세 번째 해석은 헨리 자신을 영화 속 끔찍하게 생긴 아기로 푼다. 여기에 따르면 <이레이저 헤드>는 헨리의 트라우마틱한 어린 시절의 묘사가 된다.

감독 자신은 이 모든 해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직 나의 것과 동일한 비평을 읽어야 한다.” 세 가지 해석 중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디선가 한국의 어느 독립영화감독이 <이레이저 헤드>를 해석했지만 꿈에 린치가 나타나 “네 해석이 틀렸다”고 했다는 기사를 읽고 마구 웃었던 기억도 난다. 세간에 떠도는 해석들은 대개 정신분석을 적용한 것들. 하지만 과연 그런 방법으로 이 영화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지는 적이 의심스럽다.

해석에 반대함

꿈을 읽는 것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과거의 주술적 해몽이나 현대의 정신분석학이나 초현실에서 현실의 대응물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게 주술적이다. 해석에 대한 이 강박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꿈을 반드시 해석할 필요가 있는가?’ 꿈의 해석학이 아닌 꿈의 제작학(미셸 공드리)이 있을 수 있듯이, 굳이 꿈을 해석하려 들지 않는 그런 사유체계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변경해야 할 것은 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이미 우리는 굳이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유체계에 익숙하다. 데리다를 비롯한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들의 반해석학적 태도에 대해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해석에 반대한다’는 수잔 손택의 노골적 구호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이 프랑스적 사유의 미국적 채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시, 하나의 그림, 하나의 그림에서 하나의 의미를 찾아 고정하는 것이 언제나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영화의 비평에서 굳이 해석을 고집하는 것 역시 문자문화의 과학주의에서 비롯된 관성이 아닐까?

<이레이저 헤드> 속의 세계는 꿈의 세계다. 거기에는 인과적 연결도 없고, 서사적 연관도 없다. 숏과 숏은 자유연상에 따라 부조리하게 결합된다. 꿈속에 다시 꿈이 등장하나, 이 꿈과 또 다른 꿈에 불과한 영화 속 현실의 경계는 종종 흐려진다. 놀라운 것은 이렇다 할 스토리가 없는데도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그것이 이 영화의 특색이라면, 영화 속의 꿈을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영화가 주는 그 독특한 효과에 주목하는 게 그것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베이컨의 형상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여기서 살짝 우회로를 취하기로 하자. <이레이저 헤드>를 굳이 회화에 비유하면,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세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실제로 이 작품의 제목만 듣고 내 머릿속에 당장 떠오른 것도 이 아일랜드 화가의 이름이었다. 영화에서 헨리의 머리가 어깨에서 떨어져나가고 그 잘린 부위에서 동물인지 인간인지 구별할 수 없는 기괴한 머리가 돋아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베이컨의 작품을 놓고 들뢰즈가 말한 ‘얼굴 지우기’를 떠올리게 된다.

베이컨의 작품에는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별하기 힘든 ‘형상’(le figural)이 등장한다. 메리가 낳은 아기가 바로 그 형상을 닮았다. 가위에 찔린 심장의 구멍을 통해 기형아가 거품으로 해체되는 모습 역시 베이컨의 작품에서 거품으로 흩어지는 형상의 최후를 연상시킨다. 베이컨에게 피가 낭자한 형상은 전쟁이나 테러, 사고 등 잔혹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회화의 잔혹함, 즉 회화를 통해 비로소 존재하는 잔혹함이다. <이레이저 헤드>의 끔찍함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베이컨의 것은 서사를 재현하는 구상회화도 아니고,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는 추상회화도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읽어야 할 스토리도 없고, 해석해야 할 상징도 없다. 그는 회화의 폭력을 통해 관찰자의 신경세포에 직접 작용하는 그런 회화를 원했다. <이레이저 헤드> 역시 표면에는 스토리가 없고, 심층에는 읽어야 할 상징이 없다. 그런데도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관객의 신경세포를 자극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폭력, 즉 영화를 통해서 비로소 존재하는 끔찍함이다.

이미지와 사운드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들. 사실 이 영화에 사용된 기법들은 오늘날의 눈에는 유치하게 보일 30년대의 초현실주의 영화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헨리의 목이 잘려나가는 장면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영화사의 한 장면, 그러니까 멜리에스의 마법영화와 비슷하다. 기술과 기법을 구별하지 못한 머리는 특수효과를 위해 값비싼 장비부터 찾겠지만, 데이비드 린치는 (어떻게 보면 너무 단순해 코믹하게 여겨지는 간단한) 기법만으로 영화에 필요한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흔히 이 영화를 ‘초현실주의 공포물’이라 부르나, 실은 무섭다기보다는 끔찍하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거기에도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접촉공포’에 가깝다. 기형아는 괴물처럼 굴 때보다 보통의 아기처럼 굴 때 외려 더 끔찍하게 여겨진다. 이 언캐니의 효과는 기형아가 보통의 아기처럼 굴 때 오히려 우리에게 더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기형아는 사람들을 쫓아다니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서 울면서 보챌 뿐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억지로 우리의 품속으로 달려드는 듯이 느껴진다.

기형아의 이미지와 더불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사운드. 다른 영화에서라면 사운드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데 그칠 것이나, 여기서 사운드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영화 전체에 형용할 수 없는 정서적 모드를 부여하는 금속성 음향의 효과는 오늘날의 사운드 아트를 연상시킨다. 흔히 공포영화에서 사운드를 빼면 그다지 무섭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사운드의 사용은 공포영화에서 갑자기 큰소리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과는 애초에 차원이 다르다.

새로운 영화언어

표면에는 이해해야 할 스토리가 없다. 그렇다고 심층에 해석해야 할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레이저 헤드>는 스토리(istoria)를 가진 전통적 구상회화도 아니고, 해석해야 할 상징(symbolism)을 가진 현대적 추상회화도 아니다. 그것은 베이컨이 행사하는 ‘회화의 폭력’과 비슷한 ‘영화의 폭력’이라 할 수 있다. 혹은 현실의 잔혹함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연극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는 잔혹함을 산출하는 즉 아르토의 잔혹극을 닮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실험영화는 기존의 영화언어의 바깥을 탐색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새로운 영화언어를 찾아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모험에 비유할 수가 있다. <이레이저 헤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도 바로 이 새로운 영화언어의 실험이라는 측면이다. 대중은 아직도 영화의 표면에서 줄거리에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 평론가들은 그 심층에 깔려 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레이저 헤드>가 탐색하는 영화언어는 새로운 신체의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가 아닐까?

신체로 정조를 체험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레이저 헤드>는 체험의 분위기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오디오 비주얼 인스톨레이션에 가깝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사의 선형성이나 조형의 상징적 의미가 아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것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기생충 앞에서 갖게 되는 접촉의 공포, 그리고 그런 끔찍한 사물과 사건으로 가득 찬 세계에 처한 인간의 느낌이다. 바로 이 분위기가 이렇다 할 줄거리가 없는 영화 속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이레이저 헤드>는 한마디로 영화적 설치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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