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 존스가 영화로 찾아온다. 지난 2005년 3월 내한공연을 통해 매진을 기록하며 국내에도 강한 카리스마를 남겼던 그녀가 왕가위의 신작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주인공이 되어 스크린으로 만나게 된 것. 이별을 겪은 엘리자베스(노라 존스)는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카페 주인 제레미(주드 로)를 만나고, 그가 만들어주는 블루베리 파이를 먹으며 조금씩 상처를 잊어간다. ‘재즈계의 신데렐라’ 혹은 ‘천상의 목소리’라 불리는 노라 존스는 일찌감치 재즈의 간판 레이블인 블루노트에 발탁돼, 전세계에 2천만장이 팔려나간 데뷔앨범 《Come Away With Me》(2002)로 그래미상 8개 부문을 석권했다. 맑고 부드럽고 편안한 음색과 탁월한 곡 해석력을 바탕으로 재즈, 팝, 블루스 등 어떤 장르도 자기 식으로 소화하는 매력적인 보컬의 소유자인 그녀는 인도 음악의 거장 라비 상카를 아버지로 둔 독특한 이력답게 은근히 배어나오는 동양적 정서도 친숙하다. 그런 그녀의 영화 데뷔작이 바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다. 왕가위의 첫 번째 영어영화이자, 신비로운 보컬 노라 존스와의 만남이라는 것만으로도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큰 호기심이 동하는 영화다. 여전히 공연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노라 존스와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지금까지 몇번이나 봤나. 볼 때마다 기분이 어떻게 변하는지.
=정식으로 본 것은 지난해 칸영화제 때 왕가위 감독님과 앉아서 봤다. 프랑스 개봉 때 방문했을 때도 일부러 보지 않았다. 내가 나온 영화를 자주 본다는 것이 민망한 일이어서 오히려 자꾸 잊으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본다면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거 같다.
-순회공연 중 <화양연화>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했다. <화양연화>의 어떤 점이 당신에게 강하게 어필했나.
=<화양연화>의 주제곡인 냇 킹 콜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가 너무 좋다. 영화의 안타깝고도 슬픈 분위기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장만옥의 화려한 드레스들도 더 슬프게 느껴져서 좋다. 이 영화가 왕가위 영화에서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장만옥이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 때문이다. 국수를 담은 통을 들고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장면이 정말 아름답고 허망하게 느껴진다.
-왕가위는 홍콩에서 영화를 만들 때, 완성된 대본을 배우들에게 주지 않고 즉흥적으로 영화를 찍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번 영화에서는 어땠나.
=즉흥연기라기보다 그때 그때 생각나는 걸 그 자리에서 표현해 달라고 요청할 때가 많았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테이블 키스신을 찍는 건 이틀이나 걸렸는데, 육체적으로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주드 로와 가장 아름다운 각도를 만들어낸다는 게 많은 연습을 필요로 했다. 그래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수천명의 청중 앞에서 라이브로 공연하던 경험이 이번 연기에도 도움이 됐나.
=난 연기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감독님은 연기를 공부하게 되면 더 부자연스러워질 거라면서 나의 자연스런 모습을 끌어내길 원했다. 노래는 내가 자신있는 부분이지만, 난 나 자신에 대해 혹은 연기에 대해 주드 로만큼 자신있는 사람은 아니다. 연기를 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빠지는 것이었다. 음악과는 전혀 다르다고나 할까.
-어떻게 해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타이틀 트랙을 작곡하게 됐나. 한창 촬영 중이었을 텐데 그럴 시간이 있었나.
=맨 처음 감독님과 점심을 먹을 때는 당연히 음악을 해달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주연 얘기를 꺼내고 나서 대화를 나누다보니 아예 애초부터 내가 주제가를 부르는 건 계획에 없었고 계약사항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웃음) 그러다 촬영 후반쯤 타이틀 트랙 얘기가 나와서 감독님과 상의하에 자연스레 이뤄졌다. 빨리 만든 것치고는 마음에 든다.
-당신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주드 로보다는 오히려 영화 속 여행 중에 만난 내털리 포트먼과 함께 있을 때다. 둘 사이의 호흡은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나.
=내털리와는 나이도 비슷하고 잘 통했다. 그녀는 정말 멋진 사람이다. 작은 체구에 에너지가 철철 넘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는 현장에서도 중학생들처럼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물론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 대해. 그런 점이 연기에 반영됐던 것 같다.
-왕가위 영화는 종종 재즈의 즉흥연주 같을 때가 있고, 당신 역시 재즈를 기반으로 하는 음악가다. 재즈의 진짜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재즈가 아니어도 음악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난 너무 어려서부터 음악을 했기 때문에(15살) 어쩌면 음악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절실함의 시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왕가위는 나보다 훨씬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다. 그의 다른 영화들을 봐도 내가 만든 음악보다 훨씬 더 좋다. (웃음) 공통점은 재즈라는 장르를 떠나 우리 둘 다 마냥 행복한 음악들보다는 조금 슬프고 가라앉은 음악들, 감성을 자극하는 슬픔에 공감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주요 무대는 뉴욕, 라스베이거스, 멤피스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도시가 있다면.
=물론, 멤피스다. 멤피스엔 묘한 분위기가 있어서 좋다. 길거리 아무 카페나 들어가도 굉장히 좋은 음악을 틀어준다.
-영화든 음악이든 다음 계획을 듣고 싶다.
=물론 음악을 계속 만들고 그것들을 부르는 것이다. 영화에 대해선 일단 많은 공연들이 밀려 있는 상태고 다시 그 결심을 하기 위해선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고만 말해두자.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