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캐서린 헤이글] 서른살에 찾아온 스타덤
2008-03-06
글 : 최하나
<27번의 결혼 리허설>의 캐서린 헤이글

착한 걸까 멍청한 걸까. <27번의 결혼 리허설>의 제인은 답답할 정도로 남 뒤치다꺼리에 전력투구하는 여자다. 아무리 결혼식이 좋다지만, 무료 봉사형 웨딩 플래너를 자처해 남들 결혼식 챙기기에 바쁜 모양새란 오지랖의 경지를 넘어서 거의 자학의 수준이다. 옷장이 미어터지도록 수십벌의 들러리 드레스를 애지중지 보관하고, 짝사랑을 가로챈 동생의 결혼식을 애써 웃는 낯으로 준비하는 제인. 최소한의 영악함도 갖추지 못해 분통이 터지는 그녀의 얼굴을 조금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비록 화사한 금발을 밤색으로 물들이고 나왔지만, 당신이 떠올리는 그녀가 맞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여의사 이지 스티븐스. 바로 캐서린 헤이글이다.

금발 머리에 늘씬하게 떨어진 몸, 시원시원한 눈매. 전형적인 치어리더형 외모의 캐서린 헤이글은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 연예계에 입성했다. 9살 때부터 백화점 카탈로그와 시리얼 광고에 얼굴을 비치던 중 1992년 <사랑과 우정>으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2년 뒤 <아빠는 나의 영웅>으로 주연 신고식을 치렀다. 이후 매니저로 팔걷고 나선 어머니와 함께 아예 LA로 둥지를 옮겨 줄곧 할리우드를 어슬렁댔지만, 업계는 그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LA는 완벽히 다른 세계, 마치 야수와 같은 곳이었다. 금발의 여배우에겐 그저 머리색과 가슴 사이즈에 의존한 역할만이 주어졌다. 그리고 나 또한, 평생 그런 연기만 하게 될 것 같았다.” 10대가 흘러갔고, 다시 20대가 저물어갔다. <언더씨즈2> <사탄의 인형4: 처키의 신부> <100 걸스> <발렌타인> 그리고 다수의 TV영화. 그저 그렇게 미지근한 필모그래피가 쌓여갈수록 갈증은 더욱 깊어졌다. “드라마고 영화고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오디션을 봤다. <펠리시티>에서 떨어졌을 때, J. J. 에이브럼스가 보내준 사과 편지를 2년 동안 냉장고에 보관할 정도였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성공의 기회는 <웨딩 크래셔>의 오디션 낙방을 타고 찾아왔다. 배우를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세우던 차에, <ABC>에서 일종의 ‘땜빵’용으로 메디컬드라마 한편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고, “<ER>도 한편 본 적 없는” 헤이글은 “이거라도 어디야” 하는 마음으로 승선했다. 그리고 임시 편성용 정도로 간주됐던 그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는 예상을 뒤엎고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행운은 잇따라 찾아왔다. 오디션을 보러 온 다른 모든 여배우들이 “돈 주고 잠깐 대사 읽으라 시켰겠거니” 생각했던 세스 로건 앞에서 유일하게 웃음을 터뜨린 헤이글은 주드 애파토우의 <사고친 후에>의 여주인공으로 낙점됐다. 그리고 이어진 폭발적인 성공. 헤이글은 순식간에 줄리아 로버츠와 카메론 디아즈의 뒤를 이을 차세대 “아메리칸 스위트하트”로 부상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살, 젊음의 빛을 모두 탕진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벼락 같은 스타덤이 찾아온 것이다.

속옷 모델로 학비를 벌어 의대 공부를 마친 <그레이 아나토미>의 이지는 차에 친 사슴에게 청진기를 들이댈 만큼 마음이 여리고, <사고친 후에>의 똑 부러진 커리어우먼 앨리슨은 대마초에 찌든 비만형 백수와 대책없는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27번의 결혼 리허설>의 오지랖형 제인에 이르기까지, 캐서린 헤이글은 치어리더형 외모와는 사뭇 다른, 엇박자의 캐릭터로 관객을 매혹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면모는 또한 인간 캐서린 헤이글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가 무섭게, 그녀는 할리우드의 거침없는 목소리로 부각됐다. 헤이글은 작가조합 파업 때 피켓을 들고 앞에서 고함을 질러댄 대표적인 얼굴이었으며, “<사고친 후에>는 여자를 유머도 없고 강박적인 잔소리꾼으로 묘사한, 성차별적인 영화”라고 발언했다가 “배은망덕한 X”로 집중포화를 맞았으며, <그레이 아나토미>의 동료 이사야 워싱턴의 동성애 혐오 발언에 대해 “생각없는 얼간이다. 앞으로 공공장소에서는 입도 열지 말아라”고 신랄한 비판을 퍼부어 지면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다. “여배우들은 자기 견해를 밝히지 않는 것이 이 동네의 룰인 것 같다. 하지만 그딴 건 집어치우라지(screw it)! 내가 열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야?”

놀랍게도 독실한 모르몬교 집안에서 성장한 헤이글은 매일같이 자기 전에 기도를 바치고, 틈이 나면 소파에 앉아 뜨개질하기를 좋아하는 여자다. 하지만 동시에 기자 앞에서 “금발에 나보다 예쁘고 가슴 큰 애들이 LA에 널렸다”고 낄낄대며, 에미상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카메라에 대고 “Shit!”을 외치는 타입의 배우이기도 하다. 때로는 통쾌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종종 아슬아슬한 엇박자. 모든 미디어가 입을 모아 헤이글을 차세대 히로인으로 치켜세울 때, 그녀는 이렇게 응수한다. “난 상업적인 여자다. 언젠가 오스카를 수상하겠다는 웅대한 야심 따위는 없다니까.” 캐서린 헤이글이 대책없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사진제공 이십세기 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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