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 샤리프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되는 <10,000 BC>는 신화가 삶의 일부였던 선사시대, ‘네발의 악마’들에 몰살당한 부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소녀가 매머드 사냥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한 산악마을을 찾아옴으로써 시작된다. 파란 눈의 소녀 에볼릿과 산악마을의 소년 드레. 그날 밤 마을의 정신적 지도자인 ‘늙은 어머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예언을 하고, 드레의 아버지는 부족을 등지고 무엇인가를 향해 길을 떠난다. 혼자 살아남은 에볼릿과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드레는 자라서 연인이 된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그늘에 줄곧 머물러 있던 드레는 매머드 사냥에서 세운 공으로 처음으로 부족의 인정을 받지만 여전히 스스로에 대해서는 어떤 확신도 없다. 다음날 드레의 마을에 ‘네발의 악마’들로 불리는 말을 탄 노예사냥꾼들이 나타나 마을을 불태우고 에볼릿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을 잡아간다. 이제 드레와 그의 일행은 에볼릿을 구하기 위해 눈덮인 산맥을 넘어 정글로 이동한다.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글을 간신히 빠져나온 이들 앞에 놓인 것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그를 관통하고 있는 강이다. 그리고 그 수면 위를 에볼릿을 태운 붉은 배가 유유히 미끄러져가고 있다.
평범한 소년이, 특히 상처입은 소년이 ‘네발의 악마’들에 끌려간 사랑하는 소녀를 찾아 떠난 여정을 통해 영웅이 된다라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가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10,000 BC>는 <인디펜던스 데이> <투모로우> 등의 재난영화들로 흥행감독의 입지를 다져왔던 롤랜드 에머리히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다. 선사시대라는 가상의 과거 공간을 찾기 위해 여러 대륙과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대지의 다양하고 새로운 얼굴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감독은 캐스팅에서도 신선한 얼굴인 스티븐 스트레이트와 카밀 벨을 드레와 에볼릿으로 선택해 주의를 끌고 있다. <10,000 BC>는 뉴질랜드와 케이프타운 등 아프리카 등지에서 촬영이 이루어졌으며 세개의 케이블과 연결된 스파이더캠이 마치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듯한 대지의 얼굴들을 잡아내기 위해 사용됐다.
지난 3월2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호텔에서 이루어진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과 스티븐 스트레이트, 카밀 벨이 참석했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짧은 머리에 체크 무늬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정장 차림으로 나타나 기자들의 질문 하나하나에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이번 작품은 어떤 면에서 당신에게 특별한가.
=다른 세계에 들어가보는 경험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15년 전에 선사시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 계기가 돼 그 이후로 계속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온 것이 <10,000 BC>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구글검색엔진’ 덕을 많이 봤다. 시간날 때마다 구글검색엔진에 10,000 BC로 검색을 돌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상당히 흥미로운 미스터리들이 줄줄이 딸려나왔다. 이를테면 피라미드는 이집트인들이 만든 것이 아닐 수 있다라는 등의 미스터리라든지 잃어버린 문명에 관한 이야기들이 정말 매혹적이었다. 그래서 그런 미스터리들을 이번 시나리오에 적절히 섞어봤다. 그 과정에서 문명의 시초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대의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살았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했다. 역사 속의 인간들은 언제나 ‘현대적’인 것 같다.
-스티븐 스트레이트나 카밀 벨은 새로운 얼굴들이다. 이들과 작업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로케이션 스카우팅을 할 때였다. 문득 대지들이 하나하나 개성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대지의 얼굴들과 조화를 이루며 다가갈 얼굴을 기존의 배우들에서 찾기 힘들었다. 이미 스타로 알려진 얼굴이면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아포칼립토>가 꽤 흥미로운 참조 대상일 텐데 본 적이 있나.
=영화를 평소에 많이 보는 편이지만, 그 작품은 보지 않았다. 멜 깁슨이랑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은 있지만. (웃음)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이기도 하고.
-오마 샤리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내레이션을 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초고에서부터 언제나 있어왔다. 모닥불 앞에서 들여주는 이야기 같았으면 했으니까. 오래전에 누군가가 들려주는 영웅 이야기 같은 느낌. 내레이션은 기본 서사 바깥에서 따로 존재하면서 묘한 분위기를 잡아내준다.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또다시 바꾸고, 그래서 다시 녹음하는 것을 수십번 반복하는 바람에 오마 샤리프가 나중에는 지긋지긋해하더라.
-영화에 서로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 중간자가 통역하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
=나는 외국영화는 적어도 두번 이상 본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수직으로 정보를 읽어내는 것이지 않나. 그런데 자막은 수평으로 스캔해야 하니까 연기의 디테일 등 중요한 정보를 많이 놓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인공 부족들은 특이한 악센트가 실린 영어를 하고, 다른 부족들의 언어는 자막이 아니라 영화 속 통역사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카밀 벨의 캐스팅 과정을 이야기해달라.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시나리오에 충실했다. (웃음) 카밀에게는 요즘 배우들에게서 보기 힘든 고전미가 있다. 어떻게 보면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기도 하고, 이자벨 아자니 같기도 하다. 고전적이면서도 동시에 이국적인 이미지가 무척 매력적이지 않나. 이번이 그녀와 두 번째 찍는 영화인데, 이전작에서 그녀는 대니얼 데니 루이스의 어린 딸로 나왔었다. 그래서 언제나 14살 정도의 소녀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캐스팅 디렉터가 에볼릿 역으로 그녀가 어떻겠냐고 하기에 “너무 어리지 않아?”라고 했더니 “글쎄, 사람들은 자란답니다”라기에 오디션을 봤다. 정말 훌쩍 커 있더라. 스티븐이랑 같이 있으면 참 잘 어울리지 않나.
-찍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날씨. 그야말로 <투모로우>의 복수라고나 할까. 뉴질랜드에 처음 갔을 때, 5월에 내리는 눈은 금방 사라진다고들 했는데, 웬걸 난리도 아니었다. 촬영 첫날부터 내리치는 눈 때문에 촬영을 할 수가 없었다. 영화 속의 눈은 촬영을 하면서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실제 눈이다. 촬영 당시에는 장애물이었지만, 이렇게 완성해놓고 본 화면 속의 눈은 이야기의 표면 위에 하나의 층을 더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데뷔작이 저예산 드라마였던 <프랜즈만>(Franzmann)이다. 한번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
=글쎄. 안 그래도 다음 작품은 이번 작품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작품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긴 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의 모험을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규모가 큰 영화를 만드는 지금 내 자리가 내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비주얼 이펙트를 두고 고민하는 게 너무 좋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늘 너무나 매혹적이다.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컴퓨터그래픽을 따라가는 것이 힘겹지 않은가.
=그게 묘미 아닌가? 이전에 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할 수 있어졌다는 것 말이다. 5~7년 전만 해도 <10,000 BC>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가능하지 않았다. 물의 움직임이나 매머드의 털을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사실 7~8년에 이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따로 리서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내린 결론은 아직은 무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다린 것이다. 참을성이 많이 필요하다. (웃음)
-<인디펜던스 데이> <투모로우> 등 블록버스터의 메가톤을 잡고 있는데, 부담스럽지 않나. <주노>의 감독인 제이슨 라이트먼은 독립영화 연출의 묘미가 그런 부담감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들던데.
=스튜디오에서 날 못살게 굴지 못하게 하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서인지 딱히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없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몇 차례에 걸친 검증 단계를 통해 위험을 최대한 분산시키려고 하니까. 그리고 이제까지 스튜디오에 고용된 감독의 위치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내 프로젝트를 직접 만들어서 스튜디오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여느 독립영화감독 못지않게 독립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할까보다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가에 더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이를테면 한창 <10,000 BC> 후반작업을 하던 차에 프로듀서인 해럴드 클로저랑 점심을 하게 되었다. 둘 다 이 영화 이야기는 더이상 하고 싶지 않기도 해서 요즘 인터넷에 보니 2012년에 지구 종말이 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내가 꺼낸 이야기가 결국 다음 프로젝트인 <2012>로 이어지게 되었다.
-평론가들의 비판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한 인상이다.
=흠. 글쎄. 그냥 여유를 가지려고 할 뿐이다. 평론가는 내 관객 중 아주 극소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니까. 농담이다. (웃음) 이를테면 올해 오스카 노미네이션 및 수상작들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마이클 클레이튼> 정도? 개인적으로 내게 지난해 최고의 작품은 <본 얼티메이텀>이었다. 그렇지만 개인의 선호도에 따른 것이니까 뭐.
-이번 작품을 통해 특별히 깨달은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창조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는 것이었다. 무척 외로울 수밖에 없는, 고된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