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들은 그리움에 몸서리치고 있다. “<뉴하트>가 없는 수요일이라니.” “<뉴하트> 시즌2!” “<뉴하트> 시즌2 하면 주인공 그대루 부탁. ㅠㅠ” 지난 2월28일 종영한 메디컬드라마 <뉴하트>의 식지 않는 인기. <뉴하트>는 사실 방영 초기만 해도 뛰어난 메디컬드라마이자 정치드라마였던 <하얀거탑>과 종종 비교되며 동일 장르의 인기를 이어가보려는 후속작의 의혹을 받기도 했다. 두 드라마는 전혀 다르다. <뉴하트>는 형식과 소재 면에서는 <24> <그레이 아나토미> 등 국내에서도 열광적인 인기를 얻은 미국 드라마들의 영향권 아래 있고 정서적으로는 한국 트렌디드라마와 주말 가족드라마의 전통에 기대어 있다. 병원 내 요직을 두고 권력적인 암투가 그려지기도 하지만 그러한 암투의 중심에 있어야 할 병원장의 존재는 <뉴하트>에서 레지던트 1년차 혜석(김민정)을 배다른 딸로 둔 아버지로서 더 중요하다. 혜석뿐 아니라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흉부외과장 최강국(조재현), 첫사랑을 버리고 조건을 따라 결혼해 살아가는 의사 김태준(장현성) 등 이 드라마의 주요 인물들은 남의 생명을 살리려고 애쓰는 가운데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지키는 법을 깨달아가는 존재들이다. 메스의 느낌은 차갑지만, <뉴하트>의 의사들은 따뜻하다.
그중에서도 지성이 맡았던 레지던트 1년차 은성은 시청자들을 빨아들였던 가장 깊은 블랙홀. 고아원에서 자란 지방의대 출신의 이른바 ‘꼴통’ 의대생이며 외로움과 열등감, 질겼던 첫사랑에 배신당한 상처까지 감추느라 엉뚱할 정도로 밝은 청년이다. 그가 가진 어두움과 밝음의 대조는 드라마에서 가장 극명하다. 지성의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연민을 자아내는 힘이 유독 컸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다른 것보다도 저는 은성이란 친구가 꼴통 같은 게 맘에 들었어요. 겉모습은 밝지만 되게 힘든 일이 많았던 친구거든요. 사랑하던 누나가 있었고, 그 누나랑 오래 동거도 했었고, 연인이자 엄마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방 보증금 빼서 도망가잖아요. 원래는 그 뒤에 얘기가 더 있어요. 그 누나랑 저랑 셋이 같이 살았던 고아원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이랑 나이트클럽 들어가서 방 한칸 얻어서 살다가 거기 불이 나서 그 동생이 죽어요. 근데 그 얘기까지 하면 어린 시청자이 너무 힘들어한다, 너무 어둡다 그래서 뺐거든요. 그런 배경이 있으니까 은성인 그 누나에 대한 애증이 굉장히 깊죠.” 그 누나가, 간이 병들어 피를 토하며 병원에 실려온 날 은성은 혜석을 앞에 두고 옛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털어놓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만다. “안 울려고 그랬어요. 일부러 촬영 들어가기 전에, 울지 말자, 남자가 여자 앞에서 술 먹고 자기 얘기하다 우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울지 말자, 다짐하고 들어가서 찍은 신이었는데, 얘기하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울었던 것 같아요. 한 세 시간 동안.”
<뉴하트>의 은성은 지금까지 그가 맡았던 <왕의 여자>의 순정적인 광해대군이나 <애정의 조건>의 가난하지만 순수한 청년 윤택,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구김살없는 부잣집 도련님 등 마냥 깨끗하고 바른 역할들과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그리고 지성의 본래 모습과는 더 가깝다. “이렇게 말하면 제가 꼴통 될 것 같아서 조심스러운데(웃음) 제가 평상시 집에서 어머니나 여동생 앞에서만 하는 행동들, 그런 걸 좀 끌어와서 했어요. 그래서 절 아는 사람들은 그런 말씀도 하시더라고요. 네가 드디어 연기를 편하게 하기 시작했구나. (웃음)”
네 친구의 우정과 배신을 그린 <숙명>(3월20일 개봉예정)도 <뉴하트>처럼 배우 지성의 공고한 이미지를 뒤집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민(송승헌), 철중(권상우), 도완(김인권)과 막역지우인 영환은 초반부에는 존재감이 거의 없지만 갈수록 의미심장한 눈빛과 짤막한 말들로 영화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중심이 되어간다. 꿍꿍이를 알 수 없는 묘한 존재. 선하고 믿음직한 인상을 보기 좋게 배반하는 인물. “제 자신이 그런 인물을 연기했을 때 어떤 모습일까 저도 궁금하더라고요. 과연 관객이 속아줄까? 그래서 이 작품을 꼭 해보고 싶었고,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도 영환처럼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있다면 선택할 것 같아요.”
군입대 전인 약 3년 전 지성은 <혈의 누>에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노비 화가 두호 역을 연기했다. 그때의 처연한 이미지는 제대 뒤 맞이한 “제2의 연기인생”에 대한 예고였던 건가? 이제 그는 <뉴하트>를 통해 고지식한 이미지의 무게를 덜며 한결 가벼워졌고, <숙명>을 통해 선한 미소와 믿음직한 목소리 이면의 두께를 쌓게 됐다. “다시 스무살이 된 기분이었어요.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정신까지 완전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결국 반복이란 생각도 들고. 그걸 군대에서 어린 친구들과 생활해보면서 느꼈거든요. 내가 너희보다 열살이나 많으니까 내가 형이다, 내가 너희랑 생활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다, (웃음)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들이 저보다 못한 게 없는 거예요. 단지 저는 어른인 척하고 있는 것 같고. 뭔가 다 알고 있는 척하는 것 같고. 그래서 저는 하나에만 집중하기로 했어요. 군대에만. 밖에서 내가 그전까지 뭘 하던 사람이었고 이런 건 다 잊자.” 지성은 <숙명>의 시나리오를 전역 전에 받아봤다. “특별 우정출연이라도 상관없다 그랬어요. 영환이는 그 인물 하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영화 전체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존재예요.” 너무나도 반듯하게 꽉찬 이목구비. 심지어 낮고 안정적인 목소리. 캐릭터만으로 뛰어넘는다는 게 유달리 어려워 보이는 그의 외적 이미지는 앞으로 얼마나 더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될까. 그의 차기작은 미정인 가운데 드라마 <뉴하트>의 시즌2 제작 가능성을 묻자 그가 답한다. “시즌2를 하는 것도 좋겠죠. 그런데 정말 하게 되면 1편과는 당연히 달라야 할 것 같아요.” 그것이 짜릿한 배신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