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목적지 없는 여행의 두려움
2008-03-13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밤과 낮>이 보여준 홍상수 영화의 변화… 그곳에 출구는 없다

<밤과 낮>에 등장하며 포스터에도 사용된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1866)에는 벌거벗은 여인의 벌어진 사타구니가 그려져 있다. 외음부의 형상, 체모의 결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이 그림은 포르노의 시대인 오늘의 눈으로 봐도 뻔뻔스러울 만큼 직접적이고 자극적이다. 하지만 그 감각적인 직접성은 동시에 당대에 대한 대담한 논평이다. 그 논평은 신과 영웅을 그린 ‘고결한’ 회화들의 위장된 외설성을 겨냥한다. 예컨대 역시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1863). 여신은 마치 성애의 절정에 이른 여인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온몸을 교태스럽게 비틀고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비롯되고 귀결될 부위는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

쿠르베는 위장이 불가능한 앵글을 택하고 심지어 모델의 두 다리를 벌려 그 많은 ‘고결한’ 그림들이 그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가렸던 질과 체모를 화폭의 한가운데 놓는다. 게다가 얼굴은 시트로 가려져 있다. 그 대담성과 도발성으로 당대의 비평가들을 격분시킨 마네의 창녀 누드화 <올랭피아>(1863)조차 여인은 손으로 그곳을 가린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음란하며 저속하다고 종종 비난받은 쿠르베는 자신을 방어하기는커녕 더 밀고 가며 이죽거렸던 것 같다. ‘(고결한 그림을 찬미하는) 당신이 정말 보고 싶어하는 건 이거 아냐?’(이 그림을 40년간 비밀리에 소장한 자크 라캉은 ‘X’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것을 ‘비어 있는 중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홍상수의 영화와 쿠르베의 그림이 공유한 점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이 장면에는 더 많은 요소들이 겹쳐져 있다.

<돌깨는 사람들>과 <세계의 근원> vs 노동과 성애

파리로 도망친 40대 화가 성남이 현지 유학생 현주와 오르세 미술관에 갔을 때 정작 보고 싶었던 그림은 쿠르베의 다른 그림 <돌깨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누더기가 된 작업복을 입고 돌을 깨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이는 두 석공의 한없이 계속될 듯한 고단한 노동의 형상. 홍상수는 정말 <돌깨는 사람들>을 영화에 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그림은 2차대전 중에 폭격으로 소실된 지 오래였다. 그의 카메라를 맞은 건 더없이 음란한 질의 자태였다. 노동의 형상을 만나러 간 자리에 불현듯 나타난 성애의 찬가. 도착지는 티켓에 표기된 목적지가 아니며 여행자는 늘 낯선 곳에 내려진다. 이곳은 그러나 낯선 만큼 낯익다. 두 형상에 어른거리는 민중의 벗이자 음란한 도발자 쿠르베라는 하나의 얼굴(<밤과 낮>의 최초 제목은 ‘파리의 굴’이었고, 굴은 먹는 굴과 동굴, 그리고 그 양자가 은유하는 여성의 성기, 후자가 뜻하는 은신처의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

감독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이 이상한 우연은, 다시 우연하게 노동의 실패 혹은 회피 그리고 성애의 1회적 성공이라는 성남의 파리 여행에 대한 느슨한 자기 은유가 된다. 중첩된 우연이 텍스트 안팎에 걸쳐 빚어내는 유사성과 차이들의 기묘한 연쇄. <밤과 낮>을 보는 유일한 방법은 이해가 아니라 동행이다. 동행하며 불현듯 등장했다 사라지고 비슷하지만 다른 형상으로 되돌아오는 것들을 응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해지는 건 그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돌깨는 사람들>은 돌아온다. 오르세에서 돌연한 음란화를 만났을 때 성남은 그 곁에 선 현주의 성기에 관심이 없었다(오히려 현주쪽에서 관심을 보인다). 성남은 며칠 뒤 파리의 거리에서 두 인부가 <돌깨는 사람들>과 비슷한 구도로 굴착기로 돌을 깨고 있는 광경을 만난다. 이 장면 역시 트리트먼트에 없던 것으로 현지에서 즉흥적으로 촬영되었다. 그 광경을 지나쳐 성남은 유정의 방으로 걸어간다. 그는 지금 유정의 성기에 목말라 있다. 방에서 성남은 유정의 그림을 찬미하며 가까스로 키스에 성공한다. 두번의 외적 우연에 힘입은 이 아이러니한 배열은 그러나 아이러니의 도식에 머물지 않고 대상의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에로영화에서 남근의 은유로 흔하게 등장하는 굴착기는 여기서 노동에서 성애의 이미지로 번져간다. 이 불안정한 배열은 나중에 성남이 민박집 계단을 닦고 있는 동안 한 여인이 핫팬츠 차림으로 내려오는 장면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노동과 성애, 그리고 재현과 실재가 비스듬한 대칭을 이루기도 하고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자리를 바꾸면서 서로에게 번져간다.

성남만큼 불안한 인물은 없었다

두 장면이 이 영화에서 특별히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쿠르베의 두 회화로 환유되는 노동과 성애의 대비를 말하기 위해 인용했다. 이 대비가 당연하게도 <밤과 낮>의 모든 것을 말하진 않지만, 홍상수 영화의 흥미로운 변화와 연관돼 있다. 본론과 여담의 구분이 없는 홍상수 영화에서 대구의 구성은 그의 비관습적 서사를 방문한 이에게 일종의 이정표 같은 것이었다. 일기처럼 34일간의 생활이 불균질하게 나열된 <밤과 낮>에는 그런 이정표가 없다. 이 여행은 홍상수 영화에서도 가장 불안한 여행이다. 플롯의 성격에서 비롯된 관람자의 불안이 영화의 주인공인 성남의 불안과 직접 연관돼 있지는 않지만 그것과 공모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성남만큼 불안한 인물은 없었다. 그는 스스로 휴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 때문이긴 하지만 안전한 거처에서 추방당했다. 파리의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가 불길한 웃음을 흘리는 낯선 파리 사내로부터 들은 말은 “조심해라”였다. 구름을 그리는 화가인데도 그는 파리에서 붓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구름을 그리지 않는 게 아니라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가 찾으려 한 그림은 기라성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그려낸 그 눈부신 구름과 하늘이 아니라 사라진 <돌깨는 사람들>이었다. <밤과 낮>에는 노동에 대한 이상할 만큼 강렬한 매혹이 있다. 투명하고 단단한 노동의 형상에 대한 매혹. 돌 깨는 인부들, 개똥을 쓸어내리는 청소부, 벽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꾼의 모습이 등장할 때마다 베토벤 7번이 웅장하게 울려퍼지고 이 뜬금없는 장면들이 이상하게 심금을 울린다. 이 장면들에서만큼은 홍상수의 카메라는 쿠르베의 붓을 닮아 있다.

홍상수의 카메라는 노동의 형상에 매혹되지만, 성남에게 노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양자는 거의 함께 가지만 간혹 이상한 거리를 드러낸다). 전작 <해변의 여인>에서 홍상수의 인물은 처음으로 노동의 시간을 살아간다. 여전히 일과 뒤 혹은 휴가의 시간과 뒤섞여 있다 해도 <밤과 낮>에서 성남의 노동은 더 현실적이고 비로소 규범적이다. 성남에게 노동은 스스로에게 부과한 과제 같은 것이 아니라 배고픔과 직결된 문제다. 그는 굴을 먹고 싶지만 돈 걱정으로 침만 흘리고, 접시라도 닦겠다며 한인 식당에 찾아간다.

성남에게 노동을 강제하는 곤궁은 일시적인 것이지만(그는 문제가 해결돼 집으로 돌아가면 생계 걱정을 할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노동허가증이 없어 파리의 식당종업원조차 될 수 없는 그는 화가로서의 노동을 지속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원한 추방을 두려워할 때, 성남은 노동을 매개로 그를 추방할지도 모를 체제 혹은 현존 질서를 홍상수의 인물로선 처음으로 대면한다. 법적 규범의 이름으로 그를 파리로 내몬 그 질서는, 북한 유학생을 만났을 때 그와 함께 있기를 두려워하는 이데올로기적 공포로 재등장한다. 이 대목은 예기치 못한 유머로 가득하다. 북한 유학생과 재회한 뒤 팔씨름을 벌이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한데 그것은 성남이라는 정치적 무뇌아가 어떤 지성도 가릴 수 없는 우리 마음속 깊은 불안을 드러낸 뒤 그것과 화해하기 위해 벌이는 유치한 안간힘이 지닌 극도의 단순성, 그 투명함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매혹과 태아에 대한 죄의식

성남의 불안은 견고한 노동에 대한 매혹뿐만 아니라 아기에 대한 집착 혹은 위태로운 태아에 대한 죄의식과도 연관된다. <밤과 낮>의 여정에는 아기가 모습을 바꾸어가며 수시로 등장한다. 성남은 10년 만에 만난 옛 연인 민선에게서 자기의 아이를 여섯번 지웠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는 한 재불 화가의 아기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유정의 몸을 찾아 그녀의 방에 와서도 창밖으로 유모차에 탄 프랑스 아기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며칠 뒤에 길을 걷다가 뜻하기 않게 자기 어깨로 떨어진 어린 새를 구한다. 어린 새는(같은 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남이 파리를 떠날 때 공항에 갇혀 퍼덕거리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는 지금 임신했다는 아내의 거짓말을 믿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중이다. 그런데 조금 전에 유정으로부터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왔다.

유정의 몸속에 있을지도 모를 태아는, 서울에 돌아온 성남의 꿈에서 백자 도자기로 변형되어 등장한다. 꿈속의 아내가 실제 아내가 아님은 물론 유정도 아닌, 파티에서 잠깐 본 또 다른 유학생 지혜라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세계의 근원>의 여인은 얼굴이 가려져 있다). 성남은 지혜에게 그 백자를 아픈 ‘그 사람’에게 주자고 말하고 지혜는 ‘형님’(아마도 성남의 현실 속의 아내)이 좋아할 것 같다며 동의한다. 성남과 길을 가던 지혜는 자전거가 치이면서 들고 있던 백자를 떨어뜨리고, 백자는 깨진다. 성남은 험하고 독한 욕설을 지혜에게 퍼붓는다. 성남은 태아의 죽음을 괴로워하거나 반성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두려워할 뿐이다. 그는 지금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중이다. 성남은 윤리의 인간이 아니라 두려움의 인간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토록 두려워한 인물은 없었다. 두려움 때문에 구애를 망설인 인물은 아마 그가 처음일 것이다. 파리에 온 것부터 소심함 탓이지만 옷을 벗으려는 옛 연인을 그녀의 남편이 두려워 막았으며, 꿈에서조차 갈망하던 여인의 발가락만 빨다가 야단을 맞는다. <밤과 낮>의 성애는 그 자체로 서사의 줄기를 형성해가는 게 아니라 노동의 세계와 때로 서로에게 흘러들지만 종종 긴장하고 대립한다. 위험한 태아에 대한 두려움도 성애를 종종 지체시킨다. 홍상수 영화에서 콘돔이 등장한 것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여기선 두려움의 대상이 성병이었다) 이후 처음이다. 성애가 지체되고 유보되는 동안 성남은 견고한 노동의 형상과 정치적 질서의 흔적과 아기의 존재와 부재를 순례한다.

섬뜩할 만큼 삭막한 라스트신

성남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것을 두고 성숙이나 발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홍상수는 구조를 느슨하게 하면서 인물과 상황들에 현실세계의 더 많은 요소들을 끌어들였고, 그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밤과 낮>은 그의 가장 사실주의적인 영화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서울에 돌아온 성남의 꿈 시퀀스의 한 장면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지혜는 성남과 함께 ‘형님’ 댁에 도자기를 들고 방문하기로 하고, 대중탕에 간다. 큰 욕조에 앉은 지혜는 울고 있고 목욕탕은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차 있다. 이때 목욕탕 벽의 상단 창문에서 무언가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클로즈업된 창문에는 수증기 너머로 돼지 머리처럼 보이지만 형체가 불분명한 무언가가 창문 밖에서 창 유리를 계속 들이받고 있다.

꿈속의 꿈 같은 이 장면이 주는 괴기스런 감흥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따져보면 인서트 컷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신에 등장했던 성남이 이 신에는 나오지 않는다. 여탕이니까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신은 지금 성남이 꾸고 있는 꿈의 한 장면이다. 그 물체는 무엇일까. 그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갇힌 곳에서 탈출하려는 것일까. 혹시 여인의 몸을 향한 성남의 욕망일까. 아니면 그의 두려움의 대상이 물질화된 것일까? 아니면 혹시 죽음을 예감한 태아 혹은 죽은 태아의 또 다른 변형일까. 홍상수는 특정한 상징이 되도록 설계하지 않았고 이 장면은 불안과 불길의 예감으로 목적지의 평온을 뒤흔든다.

괴이한 꿈 시퀀스에 이어진 라스트신에 대한 찬탄의 마음을 숨기기 힘들다. 지극히 낯익고 평이한 표면에 그토록 무서운 감정을 실어나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라스트신을 보기 전엔 믿기 힘들다. 아내가 성남의 잠을 깨워 꿈결에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 성남을 다그친다. 성남이 “그건 꿈이야”라고 말하자 아내는 “그런 건 꿈 아냐”라며 언성을 높인다. 짧게 언쟁을 한 뒤 그들은 다시 껴안고 침대에 눕는다. 카메라는 틸트업해 침대 위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비춘다. 성남이 그렸을 그 그림엔 맑은 하늘에 양떼처럼 깔린 구름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이 라스트신에서 밝고 귀여운 면을 더 많이 보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홍상수는 어떤 신에서도 한 가지 결의 감정만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 신만큼은 섬뜩할 만큼 삭막하다고 나는 느낀다. 이 공간은 특별한 방식으로 찍혀 있다. 홍상수는 대개 창문을 후경이나 한쪽 측면에 걸고 실내장면을 &#52238;는다. 그런데 이 라스트신의 프레임에는 창문은 물론 문도 보이지 않는다. 파리의 민박집에서 성남이 끙끙 앓고 있던 2단침대가 놓인 방을 떠올려보라. 그곳은 초라하고 어지러웠지만 커다란 창문 너머에 햇볕이 내리쬐고 누군가가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라스트신의 부부의 침실은 대단히 우아하고 세련됐지만 이 프레임에는 출구가 없다. 이 신의 느낌은 평온보다 폐쇄공포증적인 분위기에 가깝다.

더 삭막한 건 부부의 표정과 말투다. 아내의 말투는 독기도 있고 애교도 있지만 이상하게 건조하다. 그런 말투를 지녔을 수 있다. 문제는 성남이다. 파리에서의 성남이 마침내 유정에게 “나, 너랑 자고 싶어”라고 말해 세번 뺨을 맞은 뒤에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 유정이 “맞아도 소용없네”라고 힘없이 말했을 때, 나는 그 장면에 마음이 흔들렸다. 성남이 그렇게 말할 때 유정이 그림 표절로 이미 미술학교에서 쫓겨났는데도 학생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성남의 담담한 말과 표정에는 의심할 수 없는 절실함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감정을 드러내고도 그는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음날 돌아온 사람이다. 아내에게 건네는 성남의 말에는 온기가 사라져 있다. 게다가 그는 막 유정도 아닌 지혜의 꿈을 꾸었고, 꿈에서 그녀를 가혹하게 쫓아보냈다. 그는 지금 이곳에 속해 있지 않다. 실은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다.

라스트신의 마지막에 배치된 구름 그림은 짐작과는 달리 이 신의 삭막한 분위기를 강화한다. 미술적 가치는 알 수 없지만 그 그림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불편하고 섬뜩하다. 자연을 징그럽게 교묘히 모조한 이 인공의 자연은 성남 부부의 우아하지만 메마른 폐쇄 공간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장식품이다. 성남의 불안과 두려움의 여정이 막 끝났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라 잠시 돌아온 것뿐이다. 실은 돌아온 것도 아니다. 그는 아직 떠돌고 있다. 여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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