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절벽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유리구였다. 돔의 이름은 ‘종을 떠난 종소리’. 쥐고 흔들면 하얗게 흩날리는 눈꽃이 천천히 낙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그랗게 밀봉된 고요. 유리구 안에는 절도 없고 종도 없었지만 종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떠나온 소리였고, 그래서 울림의 시원(始原)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리없는 소리’였다. 오래전, 먼 곳에서 출발해 비로소 나에게 도착하는 소리. 그 자장의 끝, 가장 나중에 그려지는 동심원 바깥에 내가 서 있는 기분. 눈송이가 전부 가라앉으면 그걸 다시 흔든 뒤 잠자코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정작 종을 떠나온 것은 종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 것들이 떠올랐다. 믿기지 않을수록 되풀이하여 말하는 게 좋다고 했던가. 사람들이 스노볼 뒤집는 모습을 볼 때면, 그들 모두가 의외로 시시한 눈(雪)의 속도에 집중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여전히 ‘시간’ 혹은 ‘시간성’ 앞에 당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종을 떠난 종소리’란 말이 나란히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쉬거(하비에르 바르뎀)가 즐겨 던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아름다운 것만큼 비정한 건 없다는 생각 탓이었는지도. 적요만큼 역동적인 건 없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종을 떠난 종소리, 그 스노볼의 이름을 하이쿠에서 따온 거란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소설을 영화화한 거지만, 장면 곳곳에서 하이쿠의 정갈한 회화성이 느껴진다. 원작의 문체가 간결하고 선명한 동시에, 영화의 미감이 단정하다 못해 고고한 까닭이다. 하이쿠 한수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홉개의 눈 쌓인 산에 움직이는 거라곤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
형식의 제한은 경제적 압축성을 낳고, 정적(靜寂)인 풍경에선 작은 바스락거림 하나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숏(shot)이 곧 샷(shot!)이 되는 모양새랄까. 코언 형제가 영화에 하이쿠를 적극 도입했다고 보진 않지만, 하이쿠적 미의식을 얼마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서조차 나무 두 그루, 구름 한점만으로도 긴장감을 만들어낼 줄 아는 감각이, 선과 빛, 사물의 배치와 배열을 관습적이되 상투적으로 다루지 않는 솜씨가 그러하다. 영화적 품위랄까, 장르의 자기 객관화와 자기 긍정이 동시에 높아지는 경지랄까. 이 영화가 하이쿠처럼 허무 가까이 붙어 있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리라. 텍사스의 시원한 지평선마냥 영화 곳곳에 놓인 여백과 생략은 ‘트인 것이 왜 농밀한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듯하다. 영화는 이미 떠난 종소리를 들려주지 않고, 그 소리가 거기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폐허가 만들어내는 우울은 그것이 소멸을 나타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예전에 무언가 ‘있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데서 온다. 이를테면 아버지들, 말을 타고 우리 앞을 지나가는 망토 쓴 노인과 같은 이들을 말이다. 하나 쉽게 역사적 비애에 젖어들기엔 코언 형제가 고른 땅의 습도가 너무 낮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면에서 다행이다. 비극은 백주에 청명하게 찾아온다. 사람들은 총성을 들은 영양떼처럼 작은 두려움을 피해 더 큰 어둠 속으로 도망치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냥꾼은 지금도 계속 사냥 중일 것이다.
화면 위, 텍사스 햇빛 아래 바싹 마른 허무가 보인다. 길 위에 고요히 쌓여가는 시체가 보인다. 단발머리 살인마의 얼굴은 코언 형제가 자신들 특유의 유머감각을 애써 절제하려하는 표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느 작가는 ‘악이란 게 가만 보면 되게 웃겨요’라고 말하던데. 막상 그 웃김을 좇던 보안관의 마지막 얼굴은 길 잃은 아이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다. 하나 노인은 울지 않는다. 그의 부인 역시 서둘러 위로하지 않는다. 그리고 침묵. 조금 더 침묵. 그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좀더 궁리해볼 일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엔 절도 없고 종도 없지만, 종소리가 있다. 설산 속 까마귀 눈동자처럼 그 소리가 내 속에서 크게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