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전영객잔’ 코너에서 허문영 평론가는 <밤과 낮>에 관해 “나는 이 라스트신에서 밝고 귀여운 면을 더 많이 보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썼다. 홍상수가 더 밝아졌고 가벼워졌다는 평이 많았던 터라 그의 지적은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말이었다. 나 역시 홍상수가 이번 영화에서 밝아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아니, 홍상수의 어떤 영화보다 어둡고 우울하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는 라스트신의 그림을 보면서 생지옥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길 위에서 끝을 맺은 전작들과 달리 안온한 가정으로 복귀했을 때 맞이하는 폐쇄공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밤과 낮>을 보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납덩이처럼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는 질문이다.
<밤과 낮>이 무슨 얘기를 하는 영화인지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고 한다. 지금까지 홍상수 영화가 그래왔기 때문에 <밤과 낮>의 평은 대체로 홍상수 영화의 형식미에 집중한다. 겉으로 무의미해 보이는 장면들이 겹치고 배열되는 방식에 따라 웃음도 생기고 깊이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홍상수의 모든 영화에 적용될 만병통치약으로 <밤과 낮>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무리를 해서라도 <밤과 낮>의 이야기를 일관된 맥락으로 정리해보고 싶은 욕망이 든다. 나는 <밤과 낮>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도망 혹은 회피라고 생각한다. 성남이 파리로 간 이유부터가 그렇다. 그는 대마초 피운 사실로 벌을 받을까 두려워 도망을 쳤다. 그런 다음 성남은 파리에서 오래전 사귀다 헤어진 여자를 만난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다 뒤늦게 깨닫고 난처해진다. 짐작건대 성남은 그녀에게서 도망친 적이 있으며 파리의 호텔방에서 성경 말씀을 핑계삼아 다시 한번 도망친다. 그렇게 계속 피해다니기만 하면 괜찮았겠지만 욕정이 끓는 남자의 몸에서 도망칠 수 없는 성남은 파리의 유학생 유정을 만나 억눌린 욕정을 해소할 기회를 엿본다. 겁이 많은 그는 꿈을 꾸더라도 남자답게 하지 못하고 유정의 발가락을 빤다. 여차하면 내빼려는 성남의 찌질한 면모는 파리에서 북한 유학생을 만났을 때 절정을 이룬다. 북한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이데올로기적 공포로부터의 탈주. <밤과 낮>은 성남의 34일간의 도주기록이다. 그는 아내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 파리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마지막 도망을 결행한다. 이제 홀로 남은 유정은 어떻게 될까? 영화의 전반부에 나왔듯 성남은 예전에 사귀었던 여인을 쉽게 잊은 적이 있다. 영화의 중반부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던 걸 돌이켜보면 유정도 성남의 옛 애인과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른다. <밤과 낮>의 후반부가 불길한 분위기로 휩싸이는 건 지금까지 성남이 했던 행동과 그 결과를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다.
성남의 마지막 탈주는 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꿈속에서 그는 쌍욕을 해댄다. 지금까지 해온 짓으로 보건대 그 욕은 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할 것이지만 꿈에선 정반대다. 그런 다음 토라진 아내를 다독이고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그렇게 성남의 탈주는 성공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것이므로 홍상수의 표현에 따르면 구원 혹은 구제되었다. 그런데 왜 이리 갑갑한 마음을 가눌 길 없는가? 아무래도 홍상수는 구원이라는 말을 흔히 쓰는 정반대 뜻으로 쓴 것 같다. 어린 새를 구해주는 선행을 한 적도 있지만 성남은 이리저리 도망치러 다니는 동안 적지 않은 악행(?)을 저질렀다. 몇번의 낙태를 경험했던 한 여자는 죽었고 다른 한 여자는 임신을 한 채 버림받았다. 그가 모든 것을 잊고 평온한 잠에 빠질 수 있을까? 성남의 악몽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니 암울하고, 성남이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맘 편히 잘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암울하다. 탈주의 욕망을 억눌러놓은 그의 집은 이제 그의 영혼이 갇힌 감옥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밤과 낮>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영화 같다. 장르적 문법이나 카타르시스에 기대지 않고 만든, 가차없는 홍상수식 리얼리즘의 운명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