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VS] 어떤 헨리 8세가 더 유치해?
2008-03-20
글 : 오정연
영화 <천일의 스캔들> vs TV시리즈 <튜더스>

젊어 사망한 형의 부인과 결혼한 뒤,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국교를 바꾼 헨리 8세. 여섯 부인 중 두명을 처형했던 이면에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 무자(無子)하리라’던 성경 문구를 두려워하던 수컷의 본능이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아들이 10살의 나이로 뒤를 이었으나 16살에 요절하고, 가장 큰 희생을 치르며 이별했던 첫 부인이 낳은 딸이 결국 여왕이 되었지만 국교를 되돌리기 위해 무자비한 박해를 일삼은 ‘피의 메리’로 더 유명하며, 떠들썩하게 사랑하고 이별했던 두 번째 부인 앤 볼린이 낳은 딸은 그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전성기를 이끌며 평생 처녀로 살았다. 역사상 가장 장대한 스케일로 치사했던 스캔들. 숱한 텍스트로 무한반복될 만하다. 모든 판본을 비교분석하픈 맘 굴뚝같지만, 스캔들은 길고 지면은 좁더라. 최근 개봉작 <천일의 스캔들>과 인기 TV시리즈 <튜더스>만으로 만족해주시길.

<천일의 스캔들>
TV 시리즈 <튜더스>

헨리 8세, 누가 더 유치한가

<천일의 스캔들> 승!

<천일의 스캔들> 눈에 띄는 여자가 있으면 “오늘밤”이라는 한마디면 족했거늘, 두세번에 걸쳐 이뤄진 선물공세를 앤이 계속 거절하자 짜증이 극에 달한다.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까지” 마음을 사려 했던 앤이 여전히 튕기자 결국 폭행에 가까운 첫 관계를 맺는다. 갖고 싶은 걸 손에 넣지 못하면 포악해지는, 7살 남아의 정신연령. 애초 볼린가(家)의 대표선수 앤을 내친 이유가, 함께 사냥에 나갔다가 혼자 낙마한 수치심이었음을 떠올릴 때, 좌우명은 폼생폼사.

<튜더스>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를 앞세운, 역대 가장 섹시한 헨리 8세. 승마, 테니스, 레슬링 등 온갖 스포츠를 섭렵하고, 유유상종 친구들까지 합세하여 침대 위의 황홀한 복근을 심심찮게 드러내주신다. 말 위에서 겨루는 창시합에 직접 출전하거나, 별다른 이유도 없이 깃대로 웅덩이 뛰어넘기 등을 시도하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안습’ 상황을 연출해도, 이후의 어색함을 멋지게 무마하는 걸 더욱 중시한다. 17살 남고생 정도의 정신연령. 프랑스 왕에게 레슬링에서 패한 뒤 조약을 무효화하겠다며 난동을 부리고, 누이와 몰래 결혼한 친구를 용서할 것인지의 여부를 팔씨름으로 결정하는 태도로 미루어, 그 이상은 절대 무리다.

앤 볼린, 누구 사랑이 진짜인가

<튜더스> 승!

<천일의 스캔들> 순백의 캐릭터 메리와의 대비가 주된 갈등이 되다보니 스캔들의 핵인 앤은 그야말로 성격파탄자 수준이다. 동생이 왕의 아들을 낳는 현장에서 왕의 구애를 의기양양하게 받아들이는 악랄함에, 아들이었던 둘째아이를 유산한 직후 왕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전전긍긍하다 오빠에게까지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엽기적인 행태를 일삼다보니, 그가 진짜 헨리 8세를 사랑했는지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튜더스> 실제로는 헨리 8세와 정식 남편 사이에서 아비를 구분할 수 없는 아들을 낳았고, 프랑스 궁정에서 보냈던 소싯적에는 프랑스 귀족과 염문을 뿌리는 등 앤 못잖은 과거를 자랑했다는 메리. 헨리 8세가 메리에게 싫증을 낸 이유를 타산지석 삼은 앤은 우리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밀고당기기 전략을 구사한다. 베갯머리 송사를 위해 파견된 첩자와 진짜 사랑 앞에서 설레는 여인을 오가지만, 앤을 맡은 배우의 2% 부족한 외모 덕에 본의 아니게 시청자의 짜증을 유발하고 말았다.

주변 인물, 누가 더 돋보였나

무승부, 아마도…

<천일의 스캔들> 왕이 애인을 급구한다는 소식에 첫딸을 내세웠다가 일이 꼬이자 유부녀인 둘째를 들이밀고, 애까지 밴 둘째가 다시 왕의 눈 밖에 나자 짜증스럽게 내쳤던 첫딸을 급히 불러들이는 볼린씨의 궁색함은 끝이 없어라. 왕과 밤을 보낸 조카를 불러내어 ‘몇번이나 관계했냐’고 묻는 삼촌도 만만찮다. 반면 변덕쟁이 왕 덕분에 두딸과 외아들이 모두 비참하게 목이 잘리거나 시골에서 은둔하는 참사를 겪은 비운의 어머니 볼린 부인의 캐릭터는 각종 버전의 앤 볼린 이야기 중 가장 사실적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왕에게 바친 메리의 칠푼이 첫 남편을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앤의 남매 조지의 부인으로 둘의 관계를 고자질한 음험한 여인으로 얼굴을 비춘 주노 템플이 <어톤먼트>에서 로비를 감옥으로 보내버린 폴과 롤라 커플이었다는 사실은, 의도치 않았던 재미를 선사한다.

<튜더스> 러닝타임이 넉넉한 TV시리즈이다보니 당시의 실존 인물은 물론 입체적으로 배치된 주변 인물이 제법 풍성하다. 교황과 헨리 8세의 정면승부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울시 추기경,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 등은 세계사 교과서에서만 접했던 유명인. 포르투갈의 늙은 왕과의 정략결혼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는 헨리 8세의 독한 누이 마거릿, 이 당돌한 공주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 헨리 8세의 절친한 친구 찰스 등은 배우의 면모가 흥미롭다. 마거릿 역의 가브리엘 앤워는 <여인의 향기> 속 바로 그 탱고녀(女). 찰스 역의 배우는 그닥 유명할 이유는 없지만 외모는 매우 훈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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