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안정숙] “새 정부가 지난 노력들을 무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2008-03-19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에서 영화인으로 돌아온 안정숙

“다 까먹었는데….” 임기 만료를 두달여 앞두고 사의를 표한(<씨네21> 644호 국내리포트) 안정숙 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물어봐도 딱히 대답해줄 것이 없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는데, 알고 보니 순거짓이다. 영화계의 산적한 문제들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뷰가 옮아가자 연달아 한숨이다. 수익률 악화에 한숨, 부가판권 붕괴에 한숨, 해외수출 감소에 한숨…. 영화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미리 자리를 뜬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으나 조력자로서의 최선을 다했는가 자문할 수밖에 없는 한국영화의 위기 상황이 부담을 더 가중시켰을 것이다. ‘공익근무’를 마치고 ‘영화인’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어깨가 무거운 그를 만났다.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지난해 하반기에 비쳤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상 퇴임 시기도 올해 초였고.
=일찍 나와야겠다는 생각은 좀 오래전에 했다. 영진위가 지난해부터 기금 위탁을 하다가 올해부터 기금관리기구가 된 것과도 관련있다. 2009년 예산을 5월 말까지 짜야 하고 6월에는 기획예산처로 넘겨야 하는데 새 위원회가 꾸려지는 것도 딱 그 시점이다. 올해 예산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다음 위원회의 내년 예산까지 3기 위원회가 짜는 게 모양새가 좀 그렇더라. 수정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직접 만드는 것과 추후에 수정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잖나. 그런데 그 와중에 일각에서 영진위 해체론을 들고 나섰고, 결국 물러서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지 않겠다 싶어서 접었던 거다.

-처음 말을 꺼냈을 때 내부 반응은 어땠나.
=사실 영진위의 동료들에게 가장 미안하다. 그런 말을 하면 조직이 흔들릴 수도 있어서 사실 공표를 하지 않았는데 영화계가 워낙 투명하잖나. (웃음) 어느 순간 소문이 바깥에서 안으로 돌아오더라. 그렇다면 빨리 정리해야겠구나, 내가 나와야 임원추천위원회 구성이 더 앞당겨질 수도 있는 것이고.

-사의를 표한 데는 ‘개인적인 사유’ 또한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들었다.
=아는 사람 다 알지만 내가 정치인의 아내라는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빵점이다. 그나마 남편(원혜영 통합민주당 의원)이 각자 일 열심히 하자고 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10년 전에 300여표 차이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때 처음으로 미안했다. 남편이 부천 시장할 때도 누군가가 나보고 시장 부인이 할 일이 더 많다고 해서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러더라. “내가 시장이지 당신이 시장이냐”고.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이 먹어서 그런가. (웃음) 여성주의자로서의 역할도 있지만, 같이 사는 사람한테도 한번은 잘하고 싶기도 하고. 상황이 아주 좋다면 나 몰라라 하겠지만.

-며칠 전 전화통화하면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 때야 여자들은 결혼하면 일을 그만둬야 했다. 육아나 가사에 대한 책임 때문에. 그게 여성들에 대한 불신을 축적시키기도 했고. 물론 지금이야 남성들도 휴가내고 아이를 보는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그런 부담스런 시선들이 남아 있다. 80일 정도 남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해 부끄럽다.

-이번 결정과 관련해서 혹시 여성 후배들에게 비난을 듣진 않았나.
=아직까진 없다. 좀 봐주세요 했더니 외려 위로들을 해준다.

-4기 위원회 구성과 관련해서 영화계 내부에서는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10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좌파 적출 발언까지 나오지 않나.
=영화진흥공사가 영진위로 바뀌던 시점을 떠올려야 한다. 과거 영화진흥공사 사장은 주로 정치권력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예비역 장성들의 몫이었다. 물론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같은 예외도 있지만.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베를린영화제에서 칼리가리영화상 수상을 했으나 정작 국내에 돌아와서는 영진공의 허락을 받지 않고 출품했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다. <파업전야>의 페사로 영화제 상영 때 영진공은 직접 공문을 보내 영화상영을 막으려 했다. 영진공은 정부의 검열과 통제 정책을 관철하는 데 앞장서기 바빴다. 그런 영진공을 영화인들이 합심해서 바꿔냈다. 간섭하지 않고 지원하는 기구로 말이다.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보수의 목소리들이 있다.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도 않다. 성숙한 우리 사회가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다. 그럼에도 기성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퇴보 논리를 펴는 것은 참기 어렵다. 문화는 기존 가치의 온존이 아니라 전복에서 나온다. 새로운 정부가 지난 10년의 노력들의 성과들을 모두 무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얼마 전 유인촌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사실 영진위의 경우 새 정부 아래서 다른 유관 기관과의 확인되지 않은 통합설이 돌기도 했다.
=당면 과제들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지금 내 상황에서 그걸 일일이 말하긴 그렇고. 영화인 복지문제를 포함해서 영화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 무엇을 개선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과정에서 영진위의 태생과 역할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전했다. 통합설이 어떤 맥락에서 돌았는지는 모르지만, 무조건적인 통합에 반대한다. 덩치가 커지면 관료주의가 개입을 하고 부문간 효율성이 문제시된다. 감히 말하자면 영진위는 어떤 단체보다 효율적인 상태다. 기계적으로 결합할 경우 효율성이 손상될 것이라고 본다.

-발언이 부담스럽겠지만 4기 위원회 구성에 바라는 점이 있나.
=영화계의 경우, 현장 영화인들의 참여가 여전히 절실하다. 현장 영화인들이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먼저 캐치할 수 있다. 이해에 얽매일 수 있다는 기우를 근거로 현장 영화인들의 참여가 배제돼선 안 된다. 또한 영화인들뿐만 아니라 바깥의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모셔야 한다. 영화계의 문제이지만 영화인들만의 힘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방송, 경영, 회계, 법률 분야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3기 위원회 또한 현장 대표성과 전문성을 갖춘 진용으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았나.
=독립영화 전용관 확보를 포함 실용적인 다양성 영화 정책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던 김동원 위원이 있었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가 다양성영화소위원회를 이끌면 사무국과 발맞췄기 때문에 시네마테크까지 포함하는 안정적인 복합상영관 계획도 추진할 수 있었다. 심재명 위원의 경우 통합전산망의 필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했고, 의무화하지는 못했으나 극장 전산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이현승 위원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니까 인적자원 육성이라든지 영화인 재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목소리를 냈던 것이고. 사실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위원회가 방통융합에 대해 논의를 진행하던 상황에서 영화계쪽은 초대받지도 못해서 기초적인 정보 확보조차 쉽지 않았는데 방송쪽의 원용진, 송종길 교수가 있어서 내부에 논의 단위를 만들 수 있었다. 앞으로 법조계나 이런 쪽에서 영진위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고 이들의 전문적인 식견을 활용할 수 있다면 공정거래나 저작권 문제 대처에 용이할 것이라고 본다.

-3기 영진위의 경우 2006년 1월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암초를 만났다. 영화계와 정부를 오가야 하는 입장에서 무척 난처했을 것이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위원장 그만두고 싶었다. 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입장에선 결국 누군가가는 나서서 쿼터없는 한국영화의 우산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쪽으로 결론을 모아서 남았지만 말이다. 알겠지만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서 사실 우리가 치러야 하는 비용은 엄청나다. 독일,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자국영화 관객점유율을 20%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비용을 치렀나. 그걸 감안하면 한국 또한 스크린쿼터라는 사실 값싼 영화지원책을 포기함으로써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와 동시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영화의 위기가 가속화됐다.
=사실 지난해 극장에 걸린 112편 중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제외하면 80편쯤 된다. 이중 100만 관객 이상의 영화가 무려 31편이다. 인구 4800만명의 국가에서 자국영화에 대한 이 정도 호응은 일본이나 독일과 비교해도 한참 앞선다. 사실 한국영화 위기를 악용하는 이들은 한국영화가 뭐 새로운 게 있느냐고 몰아세우는데, 100만 관객 이상의 영화를 31편이나 만들어낸 영화인들에게는 과도한 비난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물론 제작비를 줄이고 부가판권시장을 되살리고 글로벌 시장을 확보해야 하는 영화인들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3기 위원회의 경우 딜레마에 부딪혔다고 볼 수 있다. 딜레마를 영진위가 자초했고, 그에 대해 책임지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영진위의 입장에서 좀 답답했을 것 같다. 덩치 커진 산업에 개입하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까. 갑갑한 적은 없었나.
=산업 자체에 어떤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활력을 도모하는 간접적인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영화계 안의 불공정 거래에 대해서 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해외수출과 관련해서 지나치게 비싼 값으로 한국영화에 팔렸던 것이나 마케팅 비용이 치솟는 상황은 개별 산업 단위에서 이뤄지는 것이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부가판권을 망가뜨린 불법복제를 처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보니 정부 부처와 협조가 필요한데 불법복제 건만 해도 저작권법을 개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당장 어떤 성과를 만들어내기가 어렵고, 필요한 예산 확보를 위해 설득하는 과정 또한 지난했다. 그러다보니 여러 과정들을 거치면서 위험한 사안들이 조속히 처리되기보다 지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점은 답답했다. 다만 불공정 거래 감시기구를 영진위 내부에 만들 수 있었던 걸 보면 아직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영진위를 중심으로 논의 테이블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산업의 위기든, 자본의 위기든, 부가시장 해체의 위기든, 뉴미디어와 관련된 위기든 의제들이 떠오를 때마다 영진위에 포럼이 형성되고 영화인들이 모인다. 그런 걸 보면 영진위가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산업 내에서는 불균형한 힘 관계를 갖지만, 영진위의 테이블 아래서는 모든 이들의 지분이 같고, 그래서 상생할 수 있는 방안 도출이 가능하다.

-3기 영진위가 가장 역점을 둔 사안은 해외 사업들이 아닐까 싶다. 해외 홍보책자의 경우 직접 제목을 붙일 정도였다고 들었으니까.
=처음엔 감독들을 중심으로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책자들을 펴냈다. 영화제 기간에 <코리안 필름 옵저버토리>를 내기도 하고. 한국학과 영화학이 같이 있는 대학들을 선정해서 DVD와 책자들을 보내고. 아. 홍상수, 봉준호 감독등의 영화를 순회상영한 것도 적지 않게 효과를 봤다. 사실 실제로 그곳의 관객과 직접 만나야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아직 구체적인 성과를 내진 못했으나 선댄스를 벤치마킹해서 만든 필름메이커스디벨롭먼트 랩도 앞으로 5년 정도면 가시적인 성과를 낼 것이라고 본다. 영어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감독들을 중심으로 해외쪽 파트너를 찾기 위한 프로젝트인데 감각을 익히는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유효하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감독뿐만 아니라 글로벌한 네트워킹이 가능한 프로듀서들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들을 위한 지원도 서둘러야 한다.

-영진위 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바깥에서 만나면 과거 선후배로 지냈던 이들에게까지 깍듯하게 존댓말을 썼다.
=내가 <씨네21>에도 그랬나. 아무래도 먼저 기자라고 생각하게 되더라. 사실 <한겨레> 후배에게 메일을 쓰다가 나도 모르게 극존칭을 써서 놀란 적도 있다.

-인터뷰어에서 인터뷰이로 몇년을 살아보니까 어떤가.
=질문에 집중해서 답하면 에너지가 의외로 많이 소모되더라. 한때 내가 편안한 기자라고 생각한 적 있다. 그래서 인터뷰도 되도록 길게 했고. 그분들에게 미안하다.

-앞으로 무슨 일 할 건가.
=또 일인가. 일 안 하고 놀 거다. 기수련도 통 못했고. 미국에서 사온 DVD도 꺼내보지 못했다. 매년 열리는 플래허티 세미나에 참여해서 다큐멘터리 공부를 좀 하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기자로 쭉 있었다면 올해 12월에 정년이 된다. 부천에도 결혼 이민자들이 많은데, 그들과 같이 하는 무언가를 해볼 생각도 있고.

-한국에서 사느라 스트레스 쌓일 이민자들을 위해 수지침을 전수하는 것도 좋겠다.
=내 몸에 침 놓는 건 괜찮은데 자격증이 없어서 남한테 놓거나 전하면 불법이다. 이 참에 정식 자격증이나 따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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