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살아있는 시체의 밤
2008-03-20
글 : 이창우 (영화평론가)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된 노인의 몸을 통해 정상성 비웃는 <라자레스쿠씨의 죽음>

누군가가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을 루마니아판 미국 응급실 드라마 <ER>이라고 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한 가지 사실만 제외한다면 이러한 논평은 적절할지도 모른다. <ER>이 환자를 살려서 정상적인 시민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애쓰는 의료진들의 드라마라면, 이 영화는 앰뷸런스에 실려온 주인공을 의료진들이 병원 밖으로 밀어내고, 그를 넘겨받은 병원들이 치료의 ‘지연’을 반복하여 그를 인간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배제’하고자 애쓰는(?) 드라마이다. 배경음악 하나없이 거의 모든 순간 카메라가 주인공으로부터 5m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 기록필름 형식인 이 영화는 어느 면에서는 참 살벌하고 관객의 마음을 짓누른다(특히 글쓴이를 포함해서 감정이입에 능숙한(?) 한국 관객은 거리두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는 크리스티 푸이유 감독의 지적인 코미디 작품이며 주인공 라자레스쿠의 입을 빌리면 그가 겪는 모든 경험은 역설적 의미에서 ‘축제’이다. 다른 관점에서 이 영화는 의료시스템을 다룬다기보다는 그 시스템의 대상인 몸의 정치에 관한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는 정상적인 환자에서 제외된 ‘예외’의 환자로 몰리며, 감독은 그의 성스러운 몸에 클로즈업함으로써 사회의 ‘정상성’을 근본부터 부정하고 있다.

정상적인 것을 비웃게 만드는 감독의 재치

한눈에 푸이유가 엄청난 유머의 소유자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독거노인 라자레스쿠는 고양이를 세 마리나 기른다. 이웃들이 볼 때는 더러움과 악취의 원천이지만 고양이들은 라자레스쿠의 가족이다. 그가 심한 두통으로 구조대를 부르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차에 치어 처참하게 뻗은 형상으로 소파 위에 얹혀 있다. 꽤 시간이 흐르도록 움직이지 않는 고양이를 보면 인형을 촬영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참 뒤 꼬리가 휙 하고 말려 올라갈 때 경탄이 절로 나온다. 첫신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원근법적으로 확장된다. 이웃에게 약을 구하러 현관문을 열 때마다 디스코 파티가 열린 아파트 위층에서는 쿵쿵거리는 댄스음이 들려온다. 또 그의 머리맡에서 이웃들은 주말에 와인을 함께 사러가는 계획을 이야기한다. 그가 들른 두 번째 병원에서 의료진들은 연인관계를 과시하고, 세 번째 병원에서 의사는 아들과 휴가 떠나는 부인을 깨워줘야 한다고 휴대폰 충전기 찾기에 분주하다. 말하자면 한편에는 고양이-디스코-와인-연애-가족 휴가로 확장되는 무사태평한 ‘쿨’한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처음에는 의사에게 또박또박 말대꾸하던 노인이 의식이 혼미해지면서 점차 관절인형처럼 흐느적거리고 의료 장치 안에서 기계적 존재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다. 아마도 압권은 CT 촬영기에 들어가기 위해 두터운 벨트로 팔을 결박당하는 장면일 것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그의 저서 <웃음>에서 웃음이란 인간의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요소가 외부의 기계적인 흐름에 종속될 때 발생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왈츠를 추는 우아한 파티장면은 단지 음악을 끄고 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로봇들의 동작 같아 보이며 이 때문에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왈츠의 청각적 효과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를테면 라자레스쿠의 혼미해지는 의식에 대한 카메라의 클로즈업일 것이다. 푸이유 감독이 미디엄숏으로 일관한 의도는 바로 이러한 ‘음악끄기’ 효과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카메라는 시간과 더불어 혼미해지는 라자레스쿠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이 아니라, 짐짝처럼 운반되고 마네킹처럼 옷을 갈아입히는 그의 ‘자동화된’ 신체의 겉모습을 비춘다. 이것은 코미디멜로였던 히치콕의 <해리의 소동>(1955)에서 마을에 버려진 시체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다니며 데이트 신청을 하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관객은 처음에 관심받지 못하는 시체라든가 노숙자가 구두를 벗겨내어 노출된, 시체의 우스꽝스러운 색동 양말 때문에 웃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해리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주민들의 ‘순박하고 정직한’ 일상에 대해 그 영혼없음을 깊게 성찰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라자레스쿠의 이웃과 의료시스템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보편적’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정상성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성 자체인데 이에 대한 생각의 단초는 자동인형이 된 라자레스쿠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관객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에서 마련될 것이다.

라자레스쿠 노인의 숭고하고 성스러운 죽음

이 영화에는 독거노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주인공과 관객이 동일시되기 어려운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그것은 원초적 이유에서인데 라자레스쿠는 매우 비위생적이고 추한 신체의 소유자로 그려지기 때문이다(그는 반복해서 토하고 오줌 싸며, 그의 대변색이 논의되고, 종아리에 붙은 썩은 피가 화면에 비친다). 주인공의 이미지가 ‘배설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감독은 크리스테바가 제안한 ‘비체’(abjection)라는 개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람들은 자기 몸속의 것이면서도 일단 세상에 나가는 순간 그것을 비천한 것으로 여겨 타자화한다. 일견 자기 자리에 있지 않음으로써 기존 질서를 교란시키는 존재. 따라서 주체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것을 비위생적이고 터부시함으로써 자신의 정상성을 지키고 테두리를 확정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라자레스쿠는 사회의 배설물이 되며 그가 들른 의료기관이 그에게 치욕을 가하는 것은 사회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함이다(그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자 의사는 “아직 머리가 붙어 있다는 얘기군”이라든가 “당신의 문제는 바로 뇌요”라고 답한다). 좀더 정확히 말해 의료기관은 그가 치료할 가치가 없는, 환자가 아닌 환자임을 사법적으로 판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신경과 의사는 “피고가 어디 있지?”라며 주인공을 찾는다). 그러나 라자레스쿠는 한달에 한번 나오는 연금을 고스란히 누나에게 부쳐주고 있으며, 2차대전 당시에는 미군에 맞서 싸웠던 군인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토와 배설 이외에도 영화는 두 가지가 더 반복적 흐름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서로 길항관계에 있는데, 심문하듯이 부르는 라자레스쿠라는 이름의 호명과 점점 옷이 벗겨지는 그의 몸이다. 호명은 주인공의 상징적 정체성을 확정하거나 삭제하겠다는 사회의 강박으로 보인다.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물 흐르듯이 흐르는 사태의 전개 안에서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관심을 갖도록 강제한다. 하지만 혼수상태로 도착한 마지막 병원에서 의사가 “그의 이름이 문서에 적혀 있는 것을 내가 왜 못 보았지?”라고 중얼거림으로써 영화는 호명과 대답이 허구적 게임에 불과하였음을 자연스럽게 폭로한다. 이어서 라스트신이 보여주듯이 주인공의 정체성에 관한 해답은 완전히 발가벗은 그의 몸에 대한 클로즈업으로 대체된다(두명의 간호원이 그의 옷을 담으면서 “옷 뭉치가 많기도 하네”라고 말하는 것은 옷없는 몸장면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복선이다).

상징적 수준에서 이미 죽었으며 이제 육체적 죽음을 기다리는 라스트신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먼저 감독은 기독교 미술의 공통주제인 피에타(죽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멋지게 세속화했다. 차디찬 수술실에서 간호보조원 중년 여성은 시체 닦듯이 그를 닦고 삭발까지 시킨 다음 “나 여기 있기 싫어”라고 달려나간다. 우리는 그가 더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음을 안다. 그러나 깨끗한 면사포에 덮인 그의 벗은 몸에서는 묘한 숭고함이 발산된다. 다른 관점에서 이 장면은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을 이야기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고스란히 시각 이미지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아감벤이 제안한 ‘호모 사케르’(성스러운 인간)란 신의 소유이므로 그를 희생양(제물)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여도 법의 처벌을 받지 않는 로마법에 정의된 존재이다. 아감벤은 이를 중세의 ‘늑대 인간’, 홉스 시대의 ‘재판에 회부되지 않는’ 어떤 유형의 범죄자들, 나아가 슈미트가 국제법 탄생 초기의 문제적 존재들이었던 해적들, 그리고 근대 생명정치의 출현 이후의 모든 ‘국민’(나치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이들의 지위를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과 같은 수많은 ‘벌거벗은 생명들’로까지 확장했다. 우리로 치면 이주민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법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박해당하는 존재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 점에서 라자레스쿠의 벌거벗은 몸은 그의 처지가 누군가를 위한 희생도 누군가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한 처벌도 아닌 모든 정상적인 사회내적 의미에서 밀려난 ‘사회의 예외’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사회적 그물망 외부에 놓인 그의 몸 반대편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의료진들은 마치 유산상속에 대한 대화를 연상케 하는 권리 의무 관계(그가 누운 침대의 소유를 둘러싼 구조대와 병원쪽의 대화)를 논의한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버림받은 그의 상황은 동시에 사회제도의 전체 범위를 윤곽 지우고 근본적 수준에서 거부하는 이미지로서 작동하고 있다.

사회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배제의 사슬

라자레스쿠의 여행(?)은 사회가, 어려움에 처한 개인을 대하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알레고리다. 독재의 그림자는 지식-엘리트의 권위주의로 전환했고 소시민적 이기주의는 생각보다 치명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미덕은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있다. 무사태평한 세계와 그 세계의 리듬에 맞추어 점차 인형이 되어가는 할아버지의 상황은 일련의 응급 상황을 코믹한 축제로 만들었다. 또한 악센트처럼 간간이 등장하던 배설물로서 묘사된 인간의 이미지는 정상세계가 터부시하는 타자로 응결되며, 종국에는 인간세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그리하여 살해해도 처벌받지 않는) ‘성스러운 몸’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모든 라자레스쿠에 관한 묘사는 동시에 사회가 굴러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들른 네 병원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다. 연속적으로 연기되고 유보되는 라자레스쿠의 치료는 한칸의 빈자리가 있어 나머지 숫자판이 모두 움직일 수 있는 어린 시절의 게임판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어쩌면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전이되는 배제의 사슬이야말로 사회 네트워크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메타포가 아닐까? 여하튼 감독은 이 시대의 억압을 차우셰스쿠 독재 시절보다 더 심각하게 보는 것임에 분명하다. 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해지듯이 지금은 “전쟁이나 77년 대지진”에 비견되는 재앙의 시대이다. 이 대사는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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