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후면비사]
[한국영화 후면비사] 웃으면 흥행이 와요
2008-03-20
글 : 이영진
1960년대 중반 배우들의 잇다른 사고에도 희극영화 인기몰이
<여자가 더 좋아>

“무슨 액운이 이리 잦아”, “그러게 말일쎄. 이번엔 합죽이 김희갑이 다쳤다면서?”, “운전석 옆 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앞 유리를 뚫었다고 하더라고”, “합죽이는 11월이 끔찍할 거야. 6년 전에도 임화수한테 얻어맞아서 갈빗대 나갔잖아”, “것뿐이야. 안양세트 무너져서 한달 넘게 병원신세를 진 것도 11월이지. 해외 로케 갔다가 비행기 불시착으로 가슴 졸인 것도 11월이고”, “지난번에 구봉서였는데, 이번엔 또 누가 변고를 당하려나”.

‘찬바람 불면 조심하라.’ 연예계에서는 11월을 흉흉한 달로 꼽는다. 요즘도 연예가가 발칵 뒤집히는 각종 사건 사고들은 모두 11월경에 터져나온다고 하지 않나. 1965년의 늦가을도 흉흉했다. 특히 ‘희극트리오’라 불렸던 서영춘, 구봉서, 김희갑 등이 잇따라 사고를 당했다. 구봉서는 10월26일 정창화 감독의 <광야의 결사대> 촬영 중 팔다리 골절상을 입었다. 촬영 당시 터진 수류탄 뇌관을 피하기 위해 급히 다이빙을 했는데 그곳이 그만 12m 낭떠러지였다. 무려 전치 6개월의 진단이 나왔고, ‘웃기는 삼총사’의 막둥이 구봉서는 반년 넘게 깁스 상태로 지내야 했다. 두 번째 수난은 ‘합죽이’ 김희갑의 차례였다. 11월8일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당시 본인 소유의 자가용 윌리스 왜건을 타고 서울역 앞 로터리를 지나던 김희갑은 운전사가 대포를 과하게 들이켠 ‘츄럭’과 충돌, 안면 상해를 입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피를 흘리는 바람에 김희갑은 실명한 줄 알았다고 한다. 피하고 싶은 우연은 멈추지 않았다. “봉변 제3호는 살살이 서영춘군.” 시민회관에서 만담을 진행 중이던 그는 볼일 보러 화장실에 갔다가 불량패거리들로부터 “쇼 출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인두로 지짐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쯤되니 ‘수난의 희극 트리오 사건보고-좌족골절, 안면부상, 인두화상미수’라는 타이틀의 연예화제 기사(<조선일보> 1965년 11월18일)가 나올 법도 했다.

웃음을 죄악시하는 어느 집단의 소행 아닐까. 음모론을 제기해볼 법도 하지만 정작 웃음 트로이카 3인방이 이처럼 봉변을 당한 데는 그리고 언론들이 이들의 정황을 이전과 다르게 큼지막한 특급기사로 다룬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사실 1965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희극은 천시받는 처지였다. 148편의 영화가 제작됐던 1963년의 경우, 희극물도 19편이나 만들어졌으나 82편이나 만들어졌던 멜로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원래 희극영화는 멜로드라마와 달리 10만명 이상이 개봉극장에서 동원된 예가 거의 없었고, 한국 관객의 취향은 희극보다도 비극에 더욱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한국영화전사> 이영일, 소도) 그런데 1960년대 중반 김기풍 감독의 <여자가 더 좋아>가 터져나오면서 ‘돌연변이’ 기류가 부상했다. 여장을 하고서 결혼한 옛 애인의 집으로 침투해 식모로 일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무려 17만6천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여장 남자라는 사실이 들통나자 남자가 치마를 걷어쥐고 브래지어를 붙잡고서 줄행랑 치는 마지막 장면은 특히 인구에 회자됐는데, 이 영화로 “쇼 무대에서는 베테랑이지만 영화 출연 경험이라고는 한컷 출연이 전부였던” 서영춘은 “전파와 은막을 동시에 석권하는” 일약 스타의 자리에 올라선다. 이를 기점으로 충무로에서는 일대 희극 붐이 이는데, <출세해서 남주나>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 <총각김치> <주책바가지> 등이 쏟아져 나온다. 한편에서는 수준 이하의 저속한 난센스 영화라고 손가락질을 해댔으나, 대중은 개봉관이 아닌 3류극장에서 선보인 아류 코미디영화에도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었다.

꿀맛 같은 대접을 처음 받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변고를 당한 이들로선 손해막심. 구봉서의 경우, “매일 1200원의 입원비보다 출연 중이던 7편의 작품 중단이 더 걱정”이라며 깁스한 상태로 병원에서 라디오 연속극을 녹음했고, 배우의 생명이기도 한 얼굴을 꿰맨 뒤 불과 이틀 뒤에 김희갑이 곧바로 <유관순> 촬영현장에 나서는 등 부산을 떨었던 것도 한번 찾아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들의 소원대로 코미디 전성시대는 다소 주춤하긴 했으나 1960년대 말에 또 한번 찾아오는데 “성의 전도라고 하는 소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남자식모> <남자와 기생> <팔푼며느리> <팔푼이 사위> <남자미용사> 등 이 무렵에 나온 코미디는 “백치적인” 인물과 상황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다는게 중평. “사실 그거는 청춘물이지. 근데 그게 코미디로 히트를 했다고.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해.” 구봉서가 출연한 <청춘사업>(1965)에 대한 대중의 의외의 반응에 놀란 것을 시작으로 1960년대 말 식모, 팔푼이 시리즈 등을 내놓으며 대표적인 코미디 연출자로 이름을 알린 심우섭 감독의 말은 당시 대중이 무척이나 웃음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그 웃음은 어떤 톤일까. 전쟁이 끝난 지 벌써 10여년, 굶어죽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의 웃음일까. 그게 아니면 “인간을 월부로 사는” 아이로니컬한 세상이 도래한 것에 대한 조소일까.

참조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 <한국영화를 말한다> <영화의 메카 충무로> <한국영화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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