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봉인되어 있던 왕년의 캐릭터들이 할리우드에서 알라딘이라도 만난 것일까?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80년대 만화와 완구 캐릭터의 영화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이것은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 맨 등 일련의 코믹 히어로들의 영화화와는 차별적인 또 다른 하나의 붐을 예고하고 있다. 어쩌면 지난 5년 동안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주름잡았던 미국 마블과 DC 사단 초인들의 활약은 이제 그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울버린 등 차기주자들이 대기 중이나 그들의 역량은 선배들에 비해 한참 모자란다. 오히려 그 바통은 번쩍거리는 금속의 외피를 두른 로봇 캐릭터와 완구 캐릭터들이 이어받았다. 그 선두주자는 단연 <트랜스포머>. 지난해 7월 개봉 뒤 불과 반년 만에 극장 흥행수익으로 7억달러, DVD 및 부가판권 판매로만 3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파라마운트사에 안겨준 <트랜스포머>는 할리우드 판권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미 <트랜스포머>가 개봉하기 전부터 조짐은 있었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가 요시다 마쓰오의 1960년대 일본 TV애니메이션 <마하 GO GO GO>를 <스피드 레이서>란 이름으로 영화화한다는 소식도 모자라 이십세기 폭스사에서 실사영화는 상상도 못했던 <드래곤볼>을 영화로 만든다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말이다. 사실 <트랜스포머> 역시 그 기원은 일본의 완구회사 다카라에서 만든 미크로맨과 다이아크론이라는 로봇완구가 그 출발점이었으니 그야말로 요즘 할리우드는 왕년의 일본 캐릭터들이 주름잡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광란의 복고 열풍은 일본의 만화뿐 아니라 <스트리트파이터> 같은 추억의 비디오게임, 심지어 벨기에 TV애니메이션 <스머프>에까지 불어닥쳤다. 덕분에 2009년에는 크리스틴 크룩이 날리는 춘리의 스핀바드킥과 익숙한 할리우드 배우의 목소리로 ‘랄~랄라랄라라’ 노래를 부르는 3D 입체 스머프들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손오공이 날리는 에네르기파가 어떻게 실사화될지 궁금해할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디지털 기술로 화려하게 재탄생한 왕년의 캐릭터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소재 빈곤에 시달리는 할리우드라지만 막강한 시나리오작가군과 세련되고 고상한 자국의 소설들이 여전히 건재한데 말이다. 현재 제작 중인 영화들의 원작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고상한 쪽과는 거리가 멀다. 이 의혹은 이십세기 폭스사의 <백수왕 고라이온>(미국명: 볼트론), 유니버설사의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미국명: 로보텍), 파라마운트사의 <히-맨> 등 메이저 제작사들이 추가로 발표한 제작 리스트를 더 살펴보면 풀리기 시작한다. 일련의 원작들은 공통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작들이며, 예외는 있지만 그 발원지가 미국이 아니라는 것이며, 미국에서도 다른 이름이건 형태건 변형된 형태로 열렬한 마니아들을 형성했다는 것, 그리고 조잡하지만 저렴하고 가동성이 좋은 완구로 어린이들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대부분 완구화가 이뤄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향후 십년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트렌드이자 수익 공식처럼 될 수 있기 때문. <트랜스포머>는 개봉에 맞춰 단계적으로 수집종의 변신로봇 완구와 피겨를 출시했고 영화의 흥행만큼이나 대박에 가까운 선풍을 끌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10억개에 가까운 수량이 출시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수입하는 즉시 대형마트와 인터넷숍에서 품절 사례를 일으킬 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향수를 불러일으킬지언정 구매욕을 자극할 것 같지 않은 허섭한 왕년의 캐릭터들이 이토록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원동력은 뭘까? 그것은 한계의 끝을 찾을 수 없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다. <스트리트파이터>나 <히-맨>의 경우, 90년대 실사화되었으나 허섭한 화면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캐릭터 상품 역시 나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지금의 할리우드에 불가능이란 없다. <트랜스포머>에서 자신감은 확신으로 바뀌었으며 퇴색한 왕년의 2차원 스타들을 뻔쩍뻔쩍한 3차원 멋쟁이들로 바꿀 태새다. 그런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당시 그 캐릭터들을 향유하는 세대가 어른이 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원동력이다. 트랜스포머 장난감을 갖고 놀고 히맨 놀이를 하던 코흘리개들은 어른이 되어 이제 그 시절 향수가 업그레이되길 원한다. <트랜스포머> 제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원작 만화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스피드 레이서>를 만드는 워쇼스키 형제는 <마하 GO GO GO>를 보고 자랐다. 팝스 레이서 역을 맡은 존 굿맨에게 일본 원작 캐릭터의 카이젤 수염까지 그대로 기르길 요구할 정도로 원작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의 주인공을 맡은 토비 맥과이어 역시 어린 시절 원작의 열렬한 팬이었기에 자진해서 제작에까지 참여한다. 어린 시절 꿈을 현실로 이루려는 이러한 열정과 디지털 기술이 만나 새롭게 탄생한 실사 캐릭터들은 꽤 구매력이 있다. 그 옛날 평면적이었던 셀애니메이션의 로봇들은 장난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현란한 실사로 재탄생한 로봇들은 장난감의 틀을 깨고 근사한 어른들의 피겨로 재탄생한다. 물론 지금의 어린이들 역시 이런 근사한 ‘장난감’을 마다할 리 없다.
아이의 손을 끌고 자신을 위한 ‘피겨’를 사는 어른들
이런 흐름 속에서 그야말로 대박에 가까운 수혜를 누리고 있는 회사는 <트랜스포머>를 만든 파라마운트사가 아니라 <트랜스포머>와 <G.I. 조>의 판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완구회사 하스브로사다. 지난 2000년 1억5천만달러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해 수백명의 직원을 정리해고했던 하스브로사는 지난해 <트랜스포머> 관련 완구사업에 힘입어 4/4분기 순수익만 1억3370만달러를 기록했고 2006년 대비 30%가 넘는 성장을 이룩했다. 더 고무적인 건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 <트랜스포머>보다 더 상품군이 다양하고 역사도 깊은 <G.I. 조>가 영화화되며 <트랜스포머2> 역시 착착 제작이 진행 중이다. 하스브로표 콘텐츠라면 어떻게든 판권을 따야겠다며 몸이 단 워너브러더스사가 <모노폴리> <클루> <오위자> <배틀십> 등의 보드게임까지 영화화하기로 하면서 조만간 하스브로사는 완구시장 부동의 1위였던 마텔사를 제치고 왕좌에 등극할 전망이다. 바야흐로 ‘하스브로의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하스브로의 성공에 자극받은 마텔은 히맨, 바비 등 자사 완구 캐릭터들의 영화화에 뛰어들었고 자체 판권이 없는 맥팔레인, 사이드쇼, 메즈코토이, 네카, 젠틀 자이언트 등 유수의 완구회사들은 이 영화들의 피겨 제작을 위한 라이선스를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트랜스포머>의 원조였지만 그 영광을 미국에 고스란히 빼앗긴 일본 영화계도 비슷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8월에 개봉한 도에이사의 극장판 <가면라이더 덴오>는 흥행수입 15억엔을 기록했고 DVD는 10만개 이상이 팔렸다. 이것은 지난해 도에이사가 제작한 영화 중 으뜸가는 성적이며 가면라이더 피겨 역시 개봉 이후 50만개가 팔렸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도에이사는 현재 2탄을 제작 중이며 가면라이더 외에 60~7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 특촬물 캐릭터들이 다시 현대적인 의상을 갈아입고 재탄생할 예정이다.
<트랜스포머>를 기점으로 시작된 할리우드와 일본 영화계의 노선 전환은 부가판권시장이 전무한 우리 영화계와 캐릭터 산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미국과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2000년대 들어 피겨 수집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현재 피겨를 모으고 즐기는 수집가들도 수십만명에 달한다. 지난해 8월 로봇 태권브이 피겨가 7만5천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에도 한정판 2천개가 판매 시작 이틀 만에 동이 났다는 사실은 한국 역시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른을 위한 캐릭터 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명백한 증거다. 20~30년의 세월을 인내하고 다시 태어난 완구들은 더이상 장난감이 아니다. 옛날처럼 코흘리개 꼬마들이 엄마 손을 이끌며 완구점으로 들어가던 풍경은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이끌며 완구점으로 들어가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어린 시절 트랜스포머 변신로봇을 모으고, 5개의 사자를 합치면 멋진 로봇이 되는 백수왕 고라이온을 염원하고, 달려라 번개호 RC카를 갖고 놀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아이를 위한 장난감뿐 아니라 스스로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동심과 향수를 만족시켜줄 피겨를 사기 위해 선뜻 지갑을 열게 되었다. 그런 변화야말로 추억의 완구 캐릭터들이 스크린으로 화려하게 귀환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