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저마다 그릇을 하나씩 갖고 그 그릇의 내용물을 평생 퍼먹고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걸 빨리 퍼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퍼먹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텐데, 주 대표는 후자다. 그러니 앞으로 얼마나 많이 퍼먹겠나.”(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 주필호 대표는 1994년 5월 영화홍보사 ‘미디어트랙’을 차리고 (“촌스럽다”며 정승혜 대표가 추천해준) ‘영화방’으로 회사명을 바꾼 뒤 17년간 그곳을 운영해왔다. 손예진, 김주혁 주연의 멜로물 <아내가 결혼했다>를 제작 중인 그의 꿈은 오래전부터 제작자였다. 지금의 주피터필름을 처음 회사에 등록한 시점도 무려 9년 전. 그간 수많은 프로젝트를 제작 시도하고 또 중도에 멈춰야 했던 그는, 비공식적으로 조용하게 치러진 <아내가 결혼했다>의 고사 날, 씨네2000 이춘연 대표에게 “이미 영화를 대여섯편은 만든 사람의 심정”이란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한다. “그 말을 듣고 이 사장님이 그러시더라. 그건 네가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만들어봤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쓰고, 캐스팅하고, 영화 찍고, 개봉까지 시켜봤기 때문이라고. 너무 많은 영화들을 그렇게 다 끝내봐서 덤덤한 거라고. 그리고 그게 제작자들의 일이라더라.” 1964년생. 마흔넷에 제작자 타이틀을 얻었다는 건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결코 늦은 일이 아닐 것이다. 정승혜 대표의 비유대로 그의 그릇은 이제 수저를 뜨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아내가 결혼했다> 진행 상황은 어떤지.
=40% 좀 못 찍었다. 35% 정도. 5월7일 스페인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 경기가 있다. 세 주인공 손예진, 김주혁, 주상욱이 그 경기를 보러 가는 장면이 마지막 촬영이다. 국내 촬영은 4월25일 정도에 끝난다. 그래서 5월 중순 정도면 크랭크업한다, 가 될 수 있겠다.
-지금은 주로 서울에서 촬영 중인가.
=2주 전까지 세트 촬영을 3주간 했고. 지금은 서울 여기저기에서 촬영 중이다.
-제작비는 얼마나 되나.
=보통 이런 것들도 다 솔직하게 얘기하나.
-그럼. 당연하다.
=(결심한 듯) 33억5천만원 정도 들었던 것 같다. 그게 우리 순제작비. 총제작비는 50억원 정도 될 것 같다.
-제작비가 적은 건 아닌 듯하다. 캐스팅에 든 비용이 컸나.
=스페인 가는 것만 생각해도 50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비행기 삯만 1억원 정도 든다. 또 우리 스탭들은 임단협 기준에 맞춰 계약했다. 임단협 협상 내용을 적용해보니까 1억6천만원에서 2억원에 육박하는 비용이 올라가는 것 같더라.
-회차는 얼마나 되나.
=45회차다. 감독님과 프로듀서도 모두 그런 건 철저히 지키자고 했고, 한국 영화계 실정도 어렵고 하니까 더 긴장해서 찍는 것 같다. 내일 찍을 거 오늘 찍기도 하고, 10번 찍을 거 5번 찍고. 감독님이 그런 면에서도 노력을 많이 해주신다. 그래서 현장 분위기를 잠깐 말씀드리면 현장이 너무 평화롭다. 정말 아무 문제도 없이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현장편집본도 좋고. 그래서 좀 자찬하자면(미소) 하반기 최고의 킬러 콘텐츠가 되지 않을까(미소) 생각한다. 원작도 베스트셀러고. 지금 45만부 정도 나갔다. 원작에는 축구라는 큰 서브플롯이 있는데 그걸 과감히 도려냈다. 서브플롯을 무시하고도 대본을 잘 뽑았다고 생각한다.
-첫 제작영화에 손예진, 김주혁을 캐스팅했다.
=조심스럽게 얘기해야겠군. (웃음) 제작자가 해야 할 몫은 그런 거 같다. 어찌됐든 시나리오를 잘 만들어야 하고, 그 시나리오를 가지고 투자사를 잘 유치해야 하고, 캐스팅을 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풀어내는 게 제작자의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그중에서 나는 시나리오만 1년6개월이 걸렸다. 그 사이에 작가만 해도 3명이 있었고, 감독이 다시 한번 손을 봤으니 4명이 손을 본 거지. 원작은 살 때도 판권구매 경쟁이 치열했다.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그래서 판권료도 비쌌고. 전년도 수상작인 <미실>도 경쟁이 치열했다고 하더라. 어쨌든 그 원작을 사서 웬만한 투자·배급사엔 다 뿌렸다. 근데 들려오는 얘기는 ‘이거 각색하기 힘들다’였다. 내 생각에 나는 돈도 없고, 원작이 상도 받고 했으니까 개발비를 받아서 진행해보겠다 생각한 거였는데 그 과정이 수월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떻게 해서 CJ까지 갔다. 캐스팅은 원작 구매할 때부터 손예진을 0순위로 생각했다. 2년 전부터 섭외해온 거다. 손예진쪽에선 원작도 재밌어 했고, 시나리오도 잘 봐주셨다. 김민숙 대표(손예진의 매니저)한테 특별히 감사 드린다. 주변의 우려도 있었고 했는데 어찌됐든 시나리오를 잘 보셨다. 손예진 본인에게도 자기가 하면 충분히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김주혁씨도 마찬가지고. 시나리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배우들이 그걸 하겠나. 그래서 시나리오가 가장 우선적인 문제가 아닌가. 나의 경우 시나리오나 투자·배급사 핸들링하는 것보다 캐스팅이 더 수월했던 것 같다. 거기에 특별히 우리 김민숙 대표님께 감사 드린다고… (웃음) 아부성 멘트를…. (웃음)
-충무로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다. 주변에 물어보니 공통된 이야기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제작 일을 드디어 하게 되었다며 잘됐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보니까 내가 주피터필름을 2000년에 영화사 등록했더라. 9년 만에 영화를 찍는 거다. 9년 동안 돈 많이 썼겠지. (미소) 내가 지금 충무로 영한빌딩의 11, 12층을 쓰는데 하나가 영화방이고 하나가 주피터필름 자리였다. 9년간 여섯 작품이 있었다. 준비만 하다 엎어진 게 아니라, 여섯편이 다 투자를 받았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 여섯편이 모두 오리지널 시나리오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원작을 좀 싫어하고 오리지널로 승부를 보려고 했다. 근데 그게 힘들더라. 그중 한두 작품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원작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신문 기사 한줄 보고도 시나리오를 구상했는데 원작을 사서 시작하니까 기본적으로 70, 80점에서 시작하게 되는 거다. 0점이 아니라. 그래서 이름없는 제작사로서는 좀 과하게 원작 구매를 많이 해놨다. 여튼 그 여섯편을 다 투자 받고도 왜 끝까지 완성하지 못할까, 나는 뭐가 부족할까 뒤돌아보니 걸리는 게 시나리오의 완성도 문제더라. 그리고 캐스팅 문제. 여기서 다 주저앉더라. 촬영을 2~3주 앞두고 엎어지기도 했다.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는 투자사에서도 지원을 안 해주니까 내 돈을 넣는 거다. 그래서 돈 많이 까먹었다.
-1994년에 영화홍보사 영화방을 차리고, 2006년 12월에 폐업신고했다. 2000년에 주피터필름을 차린 뒤로 9년 동안 겸업을 해온 셈인데, 어느 한쪽을 진작에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
=폐업신고 안 한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집에서 독립은 했고, 벌이는 있어야 하지 않나. 연출부 해서는 돈이 안 되고. 그나마 돈이 되는 쪽이 홍보쪽이더라. 그래서 마케팅회사를 만든 거다. 원래 그걸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근데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잔돈 버는 맛에, 생활은 되지만 절대 제테크는 안 되는, 지금 이 말 꼭 써달라, 홍보대행료 가지고 재테크는 절대 되질 않는다. 먹고살기 빠듯하다. 어찌됐든 그 없는 돈에서 시나리오 개발도 하고 했던 것들이 제작자로서 나에게 디딤돌이 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려우려면 똥줄이 타도록 어려워야지 앞으로 달려나갈 의지도 생기는 건데 그러질 못했던 거다. 자극이 필요했는데 홍보대행사를 하고 있으니 기대는 면이 없잖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과감히 클로징해버렸다. 지금부터 나한텐 수입원이 전혀 없다. 영화제작업 이거 하나만 하자. 예전에도 한번 영화방을 닫을 결심을 했었다. 그때도 동료, 선배들은 다 앞서나가고 영화 제작하고 그러고 있는데 나만 너무 뒤처진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마케팅도 고유 영역으로서 일의 재미가 있었다. 돈은 많이 못 벌지만.
-그 9년을 돌아보면 어떤지.
=어찌보면 좀 아깝기도 하다. 내가 제일 혈기왕성한 시절인 30대에 제작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걸 못했으니까. 나는 사람이 30대에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있고 40대에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있고 50대, 60대에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아이템이라도 그걸로 말할 수 있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뒤를 돌아봤을 때 아쉬움이 좀 남는다. 내가 너무 욕심을 많이 냈던 것 같기도 하고. 일보 양보하고 했으면 충분히 데뷔전을 쉽게 치를 수 있었을 텐데. 예전에 씨네2000 이춘연 사장이 그런 말씀 하시더라고. 너는 혼자서 다 하려고 그래. 그 말이 굉장히 가슴에 남는다.
-영화방을 운영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도 궁금하다. 많은 영화들을 홍보마케팅했을 텐데.
=<비천무>(2000) 때문에 한번 뉴스에 나왔다. 예전에 보니까 워너브러더스의 본사 마케팅 부사장도 “마케팅 이즈 라이즈”라는 말을 하던데, 나는 마케팅이 대중을 현혹시키는 거라고 생각한다. 대중을 꼬드기는 거지. 귀엽게 아양을 떨든 협박을 하든 선물공세를 하든 어쨌든 대중을 꼬드기는 일이다. 고상한 말을 하느냐 양아치 같은 말느냐 사용하는 톤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 영화를 홍보하면서, 이걸 무조건 성공시켜야겠다는 일념하에 많은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그중 하나가 ‘김정일이 김희선 팬이니까 <비천무>를 본다’ 이런 얘기였다. 북한에 프린트를 보냈다. (웃음) 그게 거짓말로 밝혀진 거다.
-엄청난 거짓말을 했다.
=예… 북한에다 어떻게 확인을 하겠냐 했지. (웃음) 프린트가 베이징을 통해서 갔다, 뭐 이런 상상으로 어린 생각에 성공 한번 시켜보려고 한 거다. 그래서 내 기억으론 그때 MBC에서 취재를 왔는데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겠다 하고 도망가버렸다. (웃음) 그땐 ‘이연걸이 납치됐다’ 그런 것도 있었다. 이연걸은 홍콩에 잘 있었거든. (웃음) 근데 그런 뉴스가 나면 영화가 흥행하고 그런 시절이었다. <비천무>도 당시 234만명 들었다.
-중앙대 영화과를 졸업했다. 박광현, 최호 감독 등과 동기였는데 영화를 연출할 생각이 있었나. 어떻게 영화계에 입문하게 됐나.
=사실… 내가 제작한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91년에도 하나 제작했다. (웃음) 물론 나 혼자 한 건 아니다. 학교 선배들하고 같이 했는데, 이정국 감독(<편지>(1997))의 데뷔작인데 <부활의 노래>라고 5·18 당시의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모델로 한 영화였다. 그 영화의 공동제작자 중 한명이었다. 그걸 학생들끼리 어렵게 만들었는데 24분인가 잘린 채 중앙극장에서 2주 만엔가 내렸다. 최근에 <화려한 휴가>를 보는데 우리가 그때 너무 앞서갔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웃음) 그 영화를 끝내고 91년인가 92년에 김동빈, 홍기선, 송능한 감독들이 있던 파랑새영화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이른바 ‘소셜 리얼리즘’ 계열의 <두 여자 이야기> 같은 영화에 꽂혀 지냈다. (미소) 당시 운동권이라는 의식있는 분들을 존경하고 좋아해서 장산곶매에도 잠깐 있었고 거길 탈퇴해서 유희숙 대표가 있는 애드시네마에 있다가 94년 4월에 <펄프 픽션> 홍보차 기자들 데리고 칸영화제 갔다오면서 홍보계에 입문하고 5월에 바로 홍보사를 차리게 된 거다.
-<부활의 노래> 만들 때 나이가 어떻게 됐나.
=복학한 2학년이었다. 나한테 돈이 없으니 친척들한테 돈 빌려서 투자했다. 제작비가 당시 1989년 돈으로 1억2천만원이 들었다. 나한테 TV 판권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안 사가더라고. (웃음) 그 판권을 아직 못 팔았다.
-그때는 제작자로서 무슨 일을 했나.
=일당백이었지. 조감독도 했고 스탭도 했고. 다 하는 거지. (뭔가 생각난 듯) 그때 또 우리가, 뭔가 해본답시고 국민주 방식으로 모금을 했어요. (웃음) 고모, 삼촌, 작은아버지 이런 분들한테 다 국민주를 발행해줬어. 우리 회사에서. 그래서 200만, 300만원씩 걷었다니까. 그때 대학 수업료가 40만~50만원 했을 거다.
-회사도 차렸단 얘기다.
=이정국 감독이 학교 선배다. 그분이 하자 그래서 그래서 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새빛영화사. 창립멤버들이 대여섯명 됐던 것 같다. 나는 처음엔 실장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까 제작자가 돼 있더라고. 엮인 거지(웃음) 어린 나이에. (웃음) 아니지, 우리 감독님 욕 먹으면 안 되는데(웃음), 나랑 같이 작업할 건데. (웃음)
-주피터필름의 향후 라인업은 어떻게 되나.
=올해를 이야기하면 이종호 작가의 원작 <IF>를 갖고 만드는 <쓰뱅가리의 선물>(가제)이 상반기에 들어갈 예정이고, 7월 중순에 <혈투>라는 액션스릴러도 한편 들어갈 예정이다. <쓰뱅가리의 선물>은 아직 투자결정이 안 됐는데 <혈투>는 투자가 결정됐다. 그리고 운 좋으면 한 작품 더 추가될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제일 자신있는 프로젝트는 <어깨들의 합창>이다. 7년 전부터 기획해서 지금까지 끌어온 프로젝트인데, 오리지널로 승부를 보려고 했던 그런 프로젝트다. 교도소가 주무대이고 ‘어깨’들이 모여 합창단을 만드는 얘기다. 깡패영화는 절대 아니다. 많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돈을 엄청나게 벌겠다 이런 욕심이 아니라 다양한 영화들을 많이 만들고 싶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로저 코먼 같은 제작자가 되고 싶다.
-그런 제작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 회사를 꾸릴 생각인가.
=영화는 결국 오너 비즈니스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한국의 상황에선 그런 것 같다. 지난 몇년간 충무로에서 인수합병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크리에이티브가 많이 상실됐던 것 같다. MK가 명필름으로 돌아온 것도 그런 의미라고 생각한다. 프로덕션 중심의 시스템이 다시 부활해야 한국영화 위기가 타개된다고 생각한다. 명필름 같은 제작사들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배급사 많아 봤자 뭐하나. 그걸 떠받치는 건 결국 프로덕션이다. 제작이 본연의 임무가 되는 영화사. 주피터필름은 그렇게 되고 싶다.